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다. 중공군의 포격이 다시 시작 됐다. 여기저기서 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타고 있던 지프는 포격을 피하기 위해 헤드라이트를 꺼야했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프차는 시속 30km~40km로 달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에 그는 불안한 예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던 찰나였다. 그가 타고 있던 지프차가 앞서 가던 군용 트럭을 쿵 하고 세게 들이받았다. 그는 정신을 잃었다. 조수석에 타고 있던 그는 차 밖으로 튕겨져 나뒹굴었다. 옷은 갈기갈기 찢겼다. “정신을 차리니 부서진 팔목시계가 9시 정각에서 스톱되어 있더군요” 그는 1958년 9월 14일자 한국일보 기사에서 사고원인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사고현장을 취재한 AP통신 스펜서 무어기자는 최병우가 부상당한 상황에서도 인도네시아 취재에서 쓰던 기자수첩을 분실해 아쉬워했다고 전했다.

▲최병우 기자 흑백사진 (출처:중앙일보 기사)

최병우는 이토록 끈질긴 기자였다. 교통사고를 당해 누워있는 상황에서도 취재수첩을 놓지 않았다. 그는 1958년 인도네시아 내전과 대만해협 금문도를 둘러싸고 중국 공산군과 대만 국부군이 벌이던 포격전을 취재하기 위해 해외로 파견된다. 누구보다도 앞장 서 전쟁터를 취재했다. 미국 기자들보다도 적극적이었다. 포격전이 한창이던 대만해협 금문도에 다녀온 미국의 시사평론가 조셉 올솝은 최병우 기자와 나중에 합류한 당시 한국일보 김종규 기자에게 “한국사람들은 죄다 미친 사람들이야”라고 말할 정도였다. 

김종규 기자는 ‘조난전야의 최특파원’이란 1958년 10월 11일의 한국일보 기사에서 금문도로 향하겠다는 최병우의 마지막 메시지를 받은 조셉 올솝의 반응을 이렇게 적었다. 최병우는 포탄이 날아다니는 바다를 뚫고 금문도에 상륙해 당시 상황을 상세히 취재했다. 그의 해외 특파원 활동은 용감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났다. 이를 기리기 위해 관훈클럽은 1989년부터 ‘최병우 국제보도상’을 제정해 수여하고 있다. 

최병우의 교통사고는 포격을 뚫고 처음 금문도에 상륙한 날 일어났다. 1958년 9월 11일의 일이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외신기자들은 보급수송상황만 취재한 후 돌아갔다. ‘최병우 평전’은 그가 홀로 남아 금문도 벙커 속에서 버텼다고 썼다. 포격이 끝나고 사령부로 가는 도중에 교통사고로 야전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부상에도 병원치료를 거부하며 취재에 나섰다.

▲1958년 9월 금문도에서 지프차 사고로 부상 당한 후 타이완에서 외국기자들과, 중앙은 UPI통신 특파원 Charles smith (출처:기자 최병우 평전)

1958년 9월 13일 국제전화를 통해 금문도의 상황을 상세히 전했다. 1958년 9월 14일자 한국일보 기사에는 최병우와의 전화 인터뷰가 실렸다. 기사의 제목은 ‘금문도는 싸우고 있다’였다. 최병우가 본 금문도의 인상이었다. 그는 “외과에 가니 네 개나 있는 수술대가 모두 만원, 중공측 포격으로 팔다리를 잘린 병사들이 수술을 받고 있어 가장 전장기분이 심하더군요”라며 “이날(11일) 중공군은 금문도에 대하여 7만발이라는 포탄을 발사하여 기록을 세웠으니 무리도 아닙니다”고 말했다. 관찰력과 취재력이 돋보인 인터뷰였다.

