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민, 나와"
수영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코치 선생님의 목소리에, 갸름한 얼굴 하나가 물 밖으로 빼꼼이 고개를 내밀었다. '일인자, 최고봉'이라고 하면 으레 느껴지는 거리감과 긴장감. 그러나 '한국 배영의 일인자'로 불리 우는 19살 최수민 선수에게선 아직은 앳띤, 소녀다운 수줍음이 묻어 나와 오히려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수영 선수 최수민'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방콕 아시안 게임. 최수민 선수는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배영 100 미터 한국 신기록을 세우며 동메달을 따냈다. 그러나, 1,2,3 등의 순위가 매겨지고 3등보다는 2등이, 2등보다는 1등이 스포트 라이트를 받는 현실에서 최수민 선수는 당시 접영에서 금메달을 따낸 조희연의 빛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10월 18일 막을 내린 전국 체전에서 100 미터에 이어 배영 200 미터에서도 한국 신기록을 세워 한국 배영 1인자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며, 그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최수민은 전국 체전을 마감하며 행해진 기자단의 MVP 선수 투표에서 신기록 3개를 수립하며, MVP로 선정된 역도의 김태현 선수와 끝까지 경합을 벌이기도 했다.

보통의 고등학생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평범함. 그 평범함 속에 감춰진 수영에 대한 열정과 투지, 신기록에 대한 도전. 만화 '러프'의 주인공 '야마토 케이스케'는 이러한 점에서 최수민 선수와 닮아있다. 에이센 고등학교 2학년 수영부 야마토. 서울 체육 고등학교 3학년 최수민. 부드럽고 여린 감성 속에 강한 의지를 담고 노력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남자와 여자라는 차이에도 그다지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엔 자족적이고 체념적인 듯 하지만, 만년 3위에서 벗어나 히로끼의 전국 기록을 깨기 위해 고군 분투하는 야마토는 따뜻한 감성을 지닌 인물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새롭게 사귀게 된 친구들 - 차가운 듯 하지만 누구보다 속 깊은 야구 선수 오가타, 다혈질의 정의파인 수영부의 세끼, 언제나 편한 친구인 투포환 선수 쿠메, 그리고 원수에서 애틋한 마음의 대상이 된 다이빙 선수 아미. 이들과의 진실한 우정과 사랑을 바탕으로 전국 신기록의 꿈을 키워가는 야마토의 이야기는 만화 속에 부재하기 쉬운 섬세한 심리 묘사로 많은 만화 매니아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바 있다.

최수민 역시 중학교 때까지는 큰 빛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경기여고를 다니다 좀더 집중적인 훈련을 위해 서울체고로 전학했고, 국가대표로 발탁돼 지난해 8월 태능 선수촌에 입성했다.

수영을 처음 시작한 것은 7살 때. 지금의 모습으로선 상상이 안되지만 살을 빼기 위해 스포츠 센터의 아기 스포츠단 수영부에 등록한 것이 발단이 됐다. 그 때 코치의 눈에 띄어 수영을 계속하게 되었고,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최수민, 나와"를 외치던 그 코치가 바로 최수민 선수를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10년 가까이 지도해 주고 있는 선생님이다.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날 때도 많지만, 세월이 쌓인 만큼 정(情)도 두텁게 쌓여 있다.

주중엔 태능 선수촌에서 생활하는데, 오전에는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오후엔 다시 선수촌으로 돌아가 훈련을 받는다. 일요일도 없이 주말엔 서울체고 수영장에서 훈련을 한다. 아침에 2시간 여 동안 6000 미터 가량을, 오후엔 2시간에서 3시간 반 동안 8000 ~9000 미터를 수영한다. 주위에선 고된 훈련에 고3 수험 생활까지 겹쳐 "힘들지 않아요? 공부만 하는 친구들이 부러울 땐 없어요?"란 말들을 하지만 좀처럼 "힘들어요"라는 말은 꺼내지 않는다. "글쎄, 어느 한 가지만 해 본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수영을 안 하고, 공부만 했다고 하더라도 그 땐 그 때대로 힘든 점이 있을 것 같아요." 여전히 수줍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지만 나름의 신념과 당참이 느껴졌다.

훈련 자체보다도 최수민 선수를 힘들게 하는 것은 기록이 향상되지 않을 때다. 결과가 좋지 않고 기록이 향상되지 않을 땐 '그만 두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세운 기록을 자신이 깨기를 반복, 최근 2년간 7개의 신기록을 수립한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강한 승부 근성으로 땀흘려 연습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 만큼 기록이 향상되고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시상대에 섰을 때요? 으음~ 이제까지 훈련했던 모습들이 다 떠오르고, 가슴 벅차게 보람을 느끼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욕도 막 생기구." 힘든 훈련 속에서도 운동 선수들을 지탱시키는 힘이 바로 이러한 자기 발전에서 오는 보람과 의욕이 아닐는지.

야마토에게 세끼나 오가따, 쿠메 같은 든든한 친구들이 있었던 것처럼 최수민 선수에겐 동고동락을 함께 하는 같은 수영부 친구, 후배들이 있다. 힘든 순간을 함께 겪어내면 친해진다는 말이 있듯, 고된 훈련을 함께 받고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다보니 끈끈한 정이 싹틀 수밖에 없다. '한 팀' 이라는 연대 의식도 한 몫을 한다. 부모님들끼리도 터놓고 지내는 사이라 신문에 최수민 선수에 관한 기사라도 실리면 다른 부모님들까지도 모두 스크랩을 해서 가져다 주신다. 10년 가까이 선수 생활을 뒷바라지 해온 최수민 선수의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같이 보람을 느끼니까 기쁜 마음으로 해요. 내가 바라는 건 선수촌에서 좀더 과학적인 훈련이 이루어져서 수민이가 더 뻗어나가는 거죠" 라고 말했다.

선수촌과 학교를 오가는 바쁜 훈련과 경기 일정, 그리고 학과 공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그래도 시간이 날 때면 최수민 선수는 히치콕 류의 추리 소설을 읽는다. 시간이 없어 다른 여고생들처럼 자주 놀러 다니지도 못하지만 부러워하거나 아쉬워하는 빛은  별로 없었다. "앞으로는 대학에 진학해 운동과 함께 공부도 계속해보고 싶어요." 그는 '운동심리학'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선수 생활을 그만두게 되었을 땐,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며 취재하는 스포츠 전문 기자로 일하고 싶은 게 최수민 선수의 신세대다운 구체적이면서도 당찬 포부다.

최수민 선수의 지금 바람은 시드니 올림픽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는 것. 8강에 드는 게 목표다. 존경하는 선수를 물었더니 26차례 한국 신기록을 수립하고 이번 전국 체전에서 5관왕에 오른 이보은 선수를 꼽았다. "제가 이보은 선수처럼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는 데까지 열심히 해보고 싶어요." 반짝이는 눈매로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최수민 선수의 모습에서 또 하나의 신기록 수립이 예견됐다. 

 이혜원 기자<dewed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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