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독립 연구가 정준호 씨를 만나다

2015 노벨생리의학상은 ‘기생충·말라리아 치료제’ 연구에 기여한 아일랜드의 윌리엄 C. 캠벨, 일본의 오무라 사토시 그리고 중국의 투유유가 수상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전염병은 동물은 물론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심각한 보건의료 문제”라며 기생충과 말라리아 퇴치에 기여한 이들 연구진에게 노벨상을 수여한 배경을 밝혔다. 기생충은 인류의 건강에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생충은 혐오스럽고 기피해야만 하는 대상이지만 낯설게만 느껴지는 기생충을 공부하고 사랑하는 이가 있다. 바로 기생충 독립 연구가 정준호 씨(31)다. 

정 씨는 생존, 진화, 질병, 전쟁 등의 인간의 역사를 함께 겪은 기생충의 이야기를 담은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2011)를 저술했으며 말라리아를 소재로 인간, 사회 그리고 기생충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말라리아의 씨앗>(2014), 에볼라와 에이즈 등 인류를 괴롭히는 전염병과 더불어 새로운 바이러스의 이야기를 담은 <바이러스 사냥꾼>(2015) 등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아프리카 스와질란드에서 의료봉사를 하며 과학 뉴스 전문 웹진인 한겨레 사이온스온에서 ‘아프리카에서, 살며 배우며’라는 제목으로 아프리카에서의 에피소드를 연재했다. 정 씨는 서울 마포구 연남동의 ‘제너럴 닥터 의원’에서 일반의로 활동 중인 정혜진 씨, 아나운서 문희정 씨 그리고 이인형 서울대 수의대 교수와 함께 팟캐스트 ‘기생충 펀팩트’라는 방송을 만들고 있다. 

▲ 정 씨가 기생충학 공부를 시작하는 계기가 된 기생충 화보집. (사진 ‘정준호’ 제공)

정 씨는 대학 시절 기생충과는 다소 거리가 먼 분자생물학을 전공했다. 동물들의 분화 과정을 통해 진화 과정을 이해하는 동물분류학 수업에서 다양한 무척추동물 기생충을 처음 접하게 됐다. 기생충에 흥미가 생겨 학교 도서관에서 기생충 화보집을 찾아본 것이 본격적인 기생충과의 만남이었다. “온갖 기묘한 기생충 사진들을 보며 사랑에 빠졌죠. 외모를 보고 반하게 됐어요.”

학문으로만 보던 기생충, 실제로 보니 달라

기생충 전문가인 정 씨는 영국 런던대학교 위생열대의학대학원에서 기생충학 석사 과정을 마친 후 살아있는 기생충을 보기 위해 아프리카 스와질란드로 의료봉사를 떠났다. 정 씨는 책에서만 보던 기생충을 직접 접했을 때 그 느낌은 매우 달랐다고 한다. “실제 현장에 가보니 지금까지 공부했던 것들이 쓸모가 없어진 기분이었습니다. 세상에 보탬이 되는 연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었던 거죠.” 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들이 많지 않았다. 학문을 공부할 때에는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기술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들 중 아프리카 스와질란드에서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낙후된 지역이나 소외된 계층을 배려하는 적정 기술에 대한 탐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씨는 연구실에서만 이뤄지는 기생충 연구 풍토가 현실과의 괴리를 키웠다고 말한다. 제국주의 시절 영국은 자국은 핵심 식민지였던 인도 아대륙 등 열대지역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기생충 문제를 비롯한 열대 질병 해결에 집중했고 19세기 말 ‘열대의학’이라는 학문분야가 탄생했다. 식민주의 시대가 막을 내렸지만 열대의학 연구에 대한 국가적 예산지원 및 시설투자는 끊기지 않으면서 열대의학이 현실과 괴리된 연구실 속 학문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정 씨는 아프리카 의료봉사에서 열대의학의 역사적 배경과 열대질환의 발생 원인이 구조적 폭력, 소외 그리고 불평등한 세계 경제 시스템 때문이라는 것을 배웠다. 과학과 의학은 가장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향해야 한다는 점 역시 깨달았다. 학교에서 통계자료 분석 방법, 기생충의 생물학적 특성과 진단법, 질병 관리와 박멸 사업 방식 등을 공부했지만 현실에서는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는 현장에서 비로소 배운 것이다. 정 씨는 실제로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스와질란드 행은 잘한 결정이었다고 꼽으며, 이곳에서의 경험이 학문을 위한 기생충 연구보다는 사람을 위한 기생충 연구를 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줬다고 평가했다. 

▲ 아프리카 스와질란드에서 의료봉사를 하던 2011년 당시 정준호 씨의 모습. 현지 어린이들에게 장내 기생충 약을 배포하고 있다. (사진 ‘정준호’ 제공)

정 씨는 스와질란드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탄자니아에서는 NGO와 함께 ‘소외열대질환(주혈흡충) 관리사업’에 참여했다. 기생충 검사 및 투약, 기생충 감염 예방 교육, 식수 개발 등을 진행하는 사업이었다. 학문으로 그치지 않고 사회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만든 소중한 경험이었다. 


