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카미야 요시부미 전 아사히신문 주필이 말하는 한일관계와 언론

▲인터뷰가 있던 1월 27일, 신촌의 한 카페에서 만난 와카미야 요시부미 전 아사히신문 주필

인터뷰가 시작되자 그의 눈빛이 변했다. 건강문제로 체질에 맞는 음식 위주로 먹고 있다고 말했던 조금 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인자하게 웃는 미소는 여전하지만, 눈에 힘이 있었다. 인터뷰 중간 한국 어학당 유학 시절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겼지만 예리한 기자의 분위기는 여전했다. 와카미야 요시부미 전 아사히신문 주필의 이야기다.

김충식 가천대 교수(전 동아일보 논설위원)는 와카미야 전 주필을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저널리스트"라고 표현한다. 평소에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겸손한 사람이지만, "할 말은 단호하게 하는 강골"이라는 뜻이다. 와카미야의 선배인 마츠야마 유키오 전 아사히 논설 주간도 비슷한 말을 한다. "와카미야 전 주필만큼 맞서 싸우는 자유주의자(闘う自由主義者)라는 말에 어울리는 사람은 지금 언론계에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강골', '싸우는' 같은 수식어가 다소 무겁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일본 내에서 받는 비판을 생각해보면 그리 뜬금없는 말은 아니다. 구글에서 그의 이름을 일본어로 검색하면 나오는 연관검색어는 매국노, 재일(在日), 극좌 같은 단어다. 극우들의 집중공격을 받는 탓이다.

하지만 그런 비난 혹은 비판에도 그의 붓끝이 무뎌지는 일은 없다. 그는 작년에 저서 <전후 70년 보수의 아시아관>으로 이시바시 단잔상을 수상했다. 이 책은 전후 역사를 훑으며 일본 보수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을 담았다. 그리고 아사히신문 130년 역사에 6명 밖에 없는 주필에 취임하기도 했다. 극우들의 공격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 주필을 역임하면서 한일관계를 다룰 때 주의했던 부분이 있었다면 어떤 게 있나요.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쓰는 거였죠. 가장 어려운 건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일본에게 충고하는 거지만, 그렇다고 중국이나 한국이 또 다 옳냐 하면 그건 또 아니거든요. 한국이나 중국에게 문제가 있을 때 그걸 공격하기만 하는 건 쉬워요. 아사히를 읽는 건 일본의 독자니까. 하지만 그것만 해선 안 되죠. 일본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일본의 정치인을, 일본을, 어떤 때는 국민을 상대로 비판해야 해요. (그럴 경우에는) '너는 한국, 중국 편이다'라는 비판이 항상 있기 때문에, '아니다. 이건 일본을 위해서도 말하는 거다'라는 걸 알아듣기 쉽게 쓰는 게 가장 어려웠어요."

이런 태도는 동경소고를 통해 한국의 독자를 만날 때도 여전하다. 그는 "한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한국을 비판한다"고 말한다. 복잡하게 얽힌 한일관계의 특성 상 그의 진심이 한국 독자에게 100%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동경소고에는 그가 일본인인 것을 문제 삼아 비판하는 댓글들이 눈에 띈다. 하지만 그의 칼럼에 담긴 비판의 강도는 오히려 과거보다 세졌다. 그 스스로도 요즘엔 한국에 대해 겸양하는 건 그만뒀다고 말한다.

"내 칼럼을 보는 사람들이 내가 기본적으로 한국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준다는 전제 하에서, 지금은 좀 더 한국에게 엄격하게 쓰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혼자 멋대로 한 거긴 하지만. 하지만 '와카미야까지 이렇게 말한다면..' 이라고 받아들여줄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쓰는 게 좋지 않을까 해요. 실제로 '와카미야씨라면 이해하니까 더 엄격하게 말해주세요'라고 말해주는 독자들이 있어요."

연재 햇수로 따지면 벌써 6년째, 그는 한국의 주요 종합일간지에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칼럼을 연재하는 유일한 일본인이다. 자신의 생각을 한국과 일본, 양국 국민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즉, 가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인 셈이다. 와카미야 주필도 그런 자신의 역할을 분명히 알고 있다.

"(한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는 쓴 소리도 할 수 있는 게 내 상품가치가 아닐까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쓰는 이유가 없죠. 내가 일본을 비판하고 싶다고 한국 신문에 일본을 비판만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요. 아베 수상에 대해 비판을 할 때, 엄격하게 비판만 한다면 한국 독자들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 거기에 아베에 대한 상당한 오해가 있다면, '봐봐 아베수상은 말이야' 라면서 오해받고 있는 부분을 말해주지 않으면 안돼요. 그건 내가 말해야만 하는 부분이에요."

와카미야 전 주필과 한반도의 인연은 그가 기자로 첫 발을 들였던 1970년 4월 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사히신문 입사식이 진행됐던 그 날은 일본 전역을 충격에 빠뜨렸던 요도호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이었다. 요도호 사건은 스스로를 '적군파'라고 불렀던 일본인 대학생들이 일본 항공기 요도호에 의해 납치되어 북한으로 간 일을 말한다. 와카미야 전 주필에게 사건은 자신의 자서전 <신문기자 - 현대사를 기록하다>의 첫 장에 기록할 정도로 기억에 남은 사건이었다. 