최병우가 관찰력과 취재력을 인정받은 것은 판문점 휴전조인식의 풍경을 전한 조선일보기사에서였다. 1953년 7월 29일 ‘기이한 전투의 정지’란 제목의 기사였다. “백주몽과 같은 11분간의 휴전 조인식은 모든 것이 상징적이었다”로 시작하는 기사는 당시 판문점의 풍경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조인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유엔 전폭기가 바로 근처 공산군 진지에 쏟고 있는 폭탄의 작렬음이 긴장된 식장의 공기를 흔들었다.”라고 적으며 “남일은 훈장을 가슴에 대 여섯개 차고 있는데 반하여 해리슨 장군은 앞젖힌 여름 군복의 경쾌한 차림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관례적인 합동 기념촬영도 없이 참가자들은 해산하였다.”로 기사를 마쳤다. 평화가 아닌 정전이, 우리의 손도 아닌 타국인의 손에 의해 결정되는 ‘기이한’순간을 그는 뛰어난 관찰력으로 묘사했다.

▲1953년 정전회담 취재 때. 판문점에서 외국 특파원들과 (출처:기자 최병우 평전)

 이런 기사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최병우가 영어에 능통해 판문점에서 이뤄진 미군 장교의 외신 브리핑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기자가 드물었던 당시로써 뛰어난 능력이었다. 판문점 현장에 있었던 당시 평화일보 기자 조세형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란 추모문에서 미군 장교의 브리핑이 있고 ‘최병우 브리핑’이 이어질 정도로 최병우는 영어를 정확히 구사했다고 썼다. 최병우는 과거 주일대표부, 현재 주일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일한 경력이 있을 정도로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했다. ‘기자 최병우 평전’은 그가 서울 제일고등보통학교 시절, 지금으론 중학교 때부터 영어와 일본어에 능했다고 썼다.

최병우는 기자가 된 이후 조선일보 1면에 ‘외전해제’란 이름의 국제뉴스 관련 칼럼을 연재했다. ‘외전해제’를 쓰기 위해 미국 일간지와 주간지를 정독했고,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까지 읽었다. 그의 일기장에는 외전해제를 쓰기위해 공부한 흔적들이 남아있을 정도다. 칼럼들은 국제관계와 미국의 국제전략에 대해 주로 분석했다. ‘원자력 관리에 관한 미소의 대립점’이란 기사에서는 미소간의 원자력 폭탄을 둘러싼 갈등관계를 다뤘다. ‘미 극동전략의 뉴 루트’란 기사에서는 미군의 철수와 기동성 회복 전략을 소개하며 “한국은 또다시 전초기지가 되었다”라고 뉴욕 타임즈에 실린 군사평론가의 글을 옮겼다. 그의 ‘외전해제’는 현재의 국제 보도에 뒤지지 않는 내용을 다뤘다. 이 칼럼은 1954년 1월 6일부터 2월 24일 격일로 17회에 걸쳐 연재된다. 

‘외전해제’를 끝으로 최병우는 한국일보로 자리를 옮긴다. 조선일보 외신부 차장으로 기자생활을 시작 한 지 2년만이었다. 한국일보를 창간한 장기영 사장과의 오랜 인연이 배경이었다. 최병우는 외신부장을 거쳐 부국장까지 오른다. 이곳에서도 그의 왕성한 취재 활동은 멈추지 않는다.

최병우는 1955년 2월 19일부터 영국정부의 초청으로 몇몇 언론인들과 함께 영국을 방문했다. 이는 ‘영국, 영국민’이란 기행문의 형태로 한국일보에 6회에 걸쳐 연재된다. 일종의 르포기사였다. 이 기사에서도 그의 관찰력과 취재력은 어김없이 발휘됐다. 그는 전사자를 기리는 모습부터 영국의회에서 토론하는 모습을 관찰하며 부러워했다. 영국인들의 작은 버릇하나를 잡아내며 감탄했다. 그는 영국인의 질서의식에 대해 “유혈의 참사를 일으키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심리가 있는 것 같다.”며 “영국 사람들도 때때로 ‘우리는 섬나라 근성이 너무 심해’하고 자조하는 경우가 있다.”고 적었다.

‘최병우 평전’은 최병우가 영국에서 돌아와 그해 가을 알 수 없는 이유로 한국일보를 떠난다고 썼다. 하지만 언론계를 떠난 것도 잠시. 그는 일 년 만에 한국일보의 영문판인 코리아 타임즈 편집국장으로 복귀한다. 1956년 7월 30일의 한국일보 사사에 실린 기록이다. 코리아 타임즈 기자 홍순일은 ‘매서운 눈엔 정의 의무감이’란 추모문에서 당시 최병우가 드라큘라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밤낮 없이 일에 몰두했다고 회고했다.