낯설게만 느껴지는 기생충

1969년부터 전국적 규모로 시행된 기생충 구제 사업 덕분에 한국인들에게 기생충은 낯선 존재가 됐다. 일선 학교에서는 채변검사를 통해 학생들에게 기생충을 박멸하는 회충약을 나눠줬고 학생 장내기생충 감염률이 0.02%로 떨어진 1995년까지 이 사업은 계속됐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에서는 기생충을 찾아보기 힘들다. 기생충 연구자들은 기생충이 있다는 연락을 들으면 사정을 하며 기생충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기생충이 흔하지 않다고 한다. 

기생충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길고 가느다란 모양이다. 기생충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본다고 하더라도 영화나 TV 프로그램 등을 통해 길고 가느다란 기생충을 주로 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정 씨는 기생충은 흔히 말하는 회충, 편충, 십이지장충(구충)과 같이 인간의 몸을 벗어나서는 생존할 수 없는 종류뿐만 아니라, 다른 세포 안에서 유전자 복제 시스템을 훔치지 않으면 번식이 불가능한 바이러스, 그리고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아 대신 키워주는 뻐꾸기까지 다양한 생물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기생충은 다른 생물에서 에너지를 얻지 않고는 생존과 번식이 불가능한 생물들을 일컫죠.” 


혐오스러움의 대명사 기생충, 우리가 알지 못했던 역할

사람들은 기생충이 숙주에 들어가 영양분을 몰래 가져간다는 사실 때문에 기생충을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정 씨는 세상에 나쁜 생물은 없다고 말한다. 생물들은 언제나 생존과 번식을 위해 경쟁해왔고, 그것이 바로 진화의 원동력이었다. ‘기생’이라는 전략은 경쟁에 사용되는 전략 중 하나일 뿐이다. “인간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나쁘다는 가치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좋은 생물’과 ‘나쁜 생물’로 분류하게 된다면 실제 생태계에서 생물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생존하며 진화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기생충은 진화와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기생충이 제대로 연구되지 않고 박멸의 대상으로만 여겨졌기 때문에 ’나쁘다‘는 꼬리표가 붙었다. 정 씨는 이런 인식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전체 생태계 관계망 중 40% 이상이 기생충으로 얽혀 있습니다. 기생충을 약으로 쓸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제시되고 있으니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 씨는 기생충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는 인간의 심리적인 방어 기제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감염성 질환에 역겨움이나 혐오를 느끼는 것은 예방 차원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최근 진행된 위생가설 연구에 따르면 기생충 감염이 오히려 건강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타난다고 한다. 기생충이 갑작스럽게 인간의 몸에서 사라지면서 면역계가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이상반응이 일어난다는 ‘위생 가설’이다. 실제로 알레르기, 천식 등 면역계 이상으로 발생하는 자가면역질환이 유행하는 지역은 기생충이 박멸된 지역이라고 한다. “이 ‘위생가설’을 역으로 이용해 자가면역질환을 치료하려는 시도로 기생충을 일부러 감염시켜 알레르기 등을 치료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초기 연구에서 상당히 높은 성공률을 보였습니다.” 기생충은 우리가 알던 바와 달리 ‘착한’ 아이들이었다.


기생충은 사랑입니다

정 씨는 기생충이 살아가는 방식이 신기하고 놀라울 때가 많다고 한다. 깊은 심해부터 극지방, 사막, 대평야 등 생물이 살아가는 곳에는 언제나 기생충이 있다. 기생충은 한마디로 적응의 달인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진화를 통해 세상의 모든 생물들을 자신의 집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남에게 빌붙는다고 ‘잉여의 대명사’라고 비아냥거리지만, 사실 기생충은 끊임없는 변화와 적응의 산물이라고 기억해야 합니다.”

특별히 애착 가는 기생충이 있냐는 질문에 정 씨는 기생 생활을 하는 모든 생물은 신기하고 사랑스럽다고 답했다. “기생충은 사랑입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나요”라고 말하며 기생충에 대한 넘치는 애정을 표현했다.


낯선 분야이지만 인류를 위해서는 꼭 있어야 할 학문

정 씨는 기생충학이 비교적 낯선 학문이기 때문에 전공자들이 많지 않아 처음 진학 상담을 요청할 때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씨는 기생충학이야말로 미래에 더 꽃을 피울 학문이라고 믿는다. 아직 연구되지 않은 기생충이 많고 기생충에 대한 연구가 깊어질수록 생태계나 건강, 보건 등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기 때문이다. 탐구할 분야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그만큼 가치가 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외하고도 기생충은 분명히 매력적이고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생물이다. 그는 기생충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이 줄어 기생충을 공부하고 탐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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