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이것’은 과분한 영광(최승호 뉴스타파 PD)이자 부담감(손석희 JTBC 보도부문 사장), 그리고 족쇄(옥천신문사)다. 2002년 제정 이후 올해로 15년차를 맞는 송건호언론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수상자들은 한결같이 1970, 80년대 정치권력의 억압에서 언론 독립을 지키려했던 송건호의 굳은 심지를 떠올렸다. 동시에 또 다른 의미에서 저널리즘의 기본을 지키기 녹록치 않은 지금 현재를 고민했다. 최승호 뉴스타파 PD는 그의 뜻을 “좁쌀만큼이나마 따를 수 있기를 다짐”했고, 변상욱 CBS 대기자는 그의 정신에서 “언론개혁의 방향을 모색하자”고 말했다. 수상자뿐만이 아니다. 송건호는 2000년 당시 기자협회보 설문에서 생존하는 언론인 가운데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선정됐고, 2003년엔 미디어오늘이 기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존경하는 언론인 1위로 꼽혔다. 송건호, 그는 생전 어떠한 언론인이었기에 지금까지도 언론인들의 마음 속 깊이 남아 있는 것일까.

▲송건호 초대 한겨레 신문사 사장 (출처:한겨레신문)

적당한 타협이란 없다

송건호는 1953년 대한통신사 외신부 기자로 언론에 첫발을 디뎠다. 한국전쟁이 막 끝난 무렵이었다. 그는 1960년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맡기 전까지 줄곧 외신부에서 근무했다. 그가 외신부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평전 『나는 역사의 길을 걷고 싶다』를 쓴 정지아 작가는 송건호가 기자가 되기 전 서울철도국에서 통·번역 일을 하면서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추정했다. 정 작가는 “국제적이면서도 객관적인 그의 시각은 이 시기에 길러졌다”며, “독재 치하의 기자로서는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했다.  

1963년 송건호는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2년 뒤에는 같은 언론사 편집국장으로 승진한다. 그가 정치권력으로부터 언론 독립을 지키기 위해 나름의 역할을 보이기 시작한 때도 이즈음이었다. 당시 언론 상황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언론 검열지침이 내려졌고, ‘언론 기관 정화’라는 구실 하에 전국 1,170개의 언론사가 폐쇄됐다.

송건호가 당시 편집국장으로 있던 경향신문 역시 위태로웠다. 군사정권에 가장 비판적인 논조를 보였기 때문이다. 정권은 눈엣가시였던 경향신문을 국가 소유로 만들어 비판의 목소리를 잠재우고자 했고, 65년 경향신문 사장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신문사를 지키기 위해 대신 싸운 사람은 편집국장 송건호였다. 그는 매일 편집국에 상주하는 정보부원과 싸웠고, 정권의 은밀한 회유를 견뎌야 했다. 그는 1992년 역사학자 서중석과의 대담에서 “그때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에게 붙들려가서 대통령과 적당히 타협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도 들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나 그는 타협에 응하지 않았다. 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이하 동아투위) 위원장을 지낸 도서출판 다섯수레 김태진 대표는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청와대에서 주요 언론사 편집국장들을 불러 식사를 하고 촌지를 돌린 적이 있다. 그때 유일하게 촌지를 거부했던 사람이 송 국장이었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정치권에 대한 그의 날선 비판은 계속되었다. 66년 1월 경향신문 1면에 실린 그의 칼럼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땅의 정당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다투어 보수당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무엇을 보수하자는 것인지가 뚜렷하지 않다. (...) 이 땅의 보수당들은 다투어 보수당을 주장하면서 정강정책을 보면 다투어 래디컬한 것을 내걸고 있다. 그러나 래디컬한 정강정책은 언제나 공약으로 끝나고 조금이라도 새로운 말이나 경향만 보여도 ‘이질적’이니 ‘국시위반’이니 하며 때려잡으려고 덤벼든다. 왜 그럴까. 이 땅의 보수주의엔 보수할만한 이렇다 할 질서나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강정책적 보수가 아니라 생리적 보수주의다.
-경향신문 토요 논단 (1966.01.22.)-

1966년 1월, 경향신문은 결국 강제매각 처분되었고 논조는 친정부적으로 급변했다. 송건호는 미련 없이 경향신문을 떠났다.

