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란 서울시 전 인권위원장, 중앙일보 여성전문기자 인터뷰

“어떤 인권 문헌이 그 시대의 야만성으로 인해 휴지조각이 되었다고 하자. 그렇다 하더라도 그 인권문헌은 인권이 진보했다는 하나의 증거로 볼 수 있다.”

문경란(57) 서울시 전 인권위원장은 ‘서울시 인권헌장 선포 무산’ 사태에 대한 소감을 묻자 “인권의 역사는 폭풍이 인정사정없이 휘몰고 지나간 폐허를 몇 개 남은 등불에 의지해 더듬더듬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라는 인권연구자 미셀린 이사이의 말로 대신했다. 2015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의 날'에 맞춰 시민들의 손으로 직접 만든 인권헌장을 선포하겠다던 서울시의 약속은 물거품이 됐다. 인권헌장에 명시된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 항목이 문제가 됐다.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을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에 대해 일부 기독교 단체와 동성애 혐오세력의 반대가 들불처럼 거셌다. 급기야 성소수자단체 활동가들이 서울시청 로비를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가는 사태도 발생했다. 이들은 로비 천장에 “성소수자에게 인권은 목숨이다”라는 대형 플래카드를 걸었다. 문 전 위원장은 서울시 인권헌장 사태의 쟁점과 소회를 담은 <서울시민인권헌장>(경인문화사)을 탈고한 뒤 크게 몸살을 앓았다고 했다. 15일 광화문 한 카페에서 문 전 위원장을 만났다. 일간지 기자 출신으로 오랫동안 일한 그의 이력에 대해서도 물었다. 

124인의 시민 127일의 여정

인권헌장 제정은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의 2011년 출마 당시 공약 중의 하나였다. 박 시장은 취임 후 약속대로 <서울특별시 인권조례>를 제정했고, 이 조례에 인권헌장 제정과 선포를 명시했다. “인권헌장 제정의 목적 중 하나는 시민이 스스로 인권의 주체임을 확인하고 자각하는 일”이기 때문에 시민의 직접 참여가 중요했다. 16세 소녀부터 78세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위원이 참가했다. 총 124명의 시민위원 외에 40명의 전문위원이 합류했다. 인권단체 활동가, 연구자, 서울시 의회의원 등이 포함됐다. 127일간의 작업이었다. 문 위원장은 “시민들이 주인이 되는 ‘시민참여모델‘이라는 의미가 있었는데 결국 선포되지 않아 매우 안타깝다”고 전했다. 그의 답변은 솔직담백했다. 그러나 서울시의 채택 여부와 관계없이, 시민의 지혜를 모아낸 인권헌장이 ’폐허 속의 작은 등불‘처럼 소중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을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인권은 햇살이다 … 인권 없이 단 하루도 살 수 없어

근대국가 탄생의 목적은 시민의 인권을 보장과 밀접하게 맞닿아있다. 우리 헌법 제10조는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명시했다. 문 위원장은 “인간이 존엄하게 사는 최소한의 권리가 인권이고 인권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고 강조했다. ‘햇살이 잘 들지 않는 그늘’에 놓인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에게 인권은 더욱 절실하다. 국가가 나서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을 확인하고 그에 기반한 정책을 추진해야하지만 박근혜 정권 들어 인권의식은 크게 후퇴했다. 문 위원장은 “인권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는 것 아닌가”라며 심히 우려스럽다고 덧붙였다.
 
문 전 위원장은 서울시 인권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지냈다. 그가 가장 열심히 추진한 일은 서울시에 인권행정을 도입하고 <인권정책기본계획>을 수립한 일이다. 특히 공무원들의 인권교육에 집중했다. 그는 공무원 인권교육의 ‘초석’을 쌓았다고 표현했다. 무려 4만 명을 대상으로 한 서울시 공무원 인권교육의 콘텐츠와 틀을 만드는데 힘을 쏟았다.
 

끊임없이 배우고 단련하는 기자의 삶

문 위원장의 삶에서 ‘인권’이 화두로 자리 잡은 이유가 궁금했다. 그녀는 대학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신입생이던 1979년 10.26 사태를 겪고 이듬해 광주항쟁이 터졌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사회현실이나 내 이웃의 가난하고 힘없는 우리 사회 소수자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대학시절'을 보냈다. 졸업 후 언니 집 근처의 지방지 신문기자 시험을 우연히 보고 기자생활을 2년 반 정도 했다. 기자생활에 큰 의미를 느끼지 못하던 중에 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과에 진학(85년)하게 됐다. “여성학이라는 새로운 안경을 얻은 시기”였다. 당시 한명숙 전 총리, 여성학자 오숙희, 현 여성신문사 사장 김효선 등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 인생에 제일 잘한 일이 여성학 공부한 일이라 느꼈다.
 
90년도에 중앙일보에 입사한 후 2008년까지 18년간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에 남성 주류의 역사인 HISTORY가 아닌 HERSTORY를 쓰려고 노력했다. 입사 초기인 90년대는 신문의 정치,사회,문화 등 모든 면에서 주류였던 남성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던 시절이었다. 여기자란 이유로 당연히 생활부에 배치됐다. 아이 딸린 아줌마 기자라는 이야기도 공공연하게 들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취약하던 때였다. 여성관련 뉴스는 요리와 생활과 관련된 기사가 거의 전부였다. 문 위원장의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새로운 뉴스 발굴을 위해 애를 썼다. 편집국 안에서 ‘남성 데스크’를 상대로 한 논쟁과 설득이 일상이었다. 나름의 사명감을 가지고 한국 여성문제의 주요한 의제는 거의 다 다루려고 했다. 성희롱, 성폭력, 가사노동의 가치, 여성노동의 임금차별문제, 열악한 고용환경, 모성보호, 보육문제, 일과 가정의 양립, 호주제 폐지 등의 이슈와 관련된 뉴스를 다뤘다. 여성이라는 마이너리티로 살았고 그러다보니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계속 생겼다. 소수자 관련 기사를 계속 쓰다 보니 시민사회에도 이름이 알려지고 전문성도 인정받았다. 2008년 국가인권위 상임위원으로 위촉되어 미혼모 학습권 보장, 스포츠인 인권에 대한 제도적 보장 등을 위해 일했다.
 
기자생활을 하면서도 기존의 관행을 극복하고 새로운 취재방식을 찾으려고 했다. 서울시청출입기자 시절엔 서울시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백페이지 정책보고서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 지하철 출퇴근길에 읽었다. “여성이 하면 뭔가 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문 전 위원장은 3월부터 서울시 정책연구기관인 서울연구원에서 마이너리티 연구를 진행한다. 기존에 주목하지 않던 새로운 소수자문제에 대해 체계적이고 다각적인 접근을 해 볼 계획이다. 한국의 난민 여성, 결혼이주자 가정 2세들, 가난한 예술가들의 열정 페이 문제, 니트족(NEET,일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무직자 청년) 등등. 한국사회 가장자리로 밀려나있는 또 다른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 방법을 고민하는데 힘 쓸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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