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드물게도, 그는 우리의 시대를 폭넓게 그리고 예술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20세기 위대한 책으로 손꼽히는 작품을 썼고, 이를 읽는 우리는 모두 그의 수혜자다.” 예일대학교 출신 시나리오 작가인 데이비드 맥컬로프가 예일대학교에서 매년 열리는 ‘존 허시 강의(John Hersey Lecture)’ 중 첫 번째 강의에서 한 말이다. 존 허시의 가장 유명한 저서, 『히로시마』가 출간된 지 올해 70년이 됐다. 오늘날 그는 어떤 기자로 기억되고 있는가.

▲<히로시마> 한글 번역본 표지 (출처 : 책과함께), <히로시마> 원본 표지 (출처 : Penguin Books)

존 허시는 1914년 중국 톈진에서 태어났다. 1924년 미국으로 이사가기 전까지, 그는 10년을 중국에서 살았고 영어보다도 중국어를 먼저 배웠다. 나고 자란 동양이 마음속에 깊숙이 남아, 기자가 돼서도 태평양 지역을 담당하고 원자폭탄 피폭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논픽션 『히로시마』를 써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일대학교와 케임브리지대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소설가 싱클레어 루이스의 비서로 잠시 일하다 1937년 말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지>에 고용됐다. 뉴욕타임스의 부고 기사에 의하면 그는 “<타임지>는 가장 생기 넘치는 매체였고, 이 곳에 고용되기를 그 무엇보다 더 원했다”고 말했다.

허시는 <타임>과 그 자매지 <라이프>, 그리고 <뉴요커>의 특파원으로 일했다. 1939년에 <타임>의 특파원으로서 현재의 동아시아를 뜻하는 극동(Far East)에 배치됐고, 세계 2차 대전의 종군을 시작했다. 동아시아 외에도 그는 태평양, 유럽 등을 오가며 전쟁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사로 옮겨냈다.
 

“‘인류의 양심을 뒤흔드는’ 고전”, 『히로시마』

“『히로시마』의 가장 큰 특징은 존 허시의 꾸밈없고 정확한 문체(precise and unadorned style)로, 그는 사실만을 기록함으로써 도덕적, 해석의 책임을 독자에게 부여한다.” <뉴요커>의 존 미샤유드(Jon Michaud)가 허시와 『히로시마』를 회고하는 기사에 쓴 말이다. 미국의 주간지 <뉴요커>는 창간 85주년을 기념해 그간 <뉴요커>에서 주목을 끌었던 기사들을 다뤘다. 그 마지막 순서가 “본지에서 출간된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인, 존 허시의 『히로시마(Hiroshima)』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원자폭탄이 투하된 히로시마에서 살아남은 6명의 이야기를 담은 이 보도는 미국인들에게 원자폭탄의 위험성을 처음 생생하게 전한 보도로 알려져 있다. 뉴욕대학교 저널리즘 스쿨이 1999년 선정한 ‘20세기 미국 언론보도 100선’ 중 1위를 차지했으며, 후에 책으로 출판돼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100대 논픽션 도서에 올랐다.

『히로시마』는 당시 뉴요커의 편집인이던 윌리엄 쇼운(William Shawn)과 존 허시가 히로시마 원폭이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을 다루기 위해 기획했다. 그간 원자폭탄에 대한 많은 기사들은 원폭 투하 작전과 원자폭탄이 제작되고 투하된 과정을 다뤘고, 이들이 냉전에 미친 영향을 보도했다. 그러나 <뉴요커>는 실제로 히로시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즉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의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에 초점을 둔 기사는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태평양 지역 특파원으로 중국에 있던 존 허시는 1946년 도쿄와 히로시마의 생존자를 인터뷰했고, 그중 6명에게 집중했다. 목사와 독일인 신부, 홀로 아이를 키우던 여성과 공장의 여성 노동자, 그리고 두 명의 의사였다. 허시는 원자폭탄의 제조 원리 등 다른 주제는 모두 제외하고, 이 여섯 명의 생존자들이 보고 겪은 것에만 오롯이 집중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1945년 8월 6일부터 9일까지를 돌이켜 본 이들의 회고 앞에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원자폭탄은 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러나 이 여섯 사람은 살아남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왜 자신들은 살았을까, 그들은 아직도 얼떨떨할 따름이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여러 번의 소소한 우연과 결단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나열한다. 때마침 내디딘 한 걸음, 실내로 들어가기로 한 결정, 다음 전차가 아닌 바로 그 앞 전차에 올라탄 일 등등. 그 생존의 순간에 수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겼고 상상도 못한 죽음의 아비규환을 목격했음을 이제 그들은 안다. 그러나 그 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히로시마』는 엄격한 사실보도로 유명하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뉴요커>는 『히로시마』에서 나타난 허시의 문체에 대해 논할 때 “Straightforward(간단한)”, “non-polemical(격렬하지 않은, 차분한)”, “meticulous(세심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특히 <뉴요커>에서 낸 허시의 부고 기사는 “명확하고 차분하며 절제된 문체가, 오히려 그가 전하는 이야기의 참혹함을 한층 더 높였다(clear, calm, and restrained, that the horror of the story he had to tell came through all the more chillingly)”고 평가했다. <워싱턴포스트>가 『히로시마』 개정판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원자폭탄으로 파괴된 도시와 다친 사람들을 찍은 사진보다, 이를 묘사한 그의 글이 더 강력하다”며 인용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가는 길에 수많은 피난민과 마주쳤는데, 누구 하나 성한 사람이 없었다. 눈썹이 타서 없는 사람, 얼굴과 손의 피부가 너덜너덜 떨어져 나온 사람, 통증이 너무 심해 물건을 나르는 것처럼 양손을 치켜든 사람, 걸으면서 구토를 하는 사람…그들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거나 누더기처럼 해진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맨살이 드러난 일부 신체 부위의 화상 자국이 특정한 무늬를 띄었다. 이를테면 남자는 속셔츠 끈과 바지 멜빵 자국이, 여자는 입었던 기모노의 꽃무늬 자국이 있었다(흰색 옷은 폭발로 인한 열을 반사시킨 반면, 검정색 옷은 흡수해 이를 피부에 전달시킨 탓이었다).”

