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뀌기 전에 점수 올리자” … 토익 응시생 몰려

지난달 31일 아침 9시, 송파구 가락고 토익 고사장은 배정된 교실을 찾으려는 수험생들로 북적였다. 입실 마감 시간이 가까워오자 학생들을 태운 택시들로 교문 앞이 혼잡해졌다. 학교 앞 모퉁이에는 차OO(송파구, 47세)씨가 시험 준비물을 팔고 있었다. 연필부터 지우개와 물, 따뜻한 캔 커피까지 작은 편의점을 방불케 했다. 차 씨는 “9년 동안 토익 시험장을 다니며 물건을 팔아왔는데 요 근래 수익이 쏠쏠하다”며 기자에게 웃어보였다. 왜 그런 것 같으냐는 질문에는 “글쎄요, 1월은 원래 (수험생이) 좀 적은데 희한하네”라며 고개를 갸우뚱 했다. 이 날 고사장은 27개 교실 모두 만실이었다. 수험생들은 원하는 고사장을 골라 미리 인터넷으로 접수해야 하는데 가락고는 신청자가 많아 일찌감치 마감됐다.

이유는 토익 시험 개정에 있었다. 지난해 말 토익 주관사인 ETS는 올 5월29일부터 시험 유형을 전면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2006년 이후 10년만이다. 수험생들이 토익이 바뀌기 전에 점수를 따놓으려고 시험장에 몰리고 있는 것이다.

▲(왼쪽) 지난달 31일 토익시험이 치러진 송파구 가락고 입구에서 시험 볼 교실을 확인하고 있는 수험생들. (오른쪽) 다른 날 응시자 명단을 확인하고 있는 수험생들 (오른쪽 = ybm한국토익위원회 제공)


ETS·학원가, 신(新)토익 특수 “쏠쏠”

가장 큰 변화는 듣기평가 파트3이다. 문제 수가 많아지고, 화자가 두 명에서 세 명으로 늘어난다. 기존에 없었던 시각정보 유형도 추가된다. 지문을 듣고 그래프나 도표를 해석하는 문제다. 대화체에서 자주 쓰이는 축약형 표현도 등장할 예정이다. 읽기평가도 완전히 달라진다. 기존에는 지문 2개를 연계해서 푸는 문제가 가장 고난도였지만 지문 3개를 엮어서 풀어야 하는 유형이 생긴다. 주어진 문장을 끼워 넣는 맥락 파악 문제도 추가된다.

ETS는 “시험 난이도에 변화는 없다”며 선을 그었지만 학원가는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신(新)토익 전(前) 마지막 기회’ 라며 앞 다퉈 패키지 강의를 내놓고 있는 것. 수강생 수도 늘어났다. YBM어학원 관계자는 1월 토익 강좌 수강생 수가 전년 동월 대비 10% 가량 늘었다고 밝혔다.

▲각 학원에서 내놓은 패키지 광고. ‘신(新) 토익 전 마지막 기회’ 라며 개정 전에 점수를 만들어놓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겨울방학인 1월 오전강의를 들으러 토익학원에 나온 학생들 모습

실제로 시험을 보는 인원도 늘었다. 한국 토익위원회에 따르면 1월 응시생 수는 작년 동월 대비 10% 가량 늘었다. 수험생들이 보통 1월에 공부를 시작하고 2월에 시험을 보기 때문에 1월은 연중 응시율이 가장 저조한 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시 인원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이다. 2월에는 더 많은 수험생들이 시험을 볼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토익위원회측이 대여한 서울 지역 고사장은 1월 31일 67개에서 2월 14일 85개로 숫자가 크게 뛰었다. 토익위원회는 보통 고사장을 40개 정도 빌려놓은 뒤 응시자가 많아지면 고사장을 추가해 왔다. 1월이 응시자가 가장 적은 달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최근 고사장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이다. 2월 28일 치러지는 시험은 접수 마감이 25일인데 고사장 수는 이미 86개를 넘어서고 있다.

응시생이 빠르게 늘어나자 한국토익위원회는 4월에 특별 시험을 1회 추가하겠다고 밝혔다. 1년 일정을 미리 공지하고 정확히 그에 맞춰 시험을 운영해온 토익위원회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토익위원회 관계자는 “신토익 시행 이전에 시험을 치려는 수험생이 증가하고 있다. 개정 전까지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토익 응시자 수는 2008년부터 2013년 6년간 1219만 명(복수응시자 포함)으로 연간 200만 명 선이다. 연평균 응시료 수익만 800억 원이 넘는 것을 감안할 때 (안민석 의원실, 2015년) 학원가와 ETS 모두 토익 개정 전 특수를 누리고 있는 상황이다.

뿐만이 아니다. 개정 후에도 학원가의 ‘대목’은 계속된다. 토익 개정에 맞춰 각 학원에서는 새로운 교재를 제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단기학원 관계자는 “시험이 바뀌니 교재도 당연히 바뀐다. 경쟁이 치열한 시장이라 자세히 밝히기 어렵다”고 말했다. 해커스어학원 관계자는 “결정된 사항이 없다”고 잘라 말했지만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관계자는 “이미 교재 작업이 다 끝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2006년 ETS가 처음 시험 유형을 바꾼 후부터 현재까지 토익 부문 교재 중 가장 많이 팔린 ‘해커스 토익’ 시리즈는 누적 부수 1,100만부를 넘어 섰다.(출처: 해커스어학연구소/한국서점조합연합회) 신(新)토익이 시작되면 시험 유형이 완전히 바뀌기 때문에 수험생들이 새 교재를 사는 것은 불가피 할 것으로 예상된다. 기본 교재인 듣기, 읽기, 단어 책만 해도 권 당 2만 선이다. 교재 시장에도 한바탕 지각 변동이 예고된 셈이다.


