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4일 서경덕 교수 연구팀이 부산 기장군 일광 광산에 세운 표지판, 뒷면에는 후원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자료=서경덕 교수 페이스북)

지난 5월, 일본 도쿄 신주쿠에 위치한 이봉창 의사의 순국지가 쓰레기 더미에 방치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됐다. 비단 일본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이미 한반도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우리 역사의 흔적들은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잊히고 있다. 역사 안내판 설치는 이런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실질적으로 해결하려는 취지로 시작된 사업이다. 서경덕 교수 연구팀을 주축으로 시작한 이 사업은 해외에서는 ‘해외 독립운동 유적지 한글 간판 사업’, 국내에서는 ‘강제징용 안내판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한국의 역사 유적지를 소개하고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국내외를 넘나드는 역사 안내판 사업, 잊힌 유적지 홍보에 큰 도움

역사 안내판 사업은 크게 국내부문과 해외부문으로 나뉜다. 두 사업은 각각 안내판의 목적과 설치 과정에 차이가 있다. 국내부문의 경우 강제징용 관련 지역에 안내판을 설치해 역사의 흔적을 후손들에게 남기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강제징용과 관련된 시설이나 터가 남아있는 지역일수록 안내판이 설치될 지역으로 뽑힐 가능성이 크다. 후보 지역은 인터넷과 문헌 등을 통한 자료조사로 선정된다. 이후 해당 지역의 지자체와 마을 공동체를 통해 해당 지역 역사에 대한 검증을 하고 안내판 설치 가능 여부를 확인한다.

“역사적인 가치가 중요하지만 현재 거주하는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서경덕 교수 연구팀 최부용(37) 팀장은 말한다. 그만큼 지역 주민들과의 의견 교류는 역사 안내판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요소이다. 지난 3월 30일 서경덕 교수 연구팀은 인천 부평 ‘미쓰비시 줄사택(1938년 일본 군수공장에 강제 징용된 노동자들이 살던 합숙소)’ 역사 안내판 설치와 관련한 설명회를 열었다. 역사 안내판 사업의 가치와 필요성을 소개하며 지역 주민들의 동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반대 의견이 개진될 경우 연구팀은 지속적인 협의를 통해서 양측의 의견을 조율하기 위해 노력한다. 현재 인천 부평 ‘미쓰비시 줄사택’의 경우 주민들의 주거 공간이 자칫하면 ‘관광용 볼거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시돼 연구팀은 역사 보존과 주민 편리에 대한 합의점을 찾기 위한 소통을 계속해서 진행 중이다. 

주민들의 동의와 협조를 이끌어 내고 안내판 사업과 관련된 모든 법적인 문제가 해결됐을 때 본격적인 안내판 설치 작업이 시작된다. 지난 7월 부산 기장군 ‘일광 광산(스미토모 광업주식회사에서 자원 약탈을 목적으로 조선인들을 강제 징용한 광산)’ 에 설치한 안내판은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세워진 대표적인 예다. 부산 기장군 광산마을의 김해수(69) 이장은 “연구팀이 일광 광산에 안내판 설치를 하기 전에 마을의 어른들과 지속적으로 대화를 해나갔습니다”라며 역사 안내판 사업이 주민들과의 합의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밝혔다.

해외 부문의 역사 안내판 사업은 독립운동 유적지에서의 한글 간판 제작 위주로 진행한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안내판이 제작돼 있지 않아 실질적인 관람이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해외 독립운동 유적지의 경우 독립기념관에서 공식적으로 인증한 유적지인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후에 해당 국가나 정부와의 협의 및 현지 관리인과 연락을 통해 사업 취지를 설명하고 제작에 들어간다. 해외에서는 직접 관리하고 있는 사람들의 의견이 안내판 설치 사업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전에 연구팀은 문구나 디자인 등의 사안에 관해 관리자와 의견을 주고받은 후에 해당 지역의 안내판 설치를 마무리한다. 중국 항주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주 유적지 기념관’과 ‘윤봉길 기념관’에 각각 세운 한글 안내판이 대표적이다.