이 차분한 기록에는 허시의 함축적인 해석이 드물게 등장한다. 나열된 사실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기자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원자폭탄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이에 대해 의논하자 “진실을 알았다 한들, 그토록 경황이 없고 지쳐서 몸을 가누기도 힘들고 심한 부상에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에서 자신들이 원자폭탄의 위력을 시험하는 경이적인 첫 시험대에 오른 피실험자였음을 신경 쓸 겨를이나 있었겠는가”처럼,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기자가 해석해주는 경우가 있었다. “놀랍게도 히로시마 사람들 대부분이 원자폭탄 사용에 관한 윤리적 문제에 다소 무관심했다” 등 사실에 기반한 간접적인 메시지 전달도 존재하나 많지는 않았다.

기사는 원래 여러 번의 시리즈로 나뉘어 실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쇼운은 <뉴요커>의 설립자이자 편집자였던 헤럴드 로스를 설득해 1946년 8월 31일의 <뉴요커> 한 호 전체를 허시의 기사로 채웠다. 잡지에 들어가는 광고와 기고, 논설, 그림을 모두 뺐다. <뉴요커>는 후에 존 허시의 부고 기사에서 이런 방식으로 실린 기사는 히로시마가 유일하다고 했다. 로스는 잡지가 출판된 후 “내 생애에서 이보다 더 큰 만족감을 주는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뉴요커> 한 호 전체를 히로시마 기사로 채운다는 에디터의 공고


반향은 엄청났다. <뉴욕타임스>는 <뉴요커>가 허시의 기사를 게재한 방법에 대해 보도했고, <ABC>는 라디오에서 기사 전체를 읽었다. 책으로 인쇄된 후 히로시마는 350만 부 가량 팔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허시는 원자폭탄이 투하된 40년 후 다시 히로시마로 돌아가 당시 인터뷰했던 6명이 그 후 겪은 삶을 취재했다. 부유한 삶을 산 사람들도 있었지만, 수많은 피폭자들은 여러 후유증을 동반하는 원자병과 일본 사회 내의 차별적인 시선을 겪어야 했다. 죽은 2명의 경우 생전에 했던 인터뷰와, 주변인들의 기억을 참고했다. “Hiroshima: The Aftermath”라는 제목의 이 후속보도는 1985년 6월 15일 <뉴요커>에 실렸으며, 책에도 마지막 장으로 추가됐다.

후속보도는 원폭 투하 직후의 보도와 달랐다. <워싱턴포스트>는 허시의 후속보도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서 “새로운 장은 병렬(juxtaposition) 기법을 통해 그의 도덕적 가치관(moral)을 미묘하지만 강력하게 담았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병렬 기법’은 6인 중 마지막으로 수록된 다니모토 목사의 이야기에서 빈번하게 드러난다. 다니모토 목사는 히로시마의 비극을 알리고 반핵 운동을 확산시키려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는 데 일생을 바친 사람이었다. 허시는 그의 삶을 회고하는 중간중간에 미국과 영국 등 세계 강국들이 핵실험을 시도하고 새로운 핵폭탄을 개발했다는 내용을 집어넣었다. 매끄러운 연결고리가 없는 단순한 병렬이었음에도 두 내용이 정반대였기 때문에, 메시지는 강렬했다. 다음의 예시는 다니모토 목사가 기고한 칼럼과 인도의 핵실험 사실을 병렬한 대목이다.

“기념공원의 위령비에는 ‘편안히 잠드소서. 이러한 실수는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전 세계 정치인들은 히로시마에 방문해서 이 위령비 앞에 무릎을 꿇고 전 세계의 정치적 문제들을 숙고해야 합니다.”

“1974년 5월 18일 인도는 처음으로 핵 실험을 실시했다.”

원자폭탄으로 폐허가 된 모습을 낱낱이 드러냈던 현장에 40년 만에 다시 돌아간 허시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마지막 장이었던 다니모토 목사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에서야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그의 기억도, 세계인들의 기억과 마찬가지로 점점 흐릿해져 갔다(His memory, like the world’s, was getting spotty.)”

 

기자 출신 작가

종군 기자로 일하던 1944년 그는 이미 소설 『아다노의 종』을 썼고 이듬해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18년 동안 예일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쳤고, 미국저자연맹 회장과 미국문예아카데미 원장을 역임했다.

그의 작가 인생에, 종군 기자로서의 경험은 깊이 각인돼 있었다. 『아다노의 종』은 시칠리 전쟁을 다룬 소설이며, 그 외에도 유대인 격리구역인 바르샤바 게토가 배경인 『벽(The Wall)』과 태평양 솔로몬 제도의 섬 과달카날(Guadalcanal)의 접전을 주제로 한 『계곡 속으로(Into the Valley)』 등은 모두 세계 2차 대전이 배경이다. 전쟁의 폐해를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한 경험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가 1993년에 사망했을 때, <뉴욕타임스>는 부고 기사에서 그를 “작가도 도덕적인 목표(moral goal)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작가”라며 그가 “자신의 삶 속 주제들에 깊이 빠져 있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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