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40124

초코파이에 꽂힌 생일초 다섯 개를 훅 불어 끄고서 열 다섯 밤이나 지나버렸다. 작년부터 자전거를 사달라고 조르고 있었는데 엄마는 위험하다면서 들은 척도 안 했다. 이젠 뭘 사달라고 하지? 괜히 집안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녔다. 신문을 읽고 있는 아빠에게 다가갔는데 신문에 강아지 사진이 나와 있었다. 나만한 남자아이가 강아지를 끌어안고 있는 사진.


"아빠, 왜 강아지야?"
"음. 웬 강아지야? 라고 해야지. 애들 둘이서 얼음이 언 강 위를 걷다가 빠졌는데, 강아지가 멍멍 짖어서 구해줬대."

강아지가 멍멍 짖으면 물에 빠진 애들이 떠오르는 건갉. 자세히 들어보니 강아지가 마구 짖어대서 동네 사람들을 불러온 거였다. 빠진 아이들은 두 명인데 하나는 벌써 죽은 뒤였고, 강아지 주인만 살았다고 했다. 강아지의 이름은 똘똘이. 정말, 똘똘하게도 주인을 살려낸 기특한 강아지다. 갑자기 자전거보다 강아지가 좋아졌다! 나는 뭔가를 부탁할 때의 착한 말투를 쓰기 시작했다.

"아빠, 나도 똘똘이 같은 거 하나 사주세요."
"음? 강아지는 무슨…. 엄마한테 가서 말해봐라."
"엄마엄마엄마, 나 생일 선물로 강아지 하나 사줘요. 자전거 말구. 응?"
"왜 엄마한테 그래, 아빠한테 사달라고 그래!"
"아빠아… 강아지…"
"아, 이 사람이 왜 애를 자꾸 나한테 보내? 엄마한테 가봐!"
"엄마아∼"

엄마와 아빠를 왔다갔다 하다가 나는 제풀에 지쳐 잠이 들어버렸다. 비슷한 일이 전에도 많이 있었던 것 같은데….

# 19840312

"랄 랄라 랄랄라 랄라랄랄라∼ 랄 랄라 랄랄라 랄라랄랄라 파파 스머프∼"

언제나 방방 뛰며 따라 부르는 즐거운 스머프 노래! 가사도 음악도 너무너무 단순하다. 크기는 고만고만하고 색깔은 시퍼러둥둥한 스머프들이 꼬물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걸 보면 참 귀엽고 재미있다. 다들 비슷하게 생겼지만 이름만은 다양하게 파파 스머프, 스머페트, 사세트, 덩치, 허영이, 요리사, 똘똘이(강아지 이름과 같다! 그러나 다섯 살배기 꼬마의 세월은 빠르게 흘러 이미 까맣게 잊어버린 후), 재치, 욕심이, 투덜이, 자연이, 농부, 화가 스머프, 그리고 자연 어머니와 시간 아버지 등 열 손가락으로도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고민하는 것은 그 다음 순간이다. 개구쟁이 스머프와 호랑이 선생님, 꾸러기 합창, 요술공주 밍키 중에서 무엇을 봐야할지 정말 치열한 고민을 하게 된다. 시작하는 시간이 매일 같은 것도 아니고 항상 들쭉날쭉해서, 나는 잘 돌아가지도 않는 무거운 채널을 드르륵 드르륵 돌리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가 요즘 가장 좋아하는 것은 개구쟁이 스머프! 스머프를 펄펄 끓여서 황금으로 만들려는 악당 가가멜과 고양이 아즈라엘도 귀엽고, 폭탄 선물로 가가멜을 새까맣게 태워버리는 재치 스머프도 귀엽고, 혼자서만 빨간 바지를 입고 빨간 모자를 쓴 파파 스머프도 귀엽다. 똑같이 까만 양복을 입은 다 큰 어른들이 나와서 싸움질하고 바둥대는 뉴스나 드라마보다 개구쟁이 스머프가 훨씬 재미있다.

# 19840623

언제나 새우깡이나 초코파이만 있던 우리집 찬장에서 고급 과자를 발견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보니 빨간 포장지에 포키 비스킷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엄마가 모처럼 비싼 과자를 사오셨구나! 꺼내 먹으려는 일념으로 손이 안 닿는 찬장 옆에 덜걱거리는 의자를 놓고 올라섰다.

"안 돼 그 과자 먹지 마!"

깜짝 놀라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의자가 위험해서 그런 건가?

"그럼 엄마가 꺼내 주세요."
"아냐, 그거 어제 TV 보니까 잘못 수입된 거라더라. 독이 들었을지도 모른대. 어서 내려와."

작년에는 초코우유에 청산가리를 타더니 이번엔 비싼 과자에!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그 과자 일본산인데, 청산가리 탔다고 협박이 들어왔대. 수입될 때부터 이름만 슬쩍 바꿔서 변칙수입했다고도 하구…."

나는 변칙수입이 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과자를 못 먹게 되어서 너무나 서운했다. 오랜만에 신기한 과자를 먹어보나 했더니. 괜히 생소한 거 넘보지 말고 먹던 거나 먹으라는 건가보다. 딸기맛 산도나 한 상자 사달래서 크림을 발라먹어야지. 매일 먹던 거지만, 비스킷 두 쪽에 붙은 딸기 크림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

# 19841218

"여보, 오늘 새벽에 있잖아, 열아홉 살 남자애가 도둑질 하다가 경관한테 총 맞아서 죽었대."
"말하는 게 뭐 그렇게 잔인해 엄마는…."

엄마는 움찔 하더니 '얘 앞에선 말도 함부로 못 하겠네'라고 중얼거리면서 반찬을 얹은 밥숟가락을 내 입에 밀어넣었다. 말문이 막힌 나는 오물오물 밥을 씹기 시작했다. 원래는 백 번이나  씹어먹어야 한다고 아빠가 그랬지만 언제 밥을 다 먹는담. 열, 스물, 삼십, 오십, 팔십, 백. 꿀꺽.

"경관한테 들키니까 막 칼을 휘둘렀대."
"요즘 십대들 정말 문제야. 겁도 없이 사람을 죽이고, 도둑질을 해대질 않나."
"당신 때도 똑같은 얘기 듣고 자랐겠지 뭐…. 쟤도 십 년만 있으면 무서운 십대 소리 들을걸?"
"엄마 내가 무서워?"
"그럼, 자기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지."

 나처럼 얌전하고 착한 아이가 왜 무섭지? 하긴 밥을 백 번 씹어먹으라고 했는데도 나는 맘대로 백을 세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센 줄은 아무도 몰랐을 텐데….

 조혜원 기자<dewed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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