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에 좁쌀 같은 두드러기가 다닥다닥 올라왔다. 한참을 긁으니 500원짜리 동전만한 붉은 반점이 팔뚝을 뒤덮었다. 병원을 찾아 알레르기약을 받아왔지만, 간지러움에 사흘간은 잠을 설쳤다. 유통기한이 일 년도 더 지난 근육통약을 먹은 뒤 일어난 일이었다. 복용할 당시 약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시각장애인 이대규 씨의 이야기다.
 
시각장애인들은 약을 오남용하는 경우가 잦다. 2014년, 서울시가 시각장애인 165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시각장애인 4명 중 1명이 의약품을 잘 못 사용한 경험이 있었다. 약품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표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사고로 한쪽 눈을 잃고 의안을 착용하는 표기철 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며칠 전 표 씨는 눈이 빠질 듯한 통증을 겪었다. 그는 인공눈물을 넣기 위해 안약 네 개를 몇 번이고 만져봤다. 고민 끝에 고른 약은 의안인 반대쪽 눈에 넣는 세척제였다. 한 방울 떨어뜨리자마자 눈 전체에 쓰라림이 퍼졌다. ‘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는 하루 세 번 안약을 쓰지만, 그때마다 마음을 졸인다. 표 씨는 “안약 때문에 충혈이 안 된 날을 찾기 힘들 정도다”라고 말했다. 
 
활동량이 적어 고혈압이나 당뇨병을 많이 앓고 있는 시각장애인들에게 이러한 위험은 더 크게 다가온다. 5년 전, 당뇨를 앓고 있던 안철호 씨는 약을 잘 못 복용해 자칫하면 큰일이 날 뻔했다. 그는 매일 먹어야 하는 당뇨약 대신 간장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운동과 식이요법에도 줄지 않는 혈당 수치 때문이었다. 안 씨는 병원을 찾고 나서야 다른 약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담당 의사는 “장기적으로 이런 일이 발생할 경우 장기나 신경파괴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말을 전했다.
 
오남용이 걱정돼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아예 약을 사용하지 않는 시각장애인도 많다. 이연자 씨는 약을 쓰고 나면, 약국에 가져가 폐기처분한다. 이 씨는 “불편하지만 잘못 복용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양다희 씨는 “가족이 와서 약을 구별해주기 전까진 아파도 약을 먹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시각장애인을 위한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다. 약사법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하여 제품에 점자표기를 병행할 수 있다’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점자표기가 되어있는 의약품은 10여 종에 불과하다. 의무사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읽기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시각장애인 이강호 씨는 “대다수 의약품은 점자가 있어도 뚜렷하지 않아 읽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서울시는 복지관과 맹학교 근처의 약국 47개에 점자스티커 배부 사업도 진행했으나 효율성은 없었다. 스티커 배부는 한차례에 그쳤고, 이를 사용한 곳도 거의 없었다. 지난 5일 봉천구의 약국 6곳을 조사한 결과 6개 약국 모두 “실용성이 전혀 없었다”고 응답했다. 심지어 “한 번도 사용한 적 없어 약국 구석에 아직 있다”고 밝힌 약사도 있었다.
 
시각장애인들은 “대다수가 읽지 못하는 점자표기 대신 바코드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2014년 보건복지부의 조사에 따르면 94%의 시각장애인은 점자를 읽지 못한다. 지난해 7월 발의되었지만, 아직 통과되지 못한 ‘안전 상비 약품 점자 표기 법안’이 시행된다고 해도 큰 효율성이 없다는 뜻이다. 스마트폰을 쓰는 김택곤 씨는 “점자는 못 읽어도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각장애인들이 많다”며 바코드 사용을 추천했다. 이대규 씨는 비슷한 앱이 있다며 보여줬다. 그는 불빛이 들어오지 않는 액정을 눌러 음성을 듣고 앱을 실행시켰다. 이어 그가 미리 녹음해둔 라벨에 카메라를 갖다 대자 ‘감기약’이라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바코드를 통해 약품명이나 복용법을 확인할 수 있다면, 약을 잘 못 복용해 고생하는 시각장애인이 훨씬 더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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