첫째날













 4. 운 : 비밀의 무덤




 

 


 

  맹물보다도 싱겁다! 날치기에 대한 짧은 소감.

  훔친 가방을 내 방에 들여놓는 지금, 무지하게 나쁜 짓을 했다거나 뒤가 구려 벌벌댈 잘못을 했다는 죄책감 따위는 코딱지만큼도 안 든다. 돌아와서 반갑다 인마, 언제나처럼 쿨한 기운.

  창문에 기대서 노란 장판 위에 오도카니 놓인 가방을 노려본다. 그래 봤자 고작 물건일 뿐인 게, 팔짱을 끼고 싸움이라도 걸어오는 기분이다, 쳇. 처음에 가방은 거리에서 헌팅이라도 당한 여자처럼 도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이따위 허접한 가구와 싸구려 이불은 뭐냐는 식으로, 세련된 명품 가방의 고고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시선을 착 내리깔았다. 나는 어깨만 으쓱했을 뿐, 무시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한 건 내가 아니잖아? 정답! 가방은 조금씩 더 몸을 움츠리는가 싶더니 그저 잘 부탁드린다는, 약간은 체념한 태도로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현명한 선택이야! 아님 말고.

  가방을 들고 집으로 들어온 지 겨우 5분 남짓. 누가 따라오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걷느라 똥줄이 다 당겼다, 후아. 하지만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하니, 오늘 나는 녀석을 가질 사람으로 미리 정해졌음이 분명하다. 아니라면 오늘따라 교실 안에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가 가득 찬 것처럼 느글거려서 조퇴까지 했을 리가 없잖아? 원래는 서울역에서 유리창 너머로 오가는 기차를 바라보며 하루 종일 눈에 바람이나 실컷 쐴 작정이었다. 가슴이 답답할 때면 늘 그러듯이.
  물론 가끔은 귀찮은 일이 생기기도 한다. 평일 오후는, 정상적인 학생이라면 학교에 있어야 한다고 어른들이 멋대로 머릿속에 정한 시간이라서, 교복을 입고 중학생인 티가 나게 대합실을 어슬렁거리다간 재미없다. 그건 날 잡아 잡수시라며 대놓고 광고하는 짓이지. 문제아로 의심하는 눈길이 쏠릴 뿐 아니라,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아저씨라도 만나면 기분이 더럽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거나 교장 선생의 말씀처럼 하품이 나게 늘어지는 개똥철학까지 들어야 하잖아? 윽, 생각만 해도 머릿속에 밤송이가 굴러다니는 것처럼 골치가 딱딱 아프다. 나처럼 별 볼 일 없는 중학생이나 머릿수 많은 고등학생들이 다가와서 귀찮게 굴거나 시비를 건 숫자도 내 겨드랑에 난 털만큼이나 많다. 이런 여러 가지 성가신 일을 교복만 벗어 던지면 대부분 피할 수가 있으니, 세상은 무지하게 복잡한 것 같으면서도 뒤집어엎으면 얼마나 간단한지 가끔은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우습다. 날아가는 철새처럼 훌쩍 떠나고 싶어지는 오늘 같은 날을 위해, 나는 1년 전부터 항상 사복을 가지고 다닌다.
  담임에게는 할머니 때문에 집에 가 봐야 한다고 대충 둘러댔다. 담임은 담배 냄새가 찌든 투박한 손으로 말없이 자꾸 내 어깨만 아프도록 두드렸다. 가족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면서. 누가 아니래요?

  “카카오, 톡.”
  오바마가 연설의 달인답게 울림 있는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이 소리를 들을 때마다 무지하게 궁금하다. 카카오톡 알림음을 피처링한 대통령은 세계를 통틀어 당신뿐인데, 소감이 어떠신지? 아니, 그보다도 미국 대통령이면 세계 평화를 지키느라 등골이 빠지게 바빴을 텐데, 언제 피처링까지 하신 건지? 침을 튀기며 물어봤자, 오바마가 나 같은 한낱 중딩의 질문에 답해줄 리 없으니, 닥치고 폰이나 열어야지.
  “할머니는 찾았음?”
  민우다. 의리 있는 자식! 10년째 기러기 아빠 신세인 우리 담임과 의리파 민우가 지금 온 동네를 헤매고 다니는 줄 아는 우리 할머니는, 여느 때처럼 손때 묻은 목욕탕 의자에 얌전히 앉아 밥상만 한 맨드라미 화단을 들여다보는 중이시다. 우리집 마당에서, 이 세상 누구보다 안전하게.