그 후 요코하마, 나카노 지국에서 기자 생활을 하면서 요도호와 북한, 한반도는 잠시 그에게서 잊혀진다. 당시 그는 일본 내의 보이지 않는 차별 문제에 집중했다. 대표적인 게 나카노 지국 시절 썼던 <르포 현대의 피차별부락> 기획 시리즈였다. 부락민은 과거 일본 신분제에서 천민에 해당되던 사람들이었는데, 신분제가 폐지된 뒤에도 차별은 여전히 이어졌다. 입사 4년 차였던 그는 <르포 현대의 피차별 부락>기획을 담당해 큰 반향을 남겼다. 기획을 진행하면서 익명의 항의도 많이 받았다고 그는 자서전에 기술한다. '그냥 덮어달라'는 익명의 항의서를 받고는 고민에 빠지기도 했던 그였다. 하지만 결국 드러내는 게 그가 생각하는 사회를 위하는 길이라 믿고 그는 기획을 이어나갔다. '사랑하기 때문에 쓴소리 한다'는 태도는 그가 젊은 시절에도 갖고 있던 태도였다.

지국 생활을 마치고 그는 본사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한반도 이슈에 관심을 갖게 되는 사건이 생긴다. 1979년 당시 방위청 장관의 첫 방한이 결정된 것이다. 그는 방한에 동행하면서 처음 한국에 발을 내딛는다. 이듬해 9월에는 담당하던 자민당 의원들을 따라 평양을 방문해 판문점을 둘러본 그는 한반도를 더 깊이 있게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1981년엔 서울에서 1년 간 유학을 했다.

그 이후로 30여년, 그는 일본 내 대표적인 지한파 지식인으로 살아왔다. 한일관계 개선에도 앞장섰다. 대표적인 게 2002년 월드컵이다. 개최지 선정을 두고 한국과 일본이 신경전을 벌일 때, 그는 한일월드컵 공동개최를 주장하는 글을 썼다. 그 후 관계자들과 연대해 공동개최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2005년에는 '다케시마와 독도, 이것을 우정의 섬으로.. 라는 몽상'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독도를 한국에 양보하자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한일관계를 위해 노력해온 만큼 악화일로를 걸었던 최근의 한일 관계는 그에게도 뼈아팠다. 특히 그에게 충격을 안겨준 것이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이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그는 독도 방문에 대해 머리를 얻어맞는 기분을 느꼈다고 말했다.

"일본인이라서 화가 났다기보다는, 이제껏 한일관계를 어떻게든 좋은 방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해왔으니까요. 일본에서 욕을 먹으면서도.. 저 뿐만 아니라 한일 관계를 좋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힘들었을 행동이었어요. 양 극단에 있는 사람들만 기뻐할 행동이었죠."

그는 동경소고에서 '일본의 우경화를 돕는 일'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이를 비판한 바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과 천황에 대한 발언을 포함해 한국, 중국, 북한이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부추겼고, 그게 아베 수상이 정권을 잡는 걸 돕는 '홉, 스텝, 점프'가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독도방문과 아베 수상의 취임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났다. 최근 한일관계에는 위안부 문제가 핵심쟁점으로 떠올랐다. 작년 12월 28일 한일 양국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발표하는 한편,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인 박유하 교수를 둘러싼 논란이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위안부 문제를 보도하는 한국 미디어의 자세를, 일본 언론인은 어떻게 생각할 지 궁금해졌다. 그는 한국의 모든 보도를 보는 것은 아니라는 전제를 덧붙이면서도 박유하 교수를 대하는 미디어의 태도가 조금 심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주장은 사설에서 하고, 보도는 객관적으로 해야하는데, 한국의 일부 매체에서 '주장'과 '보도'를 섞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번 박유하가 옳은가 틀린가에 대해 다룰 때도 객관적으로 보도하려면 맞냐 틀리냐를 기사에서 쓰는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박유하는 이렇게 말했다',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면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지지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찬가지로 소개하는 게 기본이에요. 그런 다음에 틀렸다고 생각하면 사설 등에서 쓰는 건 좋죠. 그런데 한겨레는 처음부터 박유하가 잘못했다고만 얘기했어요. 한겨레가 들으면 화내겠지만 그런 점에선 일본의 산케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산케이는 오른쪽의 극단, 한겨레는 왼쪽의 극단을 맡게 되는 것 같아요."
 
작년 연말에 있던 위안부 합의에 대한 그의 생각도 듣고 싶었다. 특히 합의 이후 언론 보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그는 한국 언론이 일본의 반응을 전할 때 일부의 목소리만을 과하게 보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도 이번 합의가 전체적으로 잘 됐다고 말하는 게 다수니까요. 다만 소녀상을 옮기지 못하고 돈만 10억 준거냐 하는 말을 하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일부 미디어는 그걸 보도해요. 하지만 다수의 미디어는 보도하지 않아요. 유력한 사람이 말을 한다면 보도를 하지만요. 그런데 그런 경우에 한국은 그걸 가지고 '일본에서 이런 보도가 나왔다'라고, 좀 크게 보도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크게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한국정서에 맞지 않는 발언이 나오면 반드시 보도가 되는 거 같고. '한국에 보도되는 일본의 분위기와 실제 일본의 분위기가 좀 다르지 않나'라고 생각해요."