▲지난 3월 1일 서경덕 교수 연구팀이 상하이의 윤봉길 기념관에 설치한 한글 안내판. (자료=서경덕 교수 페이스북)

위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역사 안내판들은 생소한 역사 유적지를 알리고 그 유적지들에 관광객들로 하여금 비교적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최 팀장은 “지난 3월 홍커우 공원의 윤봉길 기념관에 안내판을 설치한 이후에 관광객들로부터 한글 간판 덕택에 입구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는 감사 메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라며 역사 안내판이 유적지를 찾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밝혔다. 이밖에도 각 지역의 독립 유적지 자체에 대해 알지 못했던 시민들이 한글간판 관련 기사를 보고 여행 시 그 독립 유적지를 여행코스에 넣어서 방문하는 등 역사 안내판을 활용한 유적지 홍보 효과 역시 실질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다. 최근 일광 광산을 방문한 이상래(39)씨는 “서경덕 교수 연구팀의 역사 안내판 기사를 보고 일광 광산을 방문하게 되었다”며 “아직까지 일광 광산이 강제 징용소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 안내판이 없었으면 아무도 찾지 않는 조용한 시골마을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크라우드 펀딩을 통한 시민들의 제작 참여, 유명인사 후원도 한 몫

역사 안내판 사업에 필요한 자금은 어떻게 마련될까. ‘크라우드 펀딩’은 최근 역사 안내판 사업의 모금 방법 중 하나다. 크라우드 펀딩은 ‘대중으로부터 자금을 모은다’는 의미로, 소셜미디어나 인터넷 등의 매체를 활용해 자금을 모으는 투자 방식을 말한다. 지난 7월에 설치된 부산의 ‘일광 광산’이나 현재 설치를 계획하고 있는 인천의 ‘미쓰비시 줄사택’의 경우 모두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안내판 설치 자금을 마련한 사례다. 역사 안내판 사업의 크라우드 펀딩은 ‘나도 펀딩(nadofunding.sbs.co.kr)’과 같은 소셜 펀딩 사이트에서 이뤄지며, 금액을 후원할 시 후원자의 이름이 안내판의 뒷면에 새겨진다. 특히 크라우드 펀딩을 통한 모금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지원을 통해 의미 있는 일을 함께 해 나간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부산 기장군 일광 광산 안내판의 뒷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후원해준 시민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자료=서경덕 교수 페이스북)

유명 연예인들의 금전적 지원 역시 역사 안내판 사업에 큰 도움이 된다. 해외 독립운동 유적 한글 간판 기증사업의 경우 배우 조재현씨의 재정적인 지원으로 진행되고 있다. 작년 4월 13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을 기념하여 설치한 중국 항주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주 유적지 기념관’과 올해 삼일절을 맞이하여 상하이의 ‘윤봉길 기념관’에 각각 세운 한글 안내판은 모두 그의 후원으로 이뤄진 결과다. “이밖에도 많은 프로젝트가 다양한 시민들과의 협업 또는 서경덕 교수의 자비로 진행되고 있다”고 최 팀장은 말했다.

잊혀 가는 역사를 보존하는 안내판, 오늘날 더욱 중요한 의미 내포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 안내판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연구팀은 전국의 강제징용이 일어났던 지역을 조사하고, 해당 지역의 지자체 및 주민들과의 연락을 계속해서 시도하고 있다. 아직까지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역사 유적지가 존재하는 만큼 역사 안내판 제작도 멈추지 않고 꾸준하게 실행할 예정이다. 

역사 안내판 사업은 우리에게 단순히 역사를 기억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시사한다. 강제징용 등의 아픈 역사를 지닌 지역에 역사 안내판을 설치하는 것은 주변국들의 역사 왜곡에 대응하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 아베 신조 총리의 '일본군 위안부' 부정 발언 등 한국을 둘러싼 동아시아 국가들의 역사왜곡은 점차 심화되고 있는 추세다. 따라서 자국의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여러 증거들의 보존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잊혀 가는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알리는 데에 큰 역할을 하는 역사 안내판 사업이 오늘날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니는 이유다.

저작권자 © 스토리오브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