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김지연(27·가명)씨는 이성친구와 서울시내의 대형마트 한 곳을 찾았다. 식품관부터 전자제품관까지 함께 돌며 잡담을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갔다. 출출해질 때쯤 시식 코너에서 무료 음료수로 배를 채웠다. 시식용 떡볶이와 소시지, 빵 같은 간식도 맛봤다. ‘마트 데이트’는 김 씨가 6개월 전 직장을 관둔 뒤 이성친구와 매주 즐기는 데이트 코스다. 데이트 비용이 ‘0원’ 이다. 

취업준비생 박소혜(25·가명)씨는 주말마다 이성친구와 ‘4400원 데이트’를 한다. 한 사람당 2200원만 내면 동네 청소년 수련관에서 서너 시간 동안 실컷 물놀이를 할 수 있다. 박 씨는 “취업준비 하느라 돈도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어 워터파크는 부담스럽다”며 “청소년 수련관에선 싼 값에 데이트 하면서 운동까지 할 수 있어 비용 대비 만족감이 크다”고 말했다.

역대 최고 실업률에 장기 불황까지 계속되는 가운데 청년들의 연애 문화도 달라지고 있다. 한창 연애를 즐길 2030 세대에게 데이트 비용은 큰 부담이다. 조사업체 엠브레인이 지난해 전국 남녀 1000명에게 물어본 결과, 73.8%가 ‘데이트 비용은 스트레스의 원인’이라고 답했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은 외식하고 영화관에 가는 데이트에서 벗어나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좋은 데이트를 찾아 나섰다.  

식사 메뉴부터 놀이 문화까지, 달라진 ‘데이트 백태’

청년들은 데이트 밥값부터 가성비를 따졌다. 취업준비생 정수미(25·가명)씨가 이성친구와 즐겨 찾는 데이트 코스는 레스토랑이 아닌 편의점이다. 도시락, 컵라면, 떡볶이 같은 즉석조리식품이 단골 메뉴다. 편의점이 지겨울 땐 ‘밥버거(다양한 재료를 넣은 주먹밥)’ 가게에 간다. 어디서 먹든 밥값은 둘이 합쳐 최대 7000원이다. 모아 둔 아르바이트비로 생활하고 있는 정 씨는 “애인도 나도 고정 수입이 없어 데이트 밥값을 최대한 아낀다”고 말했다.

대학원생 이연우(27·가명)씨는 아예 외식 데이트를 포기했다. 대신 이성친구와 자취방에서 요리를 해먹는다. 몇 주 전엔 인터넷에서 ‘공동구매(여럿이 모여 할인된 가격으로 물건을 사는 일)’한 인스턴트 떡볶이를 요리해 먹었다. 이날 든 데이트 비용은 단돈 2500원이다.

돈도 시간도 적게 드는 ‘요금제 놀이 공간’도 인기 데이트 코스다. 일주일에 서너 번 데이트 하는 김동규(27)씨는 매번 ‘인형뽑기방(인형뽑기 기계만 들여 놓은 놀이 공간)’에 간다. 인형 두 번 뽑는 데 천 원, 실컷 놀아도 1시간이 채 안 걸린다. 김 씨는 “적은 돈으로 짧은 시간 동안 애인과 놀 수 있는데다 인형까지 생기니 일석삼조”라고 말했다. 인기에 힘입어 실제 인형뽑기방 점포도 늘었다. 게임물관리위원회에 따르면 2015년 전국 21곳에 불과했던 인형뽑기방은 2017년 1월 현재 500곳 이상으로 늘었다. 포털 사이트에 ‘인형뽑기 데이트’를 검색하면 인형뽑기 데이트를 즐기는 누리꾼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서울 서대문구 인형뽑기방에 있는 인형뽑기 기계. 천 원을 투입하면 인형을 두 번 뽑을 수 있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Naver)에 ‘인형뽑기 데이트’를 검색한 결과. 연인과 인형뽑기 데이트를 즐기는 누리꾼이 많다.

인형뽑기방뿐만이 아니다. 동전을 넣고 원하는 만큼 노래할 수 있는 ‘코인노래방’, 시간당 요금을 내고 만화책을 볼 수 있는 ‘만화카페’, 보드게임 도구와 포토존을 마련해 놓은 ‘놀이카페’도 20대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들 놀이 공간의 공통점은 원하는 시간 동안만 일정 요금을 내고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총비용도 한 시간에 최소 5000원에서 최대 1만 5000원을 넘지 않아 저렴하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이성친구와 코인노래방에 가는 김진후(27)씨는 “일반 노래방은 가격도 비싸고 시간도 지나치게 길다”며 “원하는 시간만큼만 즐길 수 있는 코인노래방 데이트가 더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첫 만남부터 돈 쓰기 아까워” 소개팅에서 ‘가성비’ 따지기도

첫 데이트인 소개팅에서부터 ‘비용 대비 성능’을 따지는 사람도 늘었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보단 ‘차 한 잔’만 마시며 한두 시간 짧게 대화하는 소개팅이 늘고 있다. 데이트 어플리케이션 ‘데이트팝’ 직원 차예리씨는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며 네다섯 시간 정도 보내는 게 정통 소개팅 코스”라며 “최근 가성비를 중시하는 데이트 문화가 퍼지면서 소개팅도 점점 간소화하는 추세가 보인다”고 말했다.