▲코리아 타임즈 공무국에서 조판을 감독하고 있다 (출처:기자 최병우 평전)

 최병우는 일선에서의 활동 뿐 아니라 체계적인 기자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당시의 도제식 교육으로는 기자를 길러내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이 실천으로 옮겨진 것이 ‘관훈클럽’의 발족이었다. 1957년 1월 11일  박권상 기자가 몇몇 동료기자와 머물던 하숙집 다다미방에서 관훈클럽은 발족모임을 가졌다. ‘최병우 평전’은 최병우가 이때 관훈클럽 창설에 얼마나 핵심 멤버였는지 박권상 기자의 증언을 담았다. 박권상 기자는 클럽이름을 ‘관훈클럽’이라고 지은 것도 최병우의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서울기자클럽처럼 보편적 이름이 아닌, 모임을 가졌던 관훈동의 명칭을 딴 다분히 영국식 클럽의 명명방식을 따랐다. 

최병우는 또한 역사가이기도 했다. 후배들에게 “기자는 사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신문은 하나의 역사”라고 여겼으며, 스스로 구한말 미 선교사 알렌의 전기를 쓸 정도로 역사지식에 해박했다. 조세형 기자는 추모문에서 최병우가 역사얘기를 많이 했다고 썼다. 심지어 서재필의 독립신문 창간일을 찾아냈다고 회고했다. 그는 섬세한 관찰력과 국제적 감각에 더하여, 통찰력을 가진 세련된 기자였던 셈이다.

코리아 타임즈 편집국장이자 한국일보 논설위원이었던 최병우는 1958년 9월 5일 대만으로 간다. 다른 신문사들보다 현장을 먼저 보도하기 위한 승부수였다. 한국일보는 이 날 최병우의 파견소식을 소개하고, 9월 8일에 최병우와의 전화 인터뷰를 기사로 싣는다. 기자와의 대화형식으로 이뤄진 최초의 기사였다. 그는 이 첫 인터뷰에서도 뛰어난 취재력을 보였다. “금문도에 국부군 병력이 6개 사단 약 7만 명이며 전도가 군사기지화하고 있대요. 도민들도 있는데 금문도의 특산은 ‘배갈’이라니 재미있지요.”

1958년 9월 15일, 교통사고가 난 지 4일이 지난 시점에는 한국일보와의 세 번째 전화 인터뷰를 한다. 역시 그는 금문도의 자세한 전황과 함께 분위기를 전한다. 그것은 국부군이 중공군에게 포의 크기에서 밀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급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최병우는 교통사고로 입은 부상을 치료한 뒤 다시 금문도로 향했다. 김종규 기자는 ‘조난전야의 최특파원’이란 기사에서 최병우가 사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지 말라는 것은 가라는 거야”라고 말하며 길을 나섰다고 썼다. 기사에는 최병우의 마지막 모습도 담았다.

▲1958년 9월26일 중국 금문도 상륙작전에 종군기자로 참가했지만 상륙정의 전복으로 실종된 최병우(화살표)기자의 마지막 모습. (출처:한국일보 자료사진)

1958년 9월 26일 오전 10시, 높은 파도는 끊임없이 소형 상륙정을 때렸다. 물이 상륙정 안으로 계속해서 덮쳐 들어왔다. 포탄은 계속해서 상륙정의 주변을 쳤다. 10시 30분경 느닷없이 상륙정의 엔진이 멈췄다. 침수가 심해지자 상륙정은 빠른 유속에 곧 침몰할 것처럼 보였다. 상륙정의 장교는 결국 최병우를 비롯한 8명의 기자들에게 물속으로 뛰라고 지시했다. “하여간 최선을 다합시다” 최병우는 동행하던 일본인 기자 야스다에게 이렇게 말하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1952년부터 기자 생활을 시작한 지 6년 만에, 그는 대만 금문도 앞바다에서 기자의 생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기이한’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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