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범(78) 씨는 오전 9시까지 서울 노원구 상계 9동에 위치한 주공아파트 14단지 경로당에 출근한다. 이곳은 나이 제한으로 그만두게 된 아파트 경비원에 이어 재취직한 직장이다. 이 씨는 ‘실버택배’라고 적힌 남색 조끼를 위에 걸쳐 입었다. 오전 10시부터 본격적인 일이 시작됐다. 한진, 현대, 동부, KGB, 로젠이 차례로 물건을 실어왔다. 오후 2시에는 CJ 대한통운 트럭이 도착했다. 물량이 적으면 두 명, 많으면 세 명이 짐을 내렸다. 이 씨를 비롯한 나머지 노인들은 주머니에서 돋보기안경을 꺼내 썼다. 머리가 희끗한 택배원들은 천천히 일어나 수동 레일 위로 올라오는 박스들을 살폈다. 앞에서 택배를 내릴 때마다 ‘ㅇ단지 ㅇ동’이라고 외쳤다. 이 씨는 자기 구역 택배가 오자 가져가 한쪽에 쌓아뒀다. 40분이 지나자 트럭이 비었다. 그는 구석에 앉아 상자에 적힌 주소를 다시 확인했다. 그 옆에 또박또박 큰 글씨로 동호수를 적었다.

이 씨는 손수레에 12단지 택배를 3, 2, 1동 역순으로 실었다. 1동부터 배달하면서 생겨난 노하우다. 택배는 한 손으로도 들 수 있는 머리끈부터 부피가 큰 10kg짜리 강아지 용품까지 다양했다. 그는 익숙한 몸짓으로 검은색 고무줄을 잡아당겨 물건들을 고정했다. ‘택배 수결 대장첩’이라고 적힌 장부도 챙겼다. 준비를 마친 그는 웬만한 젊은이보다 빨리 걸었다. 1동 앞에 도착하자 그는 손수레에 싣고 온 끌차를 내려 해당 택배를 옮겼다. 배달은 가장 위층인 10층부터 시작됐다. 그는 “택배요!!”라고 외친 뒤 문을 세 번 두드렸다. 빈집이면 물건을 다시 실은 후 대장에 ‘경비’라고 적었다. 주인이 받지 못한 택배는 경비실에 맡겨졌다. 이 씨가 오늘 맡은 택배 개수는 약 60개였다. 일당 3만 원이다.
 

실버택배, 아파트를 거점으로 한 노원구와 은평구

고령화 시대에 다양한 노인 일자리가 생겨나고 있다. ‘서울시 어르신 취업훈련센터’에 소개된 일자리만 해도 바리스타, 문화해설사, 사서 도우미, 배달원 등 전부 94개다. 이중 실버택배는 서울시가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노인 일자리 사업 중 하나다. 지난 10월, CJ대한통운과 서울시는 ‘시니어 택배 협약’을 체결했다. 기존에 있는 지하철 실버택배와 달리 인근 주택가나 아파트에 거점을 둔 형태다. 현재 아파트에서 운영되는 실버택배는 서울의 경우 은평구, 노원구 두 곳에서 진행 중이다. 노원 실버택배는 2010년 1월, 은평구 실버택배는 2014년 12월부터 시작됐다.

노인들이 택배 배달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뭘까. 이를 기획한 이승희 노인회장(80)은 “노인도 일할 수 있으면서 주민에게도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다가 생각해냈다”며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첫해에는 적자 500만 원, 직원 6명이었다. 그러다 2011년부터 각자 매달 15만 원씩 구청에서 주는 지원금을 받았다. 대한노인회 노원구지회도 도왔다. 노원 실버택배는 2011년 한진과 제휴를 맺으며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 2013년 CJ와 계약했고 얼마 뒤 현대, 동부, KGB, 로젠과도 거래하게 됐다. 현재는 한 달 수익이 1500만 원, 일하는 직원도 23명이다.
 

