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 선생 사진

“큰 키와 깊은 눈, 묵직한 음성이 인상적이었던 고인은 화려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글로 언론계와 학계에 두루 족적을 남겼다.”
 
정운영 선생이 창간멤버로 활동했던 한겨레신문에서는 이와 같은 한 줄로 그의 부고를 알렸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1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수많은 후배, 후학들의 머리와 마음속에는 그가 살아있었다. 이토록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까지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여운을 남길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학자로서의 정운영

정운영 선생은 언론인이자 학자였다. 벨기에 루뱅대학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인, ‘이윤율 저하’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1982년 귀국해 한신대학교에서 경상학부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대학 강단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보급한 첫 주역이기도 하다. 학생들에 대한 정 선생의 열정은 언제나 불꽃같았다. 하지만 그 불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외압에 의해 꺼지고 만다. 1986년 학내 민주화 운동을 벌였던 그는 ‘반독재민주화 대오의 단결을 위해’ 5년 동안 몸담았던 한신대에 사표를 냈다. 그 이후 서울대와 고려대에서 시간강사로 일을 했지만, 학생들에게 그가 지닌 지식들을 모두 전달하기에는 재직기간이 너무나도 짧았다.

그의 이름 석 자가 곳곳에 많이 알려진 뒤, 그는 경기대 경제학과 부교수로 재직했다.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행동이나 남에게 부담되는 이야기를 내세우기보다는 화합하려는 모습을 보였던 그는, 강의시간에도 학생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고 학생들 간의 토론을 유도하는 수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학생들과 함께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005년 9월,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더 많은 학생들을 만나 후학을 양성할 수 있었기에 짧기만 했던 그의 대학 강단에서의 시간은 아쉬움을 남긴다.

한겨레와 중앙일보 그리고 정운영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정운영 선생은 마르크스주의를 주장한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 경제학자다. 사고의 대립은 양립할 수 없지만 그의 행보를 살펴보면, 정 선생은 대척점에 존재했다. 그는 좌와 우를 오가는 칼럼니스트였다. 진보주의자였지만 사상적 편견을 갖기보다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그가 처음 ‘신문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오피니언 면에 글을 실었던 것은 1988년, 편집이사로서 한겨레에서 활동했을 때였다.

한겨레의 창간을 함께한 그는, 외환위기 충격이 이어졌던 1999년까지 한겨레의 대표 경제평론가로서 활동했다. 한겨레신문에 실린 그의 칼럼은 그의 촌철살인과 같은 필력을 돋보이게 만들었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IMF가 일어났을 당시, 비상임 논설위원이었던 그는 사내 긴축운영에 따른 결과로 의도치 않은 사표를 썼다.

이 후 중앙일보에서 진보 진영의 필진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고, 정운영 선생은 중앙일보로 거취를 옮겼다. 한국의 대표 진보 경제학자로 이름을 알렸던 터라, 보수지 중 하나인 중앙일보에 적을 둔다는 사실 그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안겼다. 정운영 선생 또한 당신 삶에 있어서 큰 일 이었을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직후 그의 부고를 알리는 기사에서도 정 선생의 부인 박양선 여사의 목소리를 통해 당시 그가 받았던 충격을 알 수 있었다. “그 분한테는 한겨레에서 중앙으로  옮긴 게 아주 아주 큰 일이었어요...” 전화선 너머에서 박 씨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중앙일보에 있던 시절, 그는 사설을 쓰지 않았다. 사측과 정 선생 서로 합의를 한 사항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로 향한 그의 발자취로 인해 그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일부는 보수진영의 일간지로 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진보 경제학자인 그에게 ‘변절’을 들먹이며 조롱하기도 했다. 하지만 좌우를 막론하고 사람을 아끼는 마음에서 글을 쓴 그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그의 태도에서 비롯된 그의 글들은 세상의 기준에서 오른쪽을 향할 수도 있고, 왼쪽으로 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명칼럼니스트, 정운영

‘글을 가장 책임 있게 쓰는 사람, 책과 독서량이 가장 많은 사람,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경제 이론가이며 평론가, 당대의 대표적인 재사이며 문장가’

살아생전 정운영 선생 곁을 지키며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태백산맥의 조정래 작가가 정운영 선생의 추도식에서 남긴 말이다. 정운영 선생이 썼던 칼럼은 여러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정 선생의 글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1년이 넘었음에도 아직까지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칼럼 한 회 분을 쓸 때마다 정 선생은 밤을 하얗게 지새울 만큼 시간의 흐름을 망각했다. 치열한 열정으로 집중을 다해 쓴 글이 출력되는 과정을 지켜보기 위해 글을 쓴 다음날까지 신문사 윤전기 옆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글은 고칠수록 좋아진다”며 윤전기를 돌리기 직전까지 자신의 글을 여러 번 고치고, 고치는 성실을 다함에 있어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었다. 그의 글이 한 편 한 편 발표 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화젯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정 선생은 칼럼 한 편을 쓰기 위해 관련 서적을 대 여섯 권씩을 읽었고 그 글을 칼럼에 등장시키곤 했다. 한 회분의 칼럼이었음에도 정성을 다해 쓴 글이었다. 그 당시 대학생들은 한겨레신문이나 중앙일보에 선생이 쓰는 글마다 즐겨 읽었다고 한다. 이 모두가 정운영 선생의 문학적 상상력 덕택이었을 것이다 .정운영 선생, 당신이 자신의 글을 일회성 글이 아닌 의식 깊이 새겨야 하는 경제 지도서, 사회 인식서 그리고 역사 판단서가 될 수 있도록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의 칼럼 중 ‘귀향, 화해 그리고 새 출발을 위하여’는 한국의 100대 명문장 중 하나로 뽑혔다. 자신의 글이 명문으로 뽑혀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길 바라는 것은 모든 글쟁이들의 소원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동의하듯 그가 지닌 실력, 사회적인 명망과 지위로는 한국의 대표 명문장으로 뽑힘이 당연했다. 하지만 정운영 선생은 철저한 겸손함으로 명문장에 뽑힌 소식을 기뻐했다고 한다.

“알프레드 마샬은 경제학자들에게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함께 지니도록 당부한 적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J양이 냉철한 지식과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자신과 이웃이 밥을 얻고 자유를 찾는 일에 동참하기를 원한다면, 경제학을 선택하는 데 주저하지 마십시오. 결코 자상하지도 못하고 또 친절하지도 않은 이 회신이 J양이 ‘미래’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운영 선생의 명 칼럼 중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기억에 오래 남아있는 칼럼은 단연 ‘경제학을 전공하려는 J양에게’일 것이다. 알프레드 마샬이 말한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지닌 경제학자가 바로 정운영 선생이었고, 정 선생은 많은 사람들에게 미래를 선택하는 데에 있어서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그의 서재에는 아직도 채워지지 못한 아쉬움이 담긴 원고지들이 가득하다. 문득 정운영 선생이 그리워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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