일본 언론들의 일제히 '소녀상 이전이 10억의 전제 조건'이라는 기사를 냈던 것에 대해서도 그는 비판의 목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자신이 몸담았던 아사히신문도 '전제조건' 기사를 냈던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 왜 그런 기사가 일제히 오보로 나온 것 같냐고 묻자 그는 기자들의 사실 확인의 부족을 원인으로 꼽았다.

"그렇게 말하는 정치인이 있으니까요. 정치인은 일본 내의 우파를 설득하기 위해 말을 했을 거에요. 신문기자라면 그걸 다시 한 번 더 확인해야 하는 데 그걸 하지 않으니까 그런 보도가 나간 거죠. 그대로 믿고 쓴 거니까. 아사히도 그랬다는 건 문제에요."

- 정부 측에서도 전제조건이 아니라고 얘기를 했잖습니까. 그런데 계속해서 소녀상 이전에 대해 아베 수상이나 내각관료들에게 묻는 건 한편으로 '이전을 압박하려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데요.

"아니라고 누가 얘기를 했다는 거죠?"

갑자기 그의 입에서 한국어가 튀어나왔다. 주어가 불분명한 문장이 걸린 모양이었다.

- 한국 정부에서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다고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 그러니까 일본에서도 그런 약속이 없다고 하고 있잖아요. 지금은 그런 약속이 없다고. 그런데 (한국이 이전을 하도록) 계속 요구하라는 목소리가 일부 있기도 하다는 거죠. 그런데 (일본) 국민 여론이 그렇게 강하게 요구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 산케이신문 여론조사 같은 걸 보면..
"5~60% 정도? 그거는 '이전을 하면 좋겠다'고 하는 거에요. 제 생각에는 일본 정부는 (이전을) 하고 싶어 하지만, 한국 정부는 현실적으로 그렇게 약속할 수 없는 입장이죠. 만약에 이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된다면 (소녀상 이전에 대해 우호적인)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을 거에요. 그런 분위기에서 ‘소녀상을 다른 장소로 옮깁시다’라고 하는 결론이 나오는 그림을 그렸겠죠. 그런데 '처음부터 소녀상 이전이 조건이었다'라는 발언이 나왔고, 관련 보도가 나오면서 현실적으로 그렇게 해결하는 건 굉장히 어려워졌다고 생각해요."

이 대목에서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애정을 갖고 한일관계를 위해 노력했던 만큼 지금의 상황이 그에게는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에게 한일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한일 언론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를 묻자 그는 "국적을 뛰어넘는 태도"를 말했다.

"기사는 먼저 사실을 바탕으로 써야죠. 하지만 사실만 썼다고 해서 이게 꼭 진실이 되는 건 아니거든요. (상대방에 대해) 비판적인 모습, 부정적인 모습만 보도한다면 말이죠. 물론 비판하지 않으면 문제의식이 없는 걸로 여겨지는 분위기도 분명 있어요. 하지만 한국, 일본이라는 국적을 뛰어넘는 시각에서 보도를 한다는 태도를 가졌으면 합니다. 적어도 한일관계를 발전시키고 싶다면."

국적을 뛰어넘는다는 얘기에 그가 과거 칼럼으로 얘기했던 '꿈'이 생각났다. 그가 꿈에서 봤다는 한일공동신문의 이야기다. 한국어, 일본어를 병용하고 보도는 객관적으로 하되 다른 해석이 가능하면 공평하게 싣는 신문이다. 기본이념은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 국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다. 그에게 '한일공동신문'의 이야기냐고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그건 꿈이지만.. 언젠가는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의 꿈은 인터뷰를 진행하고 3개월 뒤 실현될 ‘뻔’ 했다. 와카미야 전 주필에게 핵심 이슈에 대해 한일의 의견을 같이 담는 홈페이지를 만들자는 제안이 들어온 것이었다. 4월 25일 광화문에서 기자를 만났을 때 그는 “내년쯤이면 실현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오랜 꿈이 이뤄질 거라는 기대가 그의 눈에서 엿보였다. 한일공동신문과 함께 그는 휴식도 계획하고 있었다. 얘기하는 와중에 주머니에서 환으로 된 약을 꺼내먹기도 한 그는 “지금 집필 중인 책이 마무리되면 (서울의) 북촌에서 머물 것”이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3일 뒤였던 4월 28일, 그는 중국 상하이에서 운명했다. 한중일 3국 심포지엄에 참가하기 위해 상하이에 체류한 지 하루만의 일이었다.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퇴직 후 썼던 동아일보의 <동경소고>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다짐 그대로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동북아시아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기자 생활 43년, 그리고 퇴직 후 4년. 한일관계, 나아가 동북아 관계에 헌신한 일생이었다.

저작권자 © 스토리오브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