실버택배원·고객·택배사 모두 만족

실버택배로 사용되는 공간은 30평 남짓이다. 만 65세가 넘는 스무 명의 노인이 5280세대를 맡아 택배를 배달하고, 세 명은 사무실에서 일한다. 택배 1건당 해당 회사로부터 수수료 약 650원을 받는데 500원은 택배원에게, 나머지는 관리비로 사용된다. 노인회장은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다”며 “택배량이 가장 적은 월요일에는 2~3시, 가장 많은 화요일에는 오후 9시에도 끝난다”고 말했다. 실버택배원들은 오전 배달이 끝나면 경로당 식당에 모여앉아 점심을 함께 먹는다. 격일(월, 수, 금)로 식사를 준비하는 이복래(76) 씨는 택배원들이 잡아온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였다. 그녀는 “나도 노인 일자리로 한 달에 20-30만 원을 받는다. 집에서 계속 쉬어도 힘드니까 나와서 뭐라도 하는 게 낫다”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실버택배원은 각자 자신의 체력에 맞는 택배 수를 정한다. 80세 이상 고령 노인은 20~30건을 배달하고, 비교적 젊은 70대는 하루에 70~80건을 맡는다. 그렇게 한 달 동안 구슬땀을 흘리고 나면, 각자 계좌에 일한 만큼의 액수가 입금된다. 월급은 한 달 평균 약 60만 원이다. 직원들은 입을 모아 직원들은 입을 모아 “집에만 있었던 때보다 일할 수 있는 지금이 훨씬 좋다”고 얘기한다. 실버택배를 이용하는 주민도 만족을 표했다. 14단지에 거주하는 이숙순(53) 씨는 “처음에는 노인분이 오시길래 괜히 어색하고 죄송스럽기도 했지만, 계속 뵙다 보니 익숙해졌다”며 “실버택배원이 더 편하고 안전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실버택배와 거래하는 택배사도 흡족해 했다. 한진 택배기획팀 이진우 사원은 “기존에는 택배 기사 한 명이 아파트 전체에 배달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며 “실버택배는 물량 처리가 빠르고 수월해 배달시간을 아낄 수 있다”고 말했다. CJ대한통운 관계자 또한 “일반 택배가 가기 힘든 지역에 유용하다”고 전했다.
 

무게와 상관없는 수수료, 감정노동, 미지근한 지원 개선돼야

고객, 직원, 거래처 모두 만족하지만 개선돼야 할 점도 분명히 있다. 첫째는 무게와 크기에 상관없는 동일한 수수료다. 원칙상 택배 무게는 20kg 미만으로 제한돼있지만, 간혹 이를 넘어도 반송하지 않는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저층아파트에 낑낑거리며 올라가도 건당 500원으로 액수가 똑같다. 실버택배원과 매일 마주치는 한 경비원은 “그게 말이 되느냐”며 “따지면 최저 시급도 안 될 것”이라 말했다. 

두 번째는 감정노동이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노인들은 하루에 2~3명의 독설을 듣는다. “나이 들면 집에나 있던가”라는 폭언은 약한 편이다. 이승희 노인회장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할머니 한 명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한 달 만에 그만뒀다”고 말했다. 직접 보니 사무실에 일손이 부족해 택배원 한 명이 일손을 돕고 있었다. 그는 처음 사용하는 엑셀에 당황해 외부 운전기사에게 사용법을 묻기도 했다.

마지막 문제는 중단된 정부 지원금이다. 2011년부터 지급돼온 지원금이 올해부터 중단됐다. 대한노인회 노원구지회 박수현 센터장은 “2016년부터 노인 일자리사업이 공공사업에서 근로자로 개정됐다”며 “기관도 세금을 납부하도록 바뀌었기 때문에 실버택배 지원서를 구청에 제출한 복지관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에 등장한 대안은 협동조합이었다. 현재 아파트 실버택배는 노원구청에 협동조합 설립신고를 마친 상태다. 그러나 지원금 수혜 여부는 아직 미지수다. 노원구청 일자리 경제과 김영락 주무관은 “지원금은 관공서 대신 정책적인 방향을 실천하거나 지역사회 문제를 덜어준다는 판단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2013년부터 CJ대한통운은 공유가치창출(CSV) 모델로 실버택배를 운영하기 시작해 현재 전국에 70여 개의 거점을 두고 있다. 현대로지스틱스도 지난 12월부터 수도권에 발을 디뎠다. 인천시도 올해부터 인천실버종합물류사업으로 실버택배에 힘을 실었다. 실버택배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이 시점에 노인 일자리가 진정한 노인 복지로 거듭나기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승희 노인회장은 “현재 함께 일하는 노인들에게는 실버 택배가 인생의 마지막 직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실버택배원 이 씨와 하루 배달을 끝내고 경로당에 돌아오며 대화를 주고 받았다.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씩 웃으며 빈 손수레를 끌었다. “힘든 건 잠깐이야. 자식한테 손 벌리지 않아도 되니까 마음이 편해. 그리고 올해 10월에 우리 손자가 제대하는데 고생했으니까 용돈도 좀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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