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뉴스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지나가던 시민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화면을 응시했다. 일부는 당연한 결과라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2016년 12월 9일, 서울 지하철 3호선 신사역 구내에는 기쁨보다 씁쓸함이 가득했다.

박 대통령은 제18대 대선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해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보다 3.6%포인트 앞선 51.6%의 지지를 얻었다. 당시 전국투표율은 75.8%로 제17대 대선(63%)에 비해 10%포인트 이상 높았다.

▲2016년 12월 9일 오후 4시, 서울지하철 3호선 신사역.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됐다는 소식이 TV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서울 강남구와 송파구는 전통적으로 ‘여당의 텃밭’이었다. 제17대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두 곳에서 각각 18만 표 이상을 얻고 당선됐다. 박근혜 후보는 제18대 대선 당시, 강남구와 송파구에서 각각 20만 표 이상을 받았다. 보수정당의 변함없는 지지층이었던 지역의 유권자들은 박 대통령이 탄핵 심판대에 오른 지금, 어떤 심경일까.

박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이후 강남구와 송파구의 주민센터와 구립 도서관을 찾아다니며 주민 20여 명의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이들은 대부분 18대 대선에서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고 밝혔다.

2016년 12월 16일 오후 3시경. 송파구의 주민센터에서 만난 60대 남성은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읽던 중이었다. 은퇴 후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제2의 삶을 준비한다고 했다. 현 시국에 대한 생각을 묻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가 회고한 2012년 대선 당시의 박근혜 후보는 국가, 민족, 국민만 생각하며 사리사욕을 챙기지 않는 정치인이었다. 당내 후보경선에서 패하자 깨끗이 승복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깨끗한 정치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대만큼 실망이 컸다.

그는 매주 이어지는 촛불 집회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정치적인 선동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특히 헌법재판소 앞 시위가 사법부를 협박하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국민 정서를 반영하는 차원에서 시위는 할 수 있지만 결과는 법 절차와 헌재의 결정에 따라야죠. 법치주의 원칙에는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로스쿨 학생인 고호영 씨(41‧송파구)는 비슷한 시간에 송파도서관에서 '헌법 핵심 정리 300'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의 창조경제 공약에 기대를 걸었다. 특히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성장을 내세운 공약을 지지했다. 낙수효과를 통한 대기업 위주의 산업 구조는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이 보호무역주의를 취하고 유럽이 난민 수용을 줄이는 등 최근 세계 경제가 자국민 경제 우선주의로 전환된다고 진단했다. 또 이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국정이 정상화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송파구 주민인 김창수 씨(57)는 글쓰기가 취미다. 그는 박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를 볼 때마다 답답한 마음을 담은 글을 썼다. 사임하지 않고 헌법재판소 결정을 기다리는 박 대통령의 모습을 ‘헤어 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박 대통령을 탄핵 정국을 유발한 ‘공범’이자 ‘피의자’라고까지 불렀다.

청년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최정훈 씨(29‧강남구)는 도서관에서 ‘트럼프 시대의 한미관계’라는 책을 빌렸다.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지 한 달이 되어가던 시점이었다. 그는 탄핵 정국으로 나라가 마비상태인데 사회뿐 아니라 외교적인 측면에서도 하루빨리 트럼프 시대를 알고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의 탄핵안 가결은 당연한 결과라고 했다. 소통도 없고 성과도 없고 공약을 지키려는 책임감도 없는 정권이었다는 얘기다. 그는 박근혜 후보의 청렴성을 기대했다. 역대 정권과 달리 친인척 비리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바와는 너무도 달랐다. ‘세월호 참사’부터 ‘최순실 게이트’까지 의구심과 충격의 연속이었다.

부모의 영향을 받아 새누리당을 지지했던 박재일 씨(22‧강남구)는 2016년 총선 때부터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거나 세월호 사고를 깔끔하게 매듭짓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였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과)는 “보수의 핵심 가치는 헌정질서 수호인데 일련의 국정농단 사태를 겪으면서 보수층이 세대를 막론하고 실망감을 드러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강남구와 송파구 주민들의 한마디

박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지 2주 뒤인 2016년 12월 24일. 중장년층 노인들이 시청 앞 서울광장에 모여 탄핵반대를 외쳤다. 경찰이 집계한 집회참가 인원은 1만5000명(주최측 추산 10만 명)이었다. 이들은 민요를 부르면서 어깨춤을 췄다. 또 태극기를 흔들면서 ‘탄핵 비박, 탄핵 반대, 원천 무효’ 같은 구호를 외쳤다.

시청역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광화문광장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9차 촛불집회인 이날, 영하 4도를 기록하는 추운 날씨에도 경찰 추산 3만6000명(주최측 추산 60만 명)의 시민이 모였다. 이들은 크리스마스를 기념해 빨간색 옷을 차려 입고 대통령 탄핵을 소리 높여 외쳤다.

이명은 씨(54)는 딸과 함께 촛불집회에 네 번 참가했다. 그는 “크리스마스 전 날이고 날씨도 춥지만 참가자가 적을지 몰라 나왔다”고 했다. 황윤주 씨(40)는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이후 처음 촛불집회를 찾았다.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고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앞두고 있는 지금 이 시기가 더 중요하지요.”

가족과 함께 촛불집회에 다섯 번 참가했다는 50대 시민은 국가 시스템이 붕괴돼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모두 후퇴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공직자들이 후손들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보다 사리사욕만을 취한 것을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사태가 심각해 보수마저 친박과 비박으로 쪼개졌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도 “차기 정권은 단지 권력의 교체에서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진실을 밝혀 국가 시스템을 정상화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60대 이모씨는 최빈국에서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한국의 역사를 되짚으며 한국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복 받은 나라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분열된 정치와 기득권 다툼 때문에 많은 시민들이 우리나라의 좋은 점을 실감하지 못한다며 씁쓸해 했다. 앞으로 ‘보수가 해야 할 역할’을 묻자 힘주어 대답했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기성세대들이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투표해야 해요. 그게 분열된 정치를 바로 잡는 첫 걸음이죠.”

서울신문이 전국의 남녀 1009명을 대상으로 지난 연말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차기 대통령이 갖춰야 할 덕목 1위로 ‘소통 및 사회통합 능력’(34.3%)이 꼽혔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와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을 비롯한 차기 대선 주자들도 ‘통합의 리더십’을 차기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이는 ‘여당의 텃밭’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인터뷰에 응했던 강남구와 송파구의 주민들은 통합의 리더십을 원했다. 경제성장을 모색하면서도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갈등과 분열로 국민이 느꼈던 피로감이 컸다. 이념, 지역, 정당 간의 분열된 이데올로기를 뛰어 넘어 공동의 목표를 이끌어내는 지도자를 원하는 국민의 마음이 반영돼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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