그가 있어야 했던 자리, 그가 짊어져야 했던 책임   

그는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잠시 거쳐, 1969년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겨 논설위원이 되었다. 74년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직을 맡았다. 겉으로 볼 때는 ‘승진’이었지만, 점점 더 억압적으로 언론의 목을 조여오는 유신체제 하에서 그의 책임은 무거웠다. 당시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신문사 편집국에 마음대로 출입하면서 ‘이것은 빼고 이것은 키우라’고 공공연히 강요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4.19 혁명을 기리는 칼럼(「사.일구에 생각되는 일」, 1971.04.19.)에서는 당시를 빗대 폭압적인 유신권력의 행태를 비판했고, 8대 국회 개원 일에 쓴 칼럼(「팔대국회의원들에게」, 1971.07.26.)에서는 그럴듯한 명분 뒤에 교묘히 가려진 국회의원들의 사리사욕을 지적했다. 송건호는 ‘언론을 통제하면 유언비어가 성행한다’는 내용의 사설 때문에 정보기관에 연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언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명제는 언제나 상식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은 “송건호 씨는 그러한 대쪽 같은 선비였다”고 평했다.

1974년에 송건호가 한국 언론의 사표(師表), 해직기자의 대부로 불리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을 결의하며 유신정권의 부당한 언론 간섭과 탄압에 맞선 것이다. 발단이 된 계기는 동아일보가 서울대에서 일어난 유신 체제 반대 시위를 기사로 다뤄 송건호가 연행된 사건이었다. 그는 편집국장으로서 묵묵히 지켜봤다. 기자들의 선언을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라 여겼다. 그는 “신문기자는 어느 정치세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하고 사회정의를 위해 독립된 입장에서 공정히 신문을 제작해야 한다”고 당시의 생각을 남겼다. 동아일보의 움직임이 국민들의 성원을 얻자, 정권은 교묘한 광고탄압을 가했다.

국민들의 격려 광고와 성금 모금이 이어졌다. 그러나 광고 탄압이 장기화되자 결국 경영진은 굴복해 1975년 3월 134명의 기자들을 해고했다. 송건호는 경영진과 일선 기자 사이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썼다. 경영진 앞에서 울면서 전원복직을 주장했지만, 회사는 꿈쩍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편집국장 자리를 내놓았다. 성유보 전 동아투위 위원장은 “송건호는 본인 스스로 이래야 한다고 앞장 서 주장하는 투쟁가는 아니었으나, 누구나 볼 때 이렇게 해야 하는 상황이고, 엄청난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의 자리여도 본인이 있어야 하는 자리면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고행 12년, 이런 일 저런 일」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러나 만약 회사에 그냥 남아 있다면 하나둘도 아니고 수십 명을 내 이름으로 해임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양심상 도저히 그 자리에 그냥 눌러 있을 수가 없었다. 약 130여 명 중 거의 50여 명을 내 이름으로 해임한다는 것은 죽으면 죽었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도 사랑하는 처자가 있고 설혹 방법상 다소의 이견이 있더라도 언론의 독립과 자유라는 어느 시대에 내놓아도 떳떳한 명분을 가지고 투쟁하는 그들을 해임할 수는 없었다.

▲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언론인들이 편집국에서 당시 유신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참 언론의 길을 위해

회사를 떠난 뒤, 그는 그간 관심이 있었지만 뒤로 미뤄두었던 현대사 연구에 몰두한다. 그는 기자 시절 다듬은 객관적 자세와 광범위한 자료 수집을 바탕으로, 여러 저서를 출간했다. 분단의 기원과 냉전의식의 허구를 다룬 <한국 민족주의 탐구>를 1977년 출간했고, 2년 뒤에는 일제강점기를 연구한 <한국현대사>를 출간해 사학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뼛속 깊이 언론인이었다. 송건호는 진실을 보도하기 위해 재야의 언론도 마다하지 않았다. 1984년 해직 언론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이하 민언협)의 초대 의장이 되었고, 민언협에서 발행한 월간지 <말>의 발행인도 맡았다. 당시는 81년 이후 신군부 세력에 의한 언론 통폐합이 이뤄졌고, 입맛에 맞는 보도를 위해 각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하달한 것이 일상이던 시절이었다. 86년 <말>지는 ‘보도지침’이라는 특집호를 발행해, 언론통제 실상을 시민들에게 적나라하게 알렸다.

