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ace, my wish for the girl'

연분홍색 티셔츠 가슴팍엔 하얀색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다. 오른쪽 소매엔 서울 종로구 일본 대사관 앞에 세워진 소녀상의 모습이 조그맣게 새겨졌다. 파스텔톤에 심플한 디자인이 들어간 티셔츠는 유명 브랜드의 것 못지않게 세련돼 보인다. 매주 수요일 아침이면 사람들은 이 티셔츠를 입은 채 자신의 직장으로, 학교로 떠난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상처가 아무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언제 어디서나 수요시위’ 캠페인은 그렇게 시작됐다.
 

D3, 세 명의 여성 디자이너들로부터 시작된 변화

‘언제 어디서나 수요시위’는 매주 수요일마다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바라는 문구가 쓰인 티셔츠를 입고 하루를 보내는 캠페인이다. #forgetnever, #수요일엔수요시위, #peacethegirl 등의 해시태그와 함께 인스타그램에는 티셔츠를 입고 각자의 수요일을 지낸 이들의 사진과 코멘트가 가득하다. 더불어 민주당 진선미 의원과 K팝스타5 준우승자 안예은 씨의 사진도 보인다. 크라우드 펀딩(crowdfunding, 소셜미디어나 인터넷 등을 통해 대중으로부터 자금을 모으는 투자 방식) 사이트를 통해 이뤄진 이 캠페인은 후원자들이 각자 가능한 만큼 후원금을 내되 일정 금액(3만9,000원) 이상을 기부하면 티셔츠를 보내주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지난 1월과 4월, 약 한 달씩 진행된 두 차례의 캠페인 기간 동안 모두 5,600만원, 티셔츠로 치면 2,000장 어치의 후원금이 모였다. 1,000명 가까이 되는 후원자가 만들어낸 금액이다. 시민단체나 대형 재단이 주도한 것일까 싶지만 이것은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는 3명의 디자이너들이 만들어낸 결과다.

▲ 3명의 ‘언제 어디서나 수요시위’를 진행하고 있는 3명의 여성 디자이너는 얼굴과 신분은 밝히지 않는 채 본인들을 D3로만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다. 프로필 사진도 뒷모습만 나오게 찍었다. [사진 제공=D3]

D3'라는 이름으로 캠페인을 이끈 이들은 같은 회사를 다니고 있는 3명의 젊은 여성 디자이너들이다. Designer의 D, 3명의 3을 합해 D3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캠페인에 있어서만큼은 '회사원 OOO'이 아닌 'D3’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며 이름도, 나이도 밝히지 않았다. 후원자들에게도 자신들이 세 명이고 여성이며 디자이너라는 것만 소개했다. D3는 평소 회사에서 디자인이 가질 수 있는 사회적 의미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사회 이슈에 대해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며 디자인을 통해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들을 찾아 나섰다. 그때부터였다. 이들의 머릿속엔 대학을 졸업한 후 잊고 살던 위안부 문제가 아직까지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는 문제의식이 피어났다. 1965년 체결된 한·일 협정을 빌미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가적, 법적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과 하나 둘 작고하시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지켜보며 이들의 고민은 깊어져갔다. 가끔은 회사에 휴가를 내고 수요시위에 참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이들을 찾아온 것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뿐이었다. 그러던 작년 12월 한·일 협상에서 위안부 문제 합의가 이뤄졌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피해자의 의견이 가장 중요한데 그게 없는 협상이었어요. 아무리 일본 정부가 사과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여성들이 일본군의 성노예가 됐던 역사가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라도 이 역사를 기억하고 반복되지 않게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디선가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일 테니까요.”


수요일엔 ‘언제 어디서나 수요시위’ 티셔츠를 입자

▲ 2016년 1월 진행된 ‘언제 어디서나 수요시위’ 1차 캠페인 당시 제작된 맨투맨 티셔츠 상세 사진 [사진 출처=텀블벅 ‘언제 어디서나 수요시위’ 후원 페이지]
▲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언제 어디서나 수요시위’ 티셔츠 인증샷 [사진 제공=인스타그램 아이디 greenmiggi]

더 이상 행동을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이들은 작은 모금활동을 기획했다. 후원자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담아 자신들이 직접 디자인한 선물을 돌려주고자 했다. 티셔츠는 누구나 편하게 입을 수 있으면서도 그 안에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을 수 있기에 1,000명에 이르는 후원자들을 위한 보답으로 적합했다. 1월에 시작한 1차 캠페인에서는 긴팔 맨투맨을, 4월 2차 캠페인에서는 반팔 티셔츠를 제작했다. 티셔츠 한가운데에는 수요시위에서 만난 위안부 소녀상 작가가 제안한 문구, ‘Peace, my wish for the girl(평화는 소녀들을 위한 나의 바람)'을 새겨 넣었다. 젊은이들의 감각에 맞춰 색상도 흰색과 검은색, 파스텔톤 분홍색으로 준비했다. 분홍색 맨투맨은 K팝스타 5의 준우승자 안예은 씨가 방송에 입고 나온 직후에는 주문이 폭주하기도 했다. 