점수 부담에 수강료·책값 걱정까지 … 취준생 “우리가 호갱이냐”

신(新)토익을 앞두고 한숨 짓는 건 수험생들이다. ETS는 비즈니스 환경이 변했기 때문에 시험 유형을 업데이트 하는 것이라고 개정 이유를 밝혔지만 수험생들은 입을 모아 부담감을 토로했다. 허세민(성균관대 재학, 25세)씨는 “시험 유형이 크게 바뀐다고 하는데 심리적으로 부담스럽다. 바뀌기 전에 최대한으로 점수를 올려놔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김소영(성균관대 재학, 24세)씨는 “초조하다. 개정 전까지 좋은 점수가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인터넷 강의를 등록했다”고 말했다.

특히 취업준비생들의 고민이 크다. 채용 시장이 어려워 취업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토익 만료 날짜를 저울질해야하기 때문이다. 김남영(취업준비생, 26세)씨는 “토익 점수 만료는 1년 남았다. 하지만 언제 취업이 될지 모르는데 유형이 바뀐다고 하니 개정 전에 또 봐야 할 것 같다”고 푸념했다.

신(新)토익 때문에 돈 걱정 하는 취준생들도 많았다. 남승우(취업준비생, 26세) 씨는 “학원을 다니고 있는데 강의료와 책값이 특히 부담된다”며 “토익이 개정되면 바뀐 유형에 맞춰 다시 강의를 듣고 책을 사야한다. 선생님에 따라 부교재도 다시 사야 하는데 취준생 입장에서는 상당한 지출이다”라고 말했다.

응시료 부담은 인터뷰에 응한 모든 수험생이 공통적으로 언급했다. 양훈(건국대 재학, 26세)씨는 “다른 무엇보다도 응시료 부담이 가장 크다”고 했고, 김남영씨도 “비싼 응시료가 가장 부담이다. 점수가 잘 나오지 않으면 돈을 버리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응시료 인상에 대한 전망이 조심스레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ETS는 2006년 첫 개정 이후 토익 응시료를 올렸던 전력이 있다. 지금은 4년 째 4만2000원으로 동결된 상태다. 때문에 개정을 빌미로 응시료가 오를 것이라고 예상하는 업계 관계자들이 많다. A출판사 관계자는 “유형 개정을 위해 ETS가 들인 돈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라며 “본전을 찾기 위해서라도 응시료를 올릴 것”이라고 말했다. ETS와 토익위원회측은 응시료 인상 계획에 대해 “결정된 바가 없다”는 입장만 내놓고 있다.

상당수 수험생들은 지금의 응시료도 아깝다고 말한다. 김소영씨는 “응시료를 4만원 넘게 내고 학생이 어떤 문제를 틀렸는지 알려주지 않는 건 부당하다”며 “컴퓨터가 채점하고 점수만 알려주는데 4만원도 아깝다. 그런데 인상까지 한다니 취준생이 ‘호갱’이냐”고 반문했다. 졸업 후 재취업을 준비 중인 김oo씨(28세)는 “토익 시험에 쓴 돈만해도 엄청나다. 기업들에서 무조건 토익 성적을 요구하는 게 비합리적이지만 대안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한국형 토익 NEAT 시험 시행 2년 만에 폐지 … 차선책 찾아야

그렇다면 정말 토익밖엔 답이 없을까. 안타깝지만 현재로선 ‘그렇다’다. 국내에서도 자체적인 영어능력평가 모델을 개발해 보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ETS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평가 주권’을 확보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렇게 2009년부터 시작된 게 NEAT(국가영어능력시험) 사업이다. 2013년까지 5년간 720억의 예산을 썼다. 그러나 채점 공정성에 대한 잡음이 꾸준히 나왔다. 악재도 겹쳤다. 시행 첫 해인 2013년 치러진 시험에서 두 번 다 네트워크 장애가 발생해 신뢰도가 크게 하락한 것. 때문에 응시 인원은 2년간 만 명이 채 되지 못했다. 한 달 응시 인원이 10만 명을 훌쩍 뛰어넘는 토익과 비교하면 초라한 성적이다. NEAT는 시험 시행 2년 만인 2014년 폐지됐다.

당시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던 숭실대 박준언(영어영문과) 교수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박 교수는 “ETS는 사기업인데도 연구하는 석·박사 인원만 수 백 명이 넘는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이제 막 전문가들이 배출되고 있는 상황” 이라며 “시험 연구와 적용에 최소 5년은 필요한데 너무 급하게 폐지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본은 1963년부터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Eiken) 개발을 시작해 꾸준히 발전시켰고, 현재 연간 230만 명이 응시하고 있다. 중국은 1987년부터 개발을 시작해 한 해 1,000만 명이 응시하는 CET(College English Test)를 보유하고 있다. ‘평가 주권’을 확실하게 갖고 있는 셈이다.

방법이 없겠냐는 기자의 질문에 박 교수는 “NEAT 사업은 폐지됐지만 노하우는 남아 있다. 차선책을 고민해야 할 때”라며 “서울대의 텝스를 토익의 대항마로 키우는 것도 고민해 볼 만 하다”고 조언했다. 서울대에서 개발한 텝스(TEPS)는 시행 10년이 넘어 안정적인 연구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학술 영어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이기 때문에 취업시장에서 외면 받아왔다. 따라서 텝스 연구단의 영어 능력 평가 노하우와 NEAT 사업단의 비즈니스 영어 분야 노하우가 합해진다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또 박 교수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어능력 평가 시험이 단순히 취업 자격증용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라며 “수험생들의 영어 능력 향상과 합리적인 평가 수단을 함께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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