  답은 나중에, 가방부터 처리하자. 원래는 가방에 든 물건들을 까만 봉지 안에 모조리 털어 넣고 옛날 성곽을 멋지게 둘러친 낙산공원 꼭대기로 올라가 쓰레기통에 던져 버릴 계획이었다. 밖에서 안 보이게 봉지를 잘 숨기고 환경미화원 아저씨들이 평소처럼 발 빠르게 움직여만 주신다면, 오늘 밤 저 멀리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실려가 쓰레기 더미 사이에 영원히 묻히겠지. 그러면 아싸, 완전범죄 성공!
  지하철에서 처음 떠올렸을 때는, 내가 내 엉덩이를 두드려 주고 싶을 만큼 끝내주는 계획이라고 자신했다. 그런데 가방을 끌고 오면서 찬찬히 생각해 보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요즘 쓸데없이 날씨만 좋아서 공원에 오는 사람이 무지하게 늘었다는 점이다. 사람이 많으면? 쓰레기가 쏟아지지! 아이스크림 봉지, 과자 껍데기, 찌그러진 캔이 넘치는 쓰레기통은 하루도 못 가 먹은 걸 위로 토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공원에는 눈에 띄는 건 뭐든 일단 만지고 보는 꼬맹이들부터, 먹다 버린 음식물을 찾아다니는 노숙자까지 온갖 사람이 오간다. 위험한 호기심에 누군가 봉지를 열어 보기라도 한다면? 윽, 그야말로 두통과 치통을 모은 것보다 더 골치가 아파진다. 요즘은 이웃끼리도 미친놈이 아닌지 서로 의심하고 살아가는 판에, 낮이든 밤이든 커다란 검정 봉지를 손에 들고 공원을 돌아다니는 건, 소년원으로 가는 특급열차를 타는 짓일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죄 없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공원을 오르던 내게 기막힌 생각이 딱따구리처럼 불쑥 날아들었다. 낙산공원으로 가는 계단이 에베레스트 산만큼이나 가파르고 가방은 내던지고 싶을 정도로 무거워서 헉헉대다가 떠올린 타협안이긴 하지만. 이렇게 하면 절대로 안 잡힐 거야!
 

 
  “도망가유, 도망가!”
  마당에 앉은 할머니가 담을 넘어오는 도둑이라도 본 것처럼 소리친다. 하루에 몇 번씩 듣는 소리인데도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처럼 느닷없기는 늘 마찬가지다. 할머니가 가만히 앉았는지 창 너머로 살핀 뒤, 마지막 반항 수단으로 입을 꽉 다물고 있는 가방을 연다. 꼴까닥,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간다. 린 말고는 알지 못하는 여자의 세계가 펼쳐진다. 다른 놈들은 꼴에 남자랍시고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폰으로 야한 사진을 찾아서 돌려 보고 단체로 자위를 해댔다. 어쩌다가 민우처럼 잘나가는 놈은 여자친구랑 진짜 경험을 쌓으며 이름을 날렸지만, 나는 지금까지 온전히 나를 지켜 왔다. 거창한 이유 따윈 없어. 혼자 딸딸이나 치면서 흥분하는 건 바보짓 같고, 하고 싶은 여자를 아직 못 만났는데 아무나 잡고 그러자니 실수로 임신이라도 시키면 똥 밟는 거잖아! 후아, 1년 전부터는 먹고 살기에도 빠듯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사치였지.
  그래서 나도 모르게 여자에 대한 환상에 빠졌었나? 긴 생머리의 소녀답게 가지런히 개켜진 옷과 차곡차곡 정리된 가방 안을 상상했지만, 역시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뒤죽박죽된 가방 속은 고물상 주인이 보고 혀를 찰 정도로 엉망진창이다, 윽. 절대로 내 탓이 아니야. 나는 가방 손잡이를 잡은 순간부터 그 자세, 고대로 걸어왔어. 게다가 옷걸이째 던져져 쌓인 옷, 양말과 마구 뒤엉킨 속옷을 보면 이 여자애, 성격 한번 알 만하다. 겉보기에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타고난 여자 같았는데, 역시 사람은 외모만 보고는 알 수가 없다.

