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숙(37)씨는 책을 읽기 전, 이어폰을 꽂는다. 컴퓨터 자판으로 스크린의 폴더를 짚을 때마다 ‘내 문서’ 또는 ‘인터넷’하고 읽어주는 안내 음성이 들린다. 그녀는 인터넷에 접속해 실로암 전자도서관 페이지의 도서목록 중 신학 카테고리를 클릭한다. 정렬된 도서 중 한 권을 골라 '재생' 버튼을 찾아 누르자 도서명과 지은이를 소개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녀는 기독교인이라 신학도서에 관심이 많다. 최근에는 헨리 나우웬의 ‘상처 입은 치유자’를 들었다. 강 씨는 더 다양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녹음도서가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쇠형(42)씨는 언뜻 보기에도 백과사전처럼 두꺼운 책을 소리 내어 읽는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손으로 짚으며 천천히 뜻을 파악한다. 올 봄 맹학교에서 안마사 교육을 받을 예정인 이 씨는 예습 차원에서 '생리ㆍ해부' 교과서를 점자로 읽는 중이다. 3권을 다 읽고 나서 기자에게 혹시 4권을 찾아 줄 수 있냐고 도움을 청하자 멀찍이 앉아있던 임지빈(55)교사가 "언제까지 물어보면서 살 거냐!"며 불호령을 내린다. 임 교사 역시 중도실명자. 이 씨의 자리까지 찾아와 점자를 함께 읽으며 4권을 찾아준다. 이 씨의 손가락이 다시금 바빠진다.

디지털화로 음성 안내자료 많아져

보건복지부의 ‘2014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시각장애인 중 점자를 읽을 줄 알거나 배우는 중인 비율은 6.7%로 나타났다. 2011년 조사 때(6.1%)와 큰 차이가 없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관계자는 조사 대상이 점자를 필요로 하는 정도의 중증 시각장애인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후천적인 이유로 시각장애를 갖게 된 비율이 95.6%이며 이중 40대 이후 비율이 49.4%에 이르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국립국어원의 2014년 보고서인 ‘시각장애인 언어 환경 개선 중장기 계획 수립‘을 보면 1급에서 4급에 이르는 시각장애인 1000명 중에서 점자를 사용한다고 대답한 경우가 41.6%였다.

점자를 사용하지 않는 시각장애인은 음성 자료를 이용한다. 국립장애인도서관의 2015년 통계에 따르면 점자자료의 이용률이 평균 126회에 그친 반면 점자 외에도 오디오, 텍스트, 이미지, 동영상을 디지털 포맷으로 변화해 음성으로 전달하는 디지털 녹음도서(DAISY‧Digital Accessible Information System)자료의 이용률은 평균 5,241회를 기록했다. 서울특별시립노원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는 일반 전화를 통한 녹음도서나 CD 형태의 녹음도서 외에도 ‘행복을 들려주는 도서관'이라는 모바일 앱을 운영한다. 전문도서나 교양도서뿐 아니라 신문, 잡지의 내용도 음성으로 제공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각장애인이 많이 이용한다.

음성 안내와 점자를 모두 사용하는 시각장애인 이정민(43)씨는 "시각장애인이 읽을 수 있는 책이 몇 권 안 됐는데 녹음도서가 생기면서 선택의 폭이 늘어났다"고 말했다. 사회복지사인 그는 책에 대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독서가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소통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전했다.

하지만 음성 안내와 점자는 글의 분야와 종류에 따라 적절하게 혼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이 씨는 "학습도서나 전공도서는 정확성 면에서 점자로 읽는 편이 좋지만 점자 읽는 속도가 느려서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다. 점자와 음성을 함께 제공한다면 음성으로 한 번 듣고 원하는 부분을 점자로 다시 읽는 식이 좋다"고 말했다.

국립장애인도서관 자료개발과의 이선호(44) 주무관도 점자 혼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시각장애 1급인 이 주무관은 "안내문을 화면읽기프로그램으로 들었는데 '중계 체육대회'라는 말이 들려서 무슨 말인가 하고 점자로 다시 읽어봤더니 '춘계 체육대회'였다“며 ”짧은 시간동안 정확한 의미와 내용을 파악하려면 점자로 읽는 편이 좋다"고 말했다.

점자 익히기는 시각장애인의 세계로 내딛는 첫 발걸음

서울 강동구의 한국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점자를 가르치는 임지빈 교사는 "시각장애인은 스마트폰 음성 지원기능이나 컴퓨터 스크린 화면을 읽어주는 스크린 리더 등 정보통신(IT) 기술 발전의 혜택을 입은 대상 중 하나"라면서도 "그것들은 결국 보조 수단일 뿐, 자립하기 위해서는 점자를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각장애인이 예전보다 음성 안내에 의존하면서 촉각이 더 둔화되고 점자 익히기에 덜 정성을 쏟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복지관을 찾아가 점자를 배우거나 활동에 참여하는 시각장애인은 그렇지 않은 장애인에 비해서 사회활동 의지가 강한 편이다. 임창규(68)씨는 "장애가 생긴 후 사람들을 점점 피하게 됐지만 점자 교실에서 다른 시각장애인과 어울리면서 정보를 얻고 생활 방식도 알게 됐다“고 전했다. 천규환(35)씨는 "손에 기름기가 있으면 더 점자 읽기가 쉬워서 가끔 간식으로 기름기가 많은 마늘 바게트를 사온다”며 다른 이들에게 점자를 쉽게 읽는 비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올해 2월 3일 서울 영등포구의 이룸센터에서 '한국점자규정 개정안 공청회'가 열렸다. 국립국어원장,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장, 점자규범정비위원회 위원장을 포함해 약 110명의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모여 시각장애인의 점자 사용을 활성화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송철의 국립국어원장은 "2014년에 국립국어원에서 발행한 ‘시각장애인 언어생활 실태 조사’에 따르면 시각장애인 중 64%가 일상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얻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점자 규정의 세 번째 개정 필요성을 언급했다. 현행 점자 규정은 1997년에 제정된 이후 2006년에 개정됐다. 음악 점자 개정안에 대해 토론을 맡은 점역ㆍ교정사 이은혜 운영위원회 위원은 “지금까지 음악 점자가 어려워서 음을 듣고 따라 연주하시는 식으로 배우시는 분들이 많았다“며 ”최근 시각장애인들의 하모니카 학습 수요가 늘어나는 만큼 이번 점자 개정이 시각장애인들의 학습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영일 점자규범정비위원회 위원장(조선대 교수)은 공청회가 끝난 뒤 기자와의 대화에서 음성 안내와 점자를 양자택일하기 보다는 적절하게 혼합해서 사용하는 편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빠른 속도가 필요하거나 많은 양을 읽어야 할 경우에는 음성으로 듣고, 은행계좌나 금융정보 같이 정확성과 보안을 요하는 자료는 점자로 읽으면 좋다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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