대학원생 정미리(29·가명)씨는 6개월 전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생전 처음 ‘차 한 잔’ 소개팅을 했다. 당시 정 씨는 ‘커피만 마시자’는 소개팅 상대의 제안을 듣고 황당했다. 상대가 자신을 마음에 안 들어 하나 싶어 불쾌하기도 했다. 이런 소개팅을 두세 번 더 하고 나니 정 씨의 생각도 달라졌다. “절차나 체면보다 가성비를 중시하는 소개팅이 더 합리적인 것 같아요.” 이후 정 씨는 다른 소개팅에 나가 식사 말고 차 한 잔 하자고 먼저 제안했다.

실제 소개팅 장소에 대한 빅데이터 분석에서도 ‘차 한 잔’ 소개팅 선호도가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2008년부터 2015년까지 소개팅 5만 건 이상을 분석한 결과, 소개팅 장소 1위는 ‘강남에 있는 카페’였다. 상위 20개 장소를 분석해 봐도 커피전문점이 절반 이상이었다.

특히 여성보다 남성이 ‘차 한 잔’ 소개팅을 선호했다. 일반적으로 첫 데이트에선 남성이 데이트 비용을 더 부담하는 문화 때문이다. 대학원생 김지훈(29·가명)씨는 “예의를 차리기 위해 처음 본 상대에게 3~4만 원 넘는 밥값을 쓰긴 아깝다”며 “차만 마시는 소개팅이 돈도 시간도 덜 들어 좋다”고 말했다. 직장인 신인태(26)씨도 “차 한 잔만 마시는 소개팅은 남자 입장에서 ‘땡큐’다”라고 말했다.

돈도 시간도 없는 ‘N포 세대’, “금수저 아닌 이상 가성비 연애는 당연하죠”

청년들이 가성비를 중시하며 연애하는 가장 큰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돈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청년실업률은 9.8%로 2000년 이후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일자리가 없는 취업준비생 청년에게 평균 3만 원이 넘는 데이트 비용은 사치다. 취직 후에도 데이트 비용이 부족한 청년들도 많다. 국회의장 정책수석실은 지난해 최저임금 6030원 이하를 받았던 만 15~29세 청년근로자가 63만 명이었다고 밝혔다. 3년 만에 60% 증가한 숫자다

그런데도 ‘데이트 물가’는 치솟고 있다. 통계청이 올 1월 발표한 소비자물가지수에 의하면 지난해 외식 물가 상승률은 2.5%였다. 같은 기간 전체 물가 상승률이 1%인 것에 비하면 높은 수치다. 특히 젊은 층이 즐겨 찾는 삼겹살, 생선회, 스테이크, 자장면의 평균 가격은 전년보다 3~4% 올랐다. 보편적인 데이트 코스인 영화관도 값을 올리는 추세다. 2014년 CGV가 평균 영화표 가격을 전년 대비 6% 올린 데 이어 지난해 메가박스도 주말 황금시간대 영화표 가격을 1만원에서 1만1000원으로 인상했다.

▲지난해(2016년) 데이트 물가 상승률

여유 있는 데이트를 할 시간조차 없는 청년도 적지 않다. 직장인 박건우(26)씨는 “돈도 돈이지만 몸이 피곤해 데이트를 오래 못 한다”고 말했다. 취업한 지 6개월 된 박 씨는 잦은 야근으로 피로감이 쌓여 2시간 이상 데이트하는 일이 아예 불가능하다. 최근 OECD가 발표한 ‘2016 고용동향’에 따르면 한국 근로자의 1인 평균 노동시간은 2113시간으로 OECD 2위다. 긴 노동시간은 육체적 피로뿐 아니라 정신적 스트레스로 이어졌다. 박 씨는 “호화로운 데이트를 하고 싶다가도 다음 날 출근이 부담돼 꺼려진다”고 말했다.

체면보다 효율을 중시하는 2030 세대의 실용주의도 ‘가성비 연애’에 한몫했다. 20대 전문 연구기관 대학내일 20대연구소 송혜윤 연구원은 “청년들은 타인을 의식하는 소비가 아니라 스스로의 만족을 위한 소비를 지향한다”며 “가격, 시간, 성능이 만족의 기준”이라고 분석했다. 또 “연애나 결혼 같은 관계에서도 자신의 소비 기준을 최우선으로 두는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매번 가격과 효율을 따지는 연애가 고되진 않을까. 청년들은 어쩔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정수미(25·가명)씨는 “연애할 때조차 계산기를 두드려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면서도 “형편에 맞는 데이트를 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연우(27·가명)씨도 “‘금수저’가 아닌 이상 가성비를 따지는 연애는 당연하다”고 말했다. “이렇게까지 아껴야 하나 싶을 때도 있어요. 결혼 같은 먼 미래를 생각하면 답답하기도 해요. 그래도 만족하려고요. 지금 우린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길어지는 불황 속 ‘N포 세대’ 청춘들이 사랑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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