송건호 역시 명동성당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언론 민주화가 사회민주화의 선결 요건임을 강조했다. 고승우 민언련 이사장은 자신의 저서 『한겨레 창간과 언론민주화』에서 “송 대표는 1980년대의 독재치하에서도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극소수의 원로 언론인의 한 사람이었고, 특히 <말>지를 발행해 공식 언론이 보도지침 등으로 권력의 나팔수 역할을 할 당시 전국적으로 유일하게 진실을 알리는 참 언론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언급했다.

▲ 월간지 <말> 보도지침 사건 구속자들의 석방 당일(1986년 6월 3일), 송건호 선생이 민주언론운동협의회 간부들과 만나고 있는 모습 (청암문화재단)

 87년 6.29 민주화 선언 전후로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거세졌다. 송건호는 시대의 흐름을 읽었고 동아투위와 조선투위, 80년 언론통폐합 당시 해직기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신문사 창간을 구상했다. 그 결과 88년 5월 국민주주 방식의 모금을 바탕으로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다. 그는 한겨레신문의 초대 사장을 맡았다. 언론사를 떠난 지 13년 만의 일이었다. 그가 초대 사장에 추대된 배경에는 독재 하에서 언론 독립을 위해 한 길을 걸었던 그의 이력과 덕망이 있었다.

임재경 전 한겨레신문 부사장은 “국민 모금으로 새로운 신문을 만들자는 계획이 나왔을 때, 새 신문, 새로운 신문을 만들려면 주체가 국민적인 상징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인물로 송건호 선생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한겨레신문이 비록 1987년 민주화투쟁으로 탄생할 수 있었고 언론의 정도를 걸어야하지만, 운동권의 논리를 대변하는 신문만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가 새 신문을 구상하고 있을 즈음 썼던 글에도 그러한 생각이 읽힌다.

“언론은 자유라고 하기보다 독립되어야 한다. 어떤 문제에 찬성을 하든지 반대를 하든지 또는 새로운 무슨 주장을 하든지 신문사 또는 방송국의 독립된 주장, 판단, 기자의 양식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며 신문사 또는 방송국 밖의 어떤 압력에 의해서도 영향 받지 말아야 한다.”
-「상식의 길-한 언론인의 비망록」, 『민주언론 민족언론』, 1987-

그가 언론인 생활 내내 고민해온 독립 언론의 꿈이 실현된 순간이었다.

온 생애로 언론의 ‘상식’을 지켜낸 언론인

2016년 지금의 언론들은 과거와는 다른 의미로 위기를 겪고 있다. 감소하는 매체 수익, 그만큼 강렬해지는 시장논리 속에 중심 잡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정치권력으로부터 거리두기 역시 만만치 않다. 그 속에서 그들은 공정 보도와 편파 보도 사이를 위태롭게 걷고 있다. 지금의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언론인 송건호가 자신의 삶으로 지켜내려 했던 소박한 상식 아닐까. 그에게 상식이란 정치권력과 상업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언론, 그리고 이를 통한 민주 사회의 실현뿐이었다. 언론이란 당연히 그래야 했다고 믿었기에, 이를 지켜야 한다는 직업적 소명 앞에 편집국장이라는 높은 직위도 필요치 않았고, 독재 치하의 서슬 퍼런 폭력도 두렵지 않았다. 궁핍한 생활이나 외로움 따위도 문제되지 않았다. 자신이 감당할 몫으로 묵묵히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6년, 오늘도 기자들의 펜은 분주히 움직인다. 그들의 펜은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가. 글을 쓸 때마다 항상 30년, 40년 뒤의 평가를 생각하며, 역사 앞에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던 송건호. 이 꼿꼿한 언론 선비의 가르침은 아직도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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