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한 지 3년 8개월만이었다. 신상보호를 위해 익명을 요청한 27살 A씨는 대기업 식품 회사에 다니다 지난해 10월 퇴직했다. 40개에 달하는 입사원서를 쓰고, 2달이 넘는 인턴을 거쳐 들어간 회사였다. 하지만 A씨는 “퇴직 날의 회식이 가장 재밌고 행복했던 순간 이었다”고 고백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근무는 기본이었고, 바쁠 때는 12시까지도 일해야 했다. A씨는 “시급으로 계산해 보니 시급이 7천 원이더라”고 농담조로 말했다. 문제는 일선 실무에다가 일을 할 때마다 늘어만 가는 보고서였다. 한 방송사의 ‘세월호 참사’ 관련 특집을 보면서 A씨는 “보고 때문에 현장에서 일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세월호 현장 같았다”고 말했다. 늘어만 가는 일과 밀려드는 보고서 작성에 A씨는 침몰해갔다.

A씨처럼 지나치게 긴 노동시간으로 녹초가 된 청년들이 어렵게 구한 직장에서 퇴직하고 있다. 청년 실업률이 사상 최고를 갱신했지만 어렵게 일자리를 얻어도 청년들이 다시 실업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청년 직장인 사이에서 ‘갓 백수’라는 신조어가 나돌 정도로 퇴직이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갓 백수’란 영어의 신이란 표현 ‘갓(god)’과 백수를 합쳐 만든 용어로 ‘일반적이지 않은, 편한 백수’를 뜻하는 신조어다. 일부 언론에서는 구직활동을 하면서 부모에게 지원을 받아 생활하는 청년을 가리켜 ’갓 백수‘라고 일컫기도 했다. 하지만 녹초가 된 청년 직장인들에게는 ’갓 백수‘란 신세를 한탄하는 자조적 표현이기도 했다.

익명을 요청한 유통업체에 다니는 1년차 직장인 28세 B씨도 퇴직을 고민하고 있다. 연말에 퇴직하기로 마음을 이미 굳힌 상태다. B씨는 8시 전후 출근해서 하루 11시간은 족히 일하고, 일이 미숙해 퇴근이 늦어질 때도 많다. B씨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지 모르겠다며 가족과 같이 시간을 보낼 수조차 없다”고 말했다. B씨는 친구들끼리 모인 모바일 채팅방에서 ‘갓 백수’ 얘기를 하며 신세한탄을 한다고 말했다.
 
통계청이 2015년 5월 발표한 경제활동인구조사에서 만 15세에서 29세 청년 400만 명 중 60%가 취업 후 1년 3개월 안에 첫 일자리를 그만두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첫 직장을 그만두는 이유는 긴 노동시간이나 업무시간에 비해 너무 적은 보수 등의 근로여건에 관한 불만족이 47%로 가장 높았다.
 
LED 부품 회사 마케팅 부서에서 일하다 현재는 공기업 인턴으로 새 직장을 준비 중인 김경민(28) 씨도 하루 14시간에 달하는 살인적인 노동시간에 회사를 그만 뒀다. 회사는 야근은 물론 토요일에 출근해도 수당을 주지 않았다. 어차피 할 야근에 선배들은 아침 일찍 회사에 나와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보냈다. 김 씨는 “이럴거면 이른 아침부터 회사에 왜 나오라는 거지란 생각이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퇴사의 원인을 단순히 근무조건에서만 찾긴 힘들다. 한 대학병원에서 행정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익명을 요청한 27세 C씨는 “남들은 소위 ‘나인 투 식스’를 보장하는 직장에 월급도 높은 편이라 부러워 하지만 의욕을 잃으니 더 이상 회사에 남아있기 싫어졌다”고 말했다. 어렵게 들어온 직장이었지만 C씨가 하는 일은 단순 반복적인 행정업무였다. C씨는 또 윗사람 대접을 강요받고 대접을 잘해야 승진하는 조직문화가 싫었다고도 말했다. 경쟁을 뚫고 안정을 택해 찾아 온 직장이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실력이 아닌 윗사람에게 아부해야 살아남는 ‘라인타기 경쟁’이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C씨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재직자 235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신입사원들의 조기 퇴사 이유로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 직무’를 퇴사 이유로 꼽은 사람이 22.5%로 가장 많았다. ‘조직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이유가 19.2%로 뒤를 이었다. 엄동욱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대졸 신입사원의 조기 퇴사 실태와 원인’보고서에서 “직장생활에서의 인간관계가 근속기간에 긍정적인 효과를 보여 주고 있고, 직무내용에 대한 만족도도 중요하게 나타나고 있다”며 “일과 사람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대졸 신입사원의 정착률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적고 있다.
 
일부에서는 청년 직장인들의 다양한 퇴직이유를 세대의 특징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세대문제를 연구해온 서강대 사회학과 전상진 교수는 “지금의 청년 세대는 개인주의적이고 현재의 만족을 중요시하는 ‘탈(脫) 물질주의’적인 세대다”라며 “힘들더라도 현재를 희생하며 미래를 우선시했던 기성세대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전 교수는 “지금의 청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자아실현’인데 경직된 조직문화 속에서 ‘과연 여기서 나를 실현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커지면서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직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는 ‘조직 냉소주의’가 청년 직장인들에게 퍼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직장 생활 3년차가 되는 건축자재회사 영업판매직 31살 D씨가 퇴직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조직에 대한 실망이었다. D씨는 “높은 직급으로 올라갈 희망도 잘 보이지 않지만 올라가도 그 생활이 과연 좋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중견 출판사에 다니던 26세 E씨의 퇴직 이유도 같았다. E씨는 “30명의 직원 중에 3~4년부터 10~20년차의 다양한 선배들이 있지만 내가 꿈꾸고 싶은 롤모델은 없더라”며 “보상체계도 안 좋은데 동기부여마저 없으니 직장을 다닐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 교수는 “기성세대가 일본에서 책임감 없는 젊은 세대를 비하하는 말인 ‘유도리 세대’라는 말에서 보듯 어느 한 세대만의 잘못은 아니다”라며 “세대 간의 갈등으로만 문제를 보기 보단 법적 노동시간의 준수와 합리적 조직문화에 대한 사회적 고민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법과 합리적 문화라는 기본을 먼저 지켜야 세대 문제도 풀 수 있다는 말이다.
 
카페에서 직접 만난 A씨는 다음 직장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방직 7급 공무원 시험에 도전할 계획이다. A씨는 “그동안 개인 생활이 거의 없었는데 빈둥거리니 너무 좋다”고 말했다. 다니다보면 회사도 바뀔 것이라는 희망과 아버지의 수술비 때문에 버틴 시간이었다. A씨의 손목에는 파스가 붙여져 있었다. “손목이 아파 한의원에 갔더니 오래된 병이라며 자주 오라고 하더라.”  A씨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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