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상승·불경기 이중고로 서민들의 더 힘겨워진 겨울나기

“조금 만 더 깎아주시면 안되나요? 돈이 부족한데….” 서울의 한 난방기구 판매점에서 소형 중고 난로를 한참 살펴보던 이 모(35) 씨가 판매상에게 애원조로 말했다. 겸연쩍은 듯 쭈뼛거리던 이 씨는 “만 5천 원은 안되겠죠?”라며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내보였다. 그러나 판매상은 “원래 2만 5천 원에 파는 거라 그렇게는 어렵다”며 손사래를 쳤다.

몇 달 전 이 씨는 45만 원의 월세가 부담스러워 4평 남짓한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시간제로 일하던 음식점이 갑자기 문을 닫으면서 월수입이 100만 원 밑으로 뚝 떨어진 탓이다. “새 일자리는 없고, 장바구니 물가는 점점 올라 힘들더라고요.” 이 씨가 주로 구매하는 음료, 계란, 라면 등의 소비 가격은 계속 오르고 있다. 마지못해 월세 지출을 줄였지만 문제는 난방이었다. 단열이 안 돼 바깥의 냉기가 집안으로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고육지책으로 창문에 비닐을 덧씌웠지만 헛수고였다. 그렇다고 보일러를 틀수도 없었다. 매월 3만 원 이상씩 나가는 보일러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추위를 이겨보고자 이른바 깔깔이 점퍼를 입은 채 담요와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하기도 했다.

▲이 씨가 깔깔이를 입은 채 고지서를 보고 있다. 그의 창문에는 덧댄 비닐이 펄럭인다.

그렇게 한 달. 견디다 못해 얼마 전 찾은 곳이 난방기구 매장이었다. 그러나 예상보다 비싼 가격에 이 씨는 빈 손으로 매장을 나왔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정말 춥긴 하지만 옷 여러 겹 두껍게 입고 견뎌 봐야죠.” 간혹 5~6천 원 하는 한 끼 식사 값도 없어 편의점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그에게 난로 값 2~3만 원은 사치였다. 서울이 영하권을 기록하는 날이면 이 씨 집의 온도는 10도 밑으로 내려간다. 보통 가정집의 절반 수준도 안 된다. 이 씨는 몇 만 원을 아끼기 위해 난방 대신 추위를 택했다.

불황에 난방마저 포기

김 모 씨(37)는 최근 한 온라인 중고거래 카페에 난방 기구를 구매한다는 글을 올렸다. 만 원이라도 아끼기 위해서였다. 몇몇 판매자들이 김 씨에게 거래를 청했다. 매출 부진으로 폐업한 가게, 회사 등에서 쓰던 소형 난로를 팔려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실거래로 이어질 뻔했지만 김 씨는 끝내 구매를 포기했다. 5천 원이 넘는 배송비가 붙고 나니 온라인 중고도 그다지 저렴하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는 “춥긴 하지만 불필요한 돈을 지불하고 난방 기구를 살 만큼 절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비단 이 씨와 김 씨뿐만이 아니다. 한 푼이라도 아껴가며 겨울을 나기 위해 발품을 파는 서민들이 많다. 그러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도 원하는 금액대가 아니거나 흥정에 실패하면 구매를 포기할 수 밖에 없다. 서민들은 그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을 나고 있다.

▲중고 난방기구 매장 앞에 주인을 찾지 못한 난로가 진열돼있다.

소형 난방 기구를 판매하는 변영순(65) 씨는 “중고 난방 기구를 사가는 주 고객층인 저소득층이나 독거노인 등은 2~3만 원 짜리 난방 기구 하나를 두고 한참을 고민한다”고 말했다. 소형 난방 기구는 새 제품이 보통 5~6만 원 대, 중고 제품은 2~3만 원 대로 다른 가전제품에 비해 저렴한 편이다. 그런데도 구매를 망설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다른 판매상 한운용(67) 씨 역시 “예전에는 전기료를 아끼려는 사람들이 간혹 석유난로를 찾기도 했는데 올 겨울엔 경기가 어려워 기름 값마저 아끼려고 난방 기구 자체를 사지 않는다”고 전했다.

겨울 의류, 깎거나 안 사거나

서민층에겐 의식주의 하나인 의류마저 절약의 대상이다. 조 모(25) 씨는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기모 의류를 사기 위해 서울 명동을 찾았다. 저렴한 의류 매장이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조금이라도 싼 가격에 옷을 사기 위해 십 수개의 매장을 돌아다니며 세 시간이나 투자했다. 그러나 조 씨는 끝내 옷을 사지 못했다. 금액 때문이었다. 대다수의 매장에서 조 씨가 찾던 제품을 3~4만 원 대에 판매하고 있었다. 겨우내 입을 옷이었지만 3~4만 원의 옷도 조 씨에겐 부담스러웠다.

조 씨의 한 달 벌이는 60만 원 가량이다. 소득은 제자리걸음인 반면 물가는 오름세라 생활은 더욱 팍팍해졌다. 월세에 교통비, 통신비 등 고정적인 지출을 빼고 나면 먹고 살기에도 빠듯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3~4만 원대의 기모 의류를 사는 것은 상당한 지출에 해당했다. 그는 “금전적 여유가 없다보니 춥고 힘들어도 돈을 아끼는 게 더 중요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조 씨가 끝내 옷 한 벌 조차 사지 못한 이유다.

▲한 여성이 구제 매장 앞에 진열된 중고 신발을 보고 있다.

새 제품 대신 저렴한 중고를 찾는 사람도 있다. 두 자녀를 키우는 박 모(33) 씨는 세 살짜리 딸을 위해 중고 겨울 신발을 구매했다. 주된 이유는 역시 금액. 어린 아이들은 성장 속도가 빨라 신발을 자주 사는 데에 비해 신발의 가격은 성인 신발 못지않다. 그는 “신발은 매번 사 줘야 하는데, 금전적 부담이 돼서 중고를 샀다”며 “새 제품이 아니어서 아이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박 씨는 신발을 한 철만 신기고 다시 중고 시장에 내놓을 계획이다. 만 원이라도 돌려받기 위해서다.

그러나 중고 역시 저렴하지 않으면 외면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 중구 숭인동에서 구제 매장을 운영하는 윤현숙(58) 씨는 “올 겨울엔 천 원, 2천 원짜리 옷들도 깎아달라는 사람이 유난히 많다”며 “매출이 1년 전보다 30%가량 줄었다”고 말했다. 윤 씨의 가게엔 잠깐 사이에도 젊은층부터 중장년층까지 여러 손님들이 다녀갔다. 그러나 경제 침체를 입증하듯 선뜻 구매하는 손님은 없었다. 윤 씨는 “만 원짜리 의류는 쉽게 구매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고 푸념했다. 

서민들에게는 ‘아끼고 안 쓴다’가 어느덧 일상이 됐다. 경기 침체의 절정을 기록한 올겨울은 특히 더 그러하다. 지난달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소득 하위 10% 계층의 가처분 소득은 지난해 대비 16% 감소했다. 여기에다 식료품·비주류 음료 물가 상승률은 3개월 연속 OECD 국가 중 3위권을 기록 중이다. 물가가 이렇다보니 서민층은 그 어느 때보다 의식주 생활에 필요한 비용을 줄일 수밖에 없다. 그만큼 서민들의 가계 형편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장기적인 불황으로 서민 경제에는 유독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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