  후아, 나는 변태가 아니야. 그냥 조금, 아주 조금 궁금해서 그래. 혼자 중얼거리면서 봉긋한 실크 브래지어를 꺼내서 차츰 뜨거워지는 볼에 댄다. 온몸이 간지러울 만큼 보드랍다. 분홍이 이렇게 화끈한 색깔인지 오늘 처음 알았다. 동감이라며 아랫도리가 허리를 편다. 오랜만에 몸이 달아오르는 상태를 즐기면서, 브래지어를 이리저리 돌리며 마음껏 구경한다. 그 애의 가슴이 이 정도 크기였어? 잠깐! 브래지어의 아랫부분이 지나치게 빵빵하잖아? 풍선껌 1통 두께도 넘는다! 쳇, 알고 보니 가슴의 반은 속옷이잖아? 그동안 세상의 모든 여자들에게 단체로 사기라도 당한 것처럼 억울함이 밀려온다. 이번에도 인생이란 놈한테 뒤통수를 제대로 한 방 맞았다. 윽, 오늘부터 생각을 바꿔야겠다. 여자는, 그냥 봐서는 절대로, 평생이 가도 모른다. 속옷까지 몽땅 벗겨 봐야 안다!
  근데 겨울 코트까지 1벌 든 걸 보니, 어디에 오래 가 있으려고 했나? 윽, 딴생각 말고 하던 일에나 집중해, 집중! 문득 드는, 여자애에 대한 미안한 마음까지 깡그리 봉지에 쓸어 담고 발로 꾹꾹 누른다. 내게 남모를 흥분을 안겨 준 분홍 브래지어 하나쯤은 간직하고 싶지만, 증거를 남길 순 없으니 참아야지. 파랑 코트가 걸렸던, 옷가게에서나 볼 수 있는 커다란 옷걸이 1개는 너무 커서 봉지를 찢을지 몰라 일단 내 옷장에 넣는다. 옷걸이만 보고 누가 뭘 알겠어? 윽, 그나저나 가방의 절반은 빌어먹을 화장품이다. 쓸모를 알 수 없는 작은 유리병이 얼마나 많은지! 그나마 그 덕에, 무겁긴 해도 생각보다 부피는 작아 다행이다. 역시 옷걸이를 빼길 잘했어. 빠뜨린 게 없나 날카로운 매의 눈으로 방 안을 샅샅이 훑은 뒤, 나는 마당으로 나간다.

  할머니는 입을 반쯤 헤 벌린 채 멍하니 화단만 바라보고 있다. 연못가의 개구리처럼, 정신 빠진 파리라도 날아들길 기다리는 건지, 후아. 욕조만 한 그곳에는 여름 내내 폭우가 이어진 탓에 뒤늦게 제철을 만난 촛불 맨드라미가 작달막한 자태를 요리조리 뽐내고 있다. 나는 화단 구석에 아무렇게나 처박힌 꽃삽을 찾아 들고 할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는다.
  “할머니, 점심은 먹었어?”
  “…….”
  “우리가 없어도 꼭꼭 챙겨 먹어야지. 가느다란 발목을 좀 봐.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앉아서 눈이 빠지게 맨드라미만 들여다보니까 그렇잖아!”
  “…….”
  “후아.”
  “…….”
  “할머니, 지금부터 내가 화단에 흙을 팔 건데, 절대로 맨드라미를 뽑는 거 아니야. 내 말 믿지?”
  “…….”
  “이 봉지 보이지? 이거 비료야. 이걸 아래에 심으면 꽃이 더 건강해져. 그러니까 걱정 마. 알았지?”
  “…….”
  기대도 안 했지만, 역시나 답이 없다. 묵언 수행에 관한 세계선수권대회가 열리면 우리 할머니가 무조건 1등을 먹을 거다. 내기해도 좋다! 가끔씩 외치는 이상한 헛소리를 반칙으로 안 보면 말이지. 할머니가 내 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쳇, 시험해 보는 수밖에. 나는 맨드라미 뿌리가 안 다치도록 조심하면서 땅 속 깊숙이 꽃삽을 찌른다. 여전히, 할머니는 외딴 호수처럼 고요하다. 그대로 잠시 기다려도 멍하니 맨드라미만 본다. 물론 내 말을 알아들어서인지 정신을 아예 놓아서인지는 할머니만 알겠지만.
  맨드라미를 한 포기씩 조심조심 들어내면서 최선을 다해 두더지처럼 똑똑하게 구멍을 판다. 맨드라미가 아무리 자라도 잔뿌리조차 안 닿도록 깊게, 비밀의 무덤을 만드는 거야.
  “죽을 때까지 굿바이!”
  봉지 속 그 애에게 폼 나게 작별 인사까지 건넨 뒤, 구멍에 봉지를 던지고 퍼냈던 흙을 뿌린 뒤 평평하게 땅을 고르면서 맨드라미를 다시 심는다. 윽, 갑자기 할머니가 뭐라고 웅얼거린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우윳빛 맨드라미가 구석으로 가서 불만이야? 녀석을 할머니가 앉은 자리에서 잘 보이는 곳으로 옮기니, 그제야 홀쭉한 볼로 샐쭉거린다. 이번에도 마음에 들어서 웃는 건지 그냥 표정이 일그러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싸, 드디어 끝났다! 이제 울긋불긋한 맨드라미가 내 모든 비밀을 아름답게 가려 주기를, 물이나 한 그릇 떠 놓고 고이 빌면 된다.
  “할머니, 할머닌 오늘 아무것도 못 봤어! 나랑 약속한 거야?”
  “…….”
 



 

 

 

 

* 촛불 맨드라미 화단의 삽화를 그려 주신 이혜승 작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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