이들이 발로 뛰는 모습에 지인들도 하나 둘 팔을 걷어붙였다. 사진촬영을 위한 모델이 되어주고 SNS에 캠페인을 홍보해주기도 하는 등 다들 자기 일처럼 나서서 도와줬다. 덕분에 패션 화보 못지않은 사진들을 찍을 수 있었고 이는 단번에 젊은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2차 캠페인 당시 티셔츠 모델로 활동한 천선우 씨(24)는 “사진을 예쁘게 찍어주셔서 나중에는 모델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웃음) 생각보다 티셔츠가 예뻐서 저도 사서 입고 다녀요”라고 말한다.  

▲ 2016년 4월 진행된 ‘언제 어디서나 수요시위’ 2차 캠페인 포스터 [사진 제공=D3]

“처음 목표액은 400만원이었어요. 사실 400만원도 많다고 생각했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도 ‘이게 될까?’, ‘한 명도 사지 않으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많았어요.”

회사와 동료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회사를 다니고 있는데 이곳이 개인 활동에 관대한 편은 아니에요. 개인 활동은 항상 조심스럽죠. 처음엔 캠페인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도 없어서 일부러 알리고 다니지 않았어요.” 몇몇 지인과 가족들만 D3의 실체를 알고 있는 셈이다. 
 

모금액 5,600만원, 돈 이상의 의미

이들의 걱정과는 다르게 캠페인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1차 캠페인은 목표금액의 7배를, 2차 캠페인은 3배에 가까운 금액을 모았다. 후원자들은 이들의 이야기에 주목했다. 수요시위에서 돌아오는 길엔 항상 부끄러움뿐이었다던 진심어린 경험담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 후원자 자신들도 직장 때문에, 공부, 육아 때문에 수요시위에 참가할 수 없던 사람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용기가 없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지 못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대학생 유정원 씨(21)에게는 티셔츠를 입은 것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수요시위에 참가하는 게 ‘시위’라는 이름 때문에 조금은 거부감이 들었어요. 그런데 티셔츠를 입기 시작하며 한 번, 두 번 시위에 기웃거리다보니 새삼 별 거 아니더라고요. 요즘은 시간 될 때마다 시위에도 참가하고 있어요.” 

후원금 총 5,600만원 중 티셔츠 제작비용 등을 제외하고 2,600만원이 남았다. 이 돈은 두 번에 걸쳐 전시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나비기금과 위안부 피해자 복지 및 지원을 위한 정의기억재단 준비위원회에 기부됐다. 그리고 지난 6월 9일, 정의기억재단은 시민들의 응원 속에 위안부 문제의 제대로 된 해결과 역사의 정립을 위한 첫 걸음을 내딛었다. 정의기억재단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기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앞으로 피해자 복지 지원사업 및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 아동 지원 사업 등을 펼쳐갈 계획이다.

“평범한 이들이 함께하면 큰 힘을 낼 수 있어요.” 그녀들의 눈빛엔 평범한 사람들이 만드는 힘에 대한 믿음이 묻어났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위안부 문제는 나에게도, 너에게도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던 일이에요. 우리 모두가 각자 책임감을 가지고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앞으로도 위안부 티셔츠를 만들 것이냐고 묻는 질문엔 “앞으로의 계획은 구체적으로는 정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힘이 닿는 데까지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저희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희망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많은 사람들이 뜻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할 테니까요.” 

이들의 티셔츠가, 기부금이 위안부 문제 해결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티셔츠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함께할 용기를 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위안부 문제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1,000여 명이 모여 혼자서는 할 수 없던 일을 해냈다. 평범함의 힘이야말로 앞으로도 계속될 제2, 제3의 ‘언제 어디서나 수요시위’가 기대되는 이유다. 어쩌면 지금도 어디선가 또 다른 보통의 누군가는 용기를 낼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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