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평균 노인 2540명이 드나드는 곳. 서울지하철 3호선 안국역 5번 출구 앞의 서울노인복지센터다. 3층짜리 본관과 본관 양 옆의 분관, 별관에는 노인들의 문화 및 여가 활동을 위한 미술관, 도서관, 영화관, 체력 단련실, 컴퓨터실, 방송국이 있다. 수십 개의 노인 동아리 활동과 문화 프로그램이 내뿜는 열기가 연일 가득하다. 이 열기가 순간에 그치지 않고 오래 남도록 힘쓰는 이들이 있다. 센터의 ‘시니어 기자단’이다.

▲서울노인복지센터에는 본관, 별관, 분관이 있다. (자료=서울노인복지센터 홈페이지)

센터는 2015년 4월부터 시니어 기자단을 운영하고 있다. 연초에 면접을 거쳐 10여명을 뽑는다. 센터의 크고 작은 행사를 기록하기 위해서다. 온라인 홈페이지(www.seoulnoin.or.kr)의 ‘탑골이야기’ 게시판에는 이들이 쓴 기사가 차곡차곡 쌓이는 중이다. 이서동 씨(71)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활동 중이다. 그의 목에는 묵직한 카메라가 걸려 있었다.

시니어 기자 면접 때의 느낌을 묻자 이 씨는 “떨리지 않았어요. 기사는 육하원칙에 따라 쓰면 된다고 당당히 말했죠”라며 웃으며 답했다. 2대 1 정도의 경쟁을 뚫고 시니어 기자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학구열이 자리한 듯했다. “아버지는 중학교 공부까지만 시켜주셨어요. 30살 무렵, 뒤늦게 고등학교에 갔죠. 이후 방송통신대 농학과에 입학했습니다. 학교를 다니며 한신대 정원사로 일했는데 당시 강사진에는 문익환, 함석헌 선생 등이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그들이 하는 강의도 자연스레 접할 수 있었습니다. 창문이 열려있으면 (강의 내용이) 들렸거든요.”

학구열을 품고 살았기 때문일까. 이 씨는 센터를 찾는 노인들에게서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워낙 마당발이라 방송통신대 시절에는 학생회장을 맡았다. 시니어기자로서의 자질을 스스로 곱씹어보던 그가 말한다. “미워하는 사람 없이 다 친하게 지냅니다. 이런 부분 때문에 시니어 기자를 시켜준 것 아닐까요.”

▲이서동 씨(71)가 가장 기억에 남는 취재로 꼽은 치매예방교실 ‘총명학교’ 행사 사진이다 (사진=서울노인복지센터 홈페이지

그는 매일 오전 6시 경기 부천의 집을 나선다. 센터에 도착하면 담당 사회복지사에게 그날 그날 무엇을 취재하면 좋을지 물어본다. 취재거리는 늘 풍부하다. 주로 센터에서 열리는 강의나 행사에 대한 기사를 다룬다. 주제와 부제가 뭔지 늘 고민하며 강의를 듣는다. “강의의 핵심 내용이나 인용할만한 좋은 말은 꼭 기록해둡니다. 또 그날 행사의 현수막 사진을 일단 찍어요. 다음엔 행사 사진을 자유롭게 찍고요. 행사 내용에 따라 몇 장 안 찍을 때도 있고 몇 십장 찍을 때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동영상으로도 한번 쭉 훑어주죠.” 이 씨는 자신이 터득한 취재 노하우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2년차 다운 모습이었다.

▲취재 메모를 보여주는 이서동 씨.

“지금 센터의 탑골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는 중인데 작가들이 그림을 기증하기로 했어요. 오늘 ‘작가와의 대화’ 행사와 기증식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찍은 사진들이에요.” 이 씨가 카메라를 내보이며 말했다. 그는 1974년부터 카메라를 잡기 시작했다. 등산하며 산의 풍경 찍는 일을 좋아하다 보니 촬영 실력이 붙었다. 이런 특기를 살려 사진 확대 또는 인화를 하거나 영정사진을 찍어주고 용돈을 번다. “내가 찍으면 사진이 다 예쁘게 나와요.” 흐뭇한 미소를 띠며 그가 덧붙인 말이다.

이 씨는 글씨가 빼곡하게 적힌 종이도 보여줬다. 취재하며 틈틈이 메모한 내용들이었다. 그는 기록을 좋아한다. 그때그때 들은 내용을 종이에 적고 집에 가서 노트에 옮겨 적는다. 날마다 일기도 쓴다. “난 해방되던 해에 태어난 해방둥이에요. 6.25, 4.19, 5.16을 직접 보고 겪었죠. ‘내가 살아온 역사가 대한민국의 역사’라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뭔가를 기록하는 일이 의미 있다고 여기는 이유예요.” 기록자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이 씨가 취재한 내용이 빼곡하게 적힌 종이들

이 씨는 기사 쓰는 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센터에서 마련했던 8회짜리 기사작성 교육을 받았을 뿐이다. 그런데 활동하는 데 무리가 없다고 한다. 이 씨는 “중학교 교과서에 나온 육하원칙을 아는 걸로 충분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시니어 기자로서 어려움을 느끼는 점은 따로 있었다. “센터에서 많은 사람을 상대하다보면 험한 인생 역정을 겪은 사람이 참 많다고 느껴요. 사기를 당한 사람, 우울증을 겪는 사람, 가족과 문제가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화를 발끈 내기도 해요. 일종의 이상 반응인거에요.” 이 씨는 그런 이상 반응을 그냥 넘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뒤에 가서 왜 그러시느냐 묻고 얘기를 들어본다. “얘기를 해보면 죽고 싶다고 해요. ‘일자무식’이라며 배우지 못했다는 열등감에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전 ‘왜 자기를 낮추시느냐, 그러지 마시라’고 위로해요. 얼마 전에는 가족을 용서하지 못해 괴로워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제 위로에 힘입어 가족과 화해했어요.” 이 씨가 사람들과 부대끼며 느끼는 어려움보다 보람이 훨씬 커 보였다.

그가 센터에 처음 발을 들인 때는 2011년 8월이다. 센터에 오게 된 계기를 ‘이상한 인연’이라고 표현했다. 동네 약수터에서 옆 사람들끼리 나누던 대화가 우연히 귀에 꽂혔다. 그들은 센터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알고 보니 내가 잘 아는 골목에 (센터가) 있더라고요. 내가 나온 고등학교가 있던 자리랑 가까워요.” 센터와의 만남을 운명처럼 소중히 생각하는 이 씨다. 센터 사회복지사 홍지헌 씨(28)는 “시니어 기자활동 뿐만 아니라 센터 자체에 애정이 넘치는 분”이라고 말했다. 시니어기자 10명 가운데 활약이 두드러진다는 말도 했다.

지금은 센터의 6년차 회원이자 센터를 출입처로 가진 2년차 시니어 기자다. 그만큼 센터를 속속들이 파악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노인에게 센터가 어떤 공간인지 물었다. 

“일단 노인에게 가장 큰 문제인 먹는 것이 해결되는 곳입니다. 밥값이 천 원이에요. 다른 데서는 천 원에 이렇게 영양가 있는 밥을 먹기 힘듭니다. 영세민에겐 돈을 받지 않아요. 또 동아리가 많아요. 왕년의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되는 거죠. 동아리를 꼭 안하더라도 ‘쉬어가는 공간’으로서 의미가 있어요. 위로의 공간이기도 해요. 몸이 아프고 힘들어도 센터에 나와 열심히 움직이려는 노인의 존재는 서로에게 자극이 돼요. 노인에게 이런 공간이 얼마나 필요한지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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