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즈 기자들은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대통령의 하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They do much more of carrying water for the president than I ever thought they would)."

퓰리처상 수상자, 세이모어 허쉬(78)가 일침을 가했다. 그가 2013년 영국 유력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몸담았던 미국의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의 기자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가 보기에 요즈음의 뉴욕타임즈 탐사저널리스트들은 권력을 견제하고 있지 않았다. 허쉬가 보기엔 “한심한(pathetic)" 모습이었다.

허쉬는 권력에 도전적인 미국의 대표적인 탐사저널리스트다. 닉슨 대통령부터 지금의 오바마 대통령까지, 그는 자신의 보도로 많은 대통령과 정부 관계자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부시 대통령의 한 측근은 CNN 앵커 울프 블리처(Wolf Blitzer)에게 허쉬를 “미국 저널리즘계의 테러리스트 같은 존재(the closest thing American journalism has to a terrorist)”라 부르기도 했다.

▲ 빈라덴 사살과 관련해 CNN과 인터뷰하는 허쉬. 사진=유투브 영상 캡쳐

그는 여든을 앞두고 있는 ‘노기자’지만 여전히 현장을 뛰며 정부를 감시하고 있다. 최근에는 2011년 오바마 정부가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한 것이 모두 거짓이라고 보도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가 2015년 5월 10일 영국의 격주간지 <런던 리뷰 오브 북스(London Review of Books)>에 기고한 바에 따르면, 빈 라덴은 2006년부터 파키스탄정보부(ISI)에 의해 잡혀있었다. 2010년 8월, ISI의 내부 밀고자는 빈 라덴에 걸려있는 현상금 2500만 달러의 상당 부분을 요구하며 그가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 있다는 사실을 미국에 알렸다. 미국은 파키스탄과 협조하며 빈 라덴 제거 작전을 펼쳤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파키스탄 정보당국에 작전 시간을 알렸고, 파키스탄 측은 미국 해군특전단(Navy SEAL)이 현장에 수월히 진입할 수 있도록 했다. 허쉬의 보도는 미국 정부의 공식 발표와 전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미국 정부는 파키스탄을 포함한 어느 국가에도 제거 작전을 알린 바 없으며 몇 년간의 추적 끝에 빈 라덴의 주거지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민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다


허쉬는 유태인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서 이민 온 그의 부모에게 미국은 무언가 “특별한” 존재였다. 하지만 허쉬는 버클리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그 특별한 모습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부모님에게) 미국은 도덕과 정의의 수호자였고 새 출발의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도덕과 정의가 깎아내려진 미국만이 우리 앞에 존재할 뿐이죠.“ 그 ”특별했던“ 미국의 모습을 되찾고 싶어서였을까. 그는 56년간의 기자 생활 동안 권력의 민낯을 파헤치며 미국 보다 정의롭게 만들고자 노력했다.


탐사보도의 상징이 되다
허쉬는 시카고 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한 뒤 시카고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하지만 낮은 성적으로 퇴학당했다. 그가 저널리즘에 발을 들인 건 1959년. 허쉬는 <시티 보도국(City News Bureau)>라는 신문사에서 경찰 출입기자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UPI(United Press International), AP(Associated Press) 등의 회사를 거친 뒤 프리랜서 기자로 전향했다.

▲ 미라이 학살에 대한 허쉬의 기사. 사진=베트남넷(Vietnam net) 웹사이트 캡쳐

허쉬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건 1969년이었다. 그는 베트남 전쟁 중 발생한 ‘미라이 학살’을 보도해 미국 사회를 큰 충격에 빠지게 했다. ‘미라이 학살’은 1968년 3월 16일, 미군 부대가 베트남 남부 미라이 마을의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사건이다. 허쉬가 추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학살된 민간인은 약 500여명. 당시 마을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여자, 어린 아이 그리고 노인이었다. 허쉬는 이 학살을 주도했던 윌리엄 캘리(William Calley) 중위와의 인터뷰 내용을 담아 당시의 충격을 보다 생생히 전달했다. 당시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 더 타임즈(The TIMES) 등 총 36개의 언론사가 앞다퉈 허쉬의 기사를 인용 보도했다. 당국의 해명에도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인들의 여론은 악화돼 결국 미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됐다. 허쉬는 이 보도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는 이후 뉴욕타임즈에 스카우트돼 워터게이트 사건과 CIA 민간인 감청 사건 등을 취재했다. 특종 계보를 이어가던 그가 다시 한 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건 2004년. 시사 주간지 <뉴요커(The New Yorker)>로 자리를 옮겼을 때였다. 그는 미군이 이라크에 위치한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포로들을 상습적으로 고문하거나 성폭행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당시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Donald Rumsfeld)가 수용자들로부터 기밀 사항을 빼내고 이라크의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계획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당국은 해당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하지만 자세한 증언과 사진 자료가 첨부된 미군 내부 보고서(Taguba Report)가 공개되며 보도는 사실로 확인됐다.


익명의 취재원에 의존해 취재하다


허쉬는 대부분의 기사를 익명 취재원에 의존해 작성한다. 이에 허쉬의 보도는 신빙성이 낮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됐다. 하지만 허쉬는 대부분의 보도를 사실로 확인시키며 이러한 비판을 수그러들게 했다.

하지만 이번 빈 라덴 사살과 관련해선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 네드 프라이스(Ned Price)는 허쉬의 주장을 “불확실하고 근거 없는 내용”이라고 말하며 비판했다. 허쉬를 지지하던 일부 사람들도 “퇴역 미국 장성과 정보 당국 관계자들”이라는 익명의 취재원들만으로는 설득력이 약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허쉬는 미 정보국 내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익명으로 보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논란은 있지만 우리는 허쉬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허쉬의 보도가 사실인지는 보다 지켜봐야 할 문제다. 하지만 허쉬에 대한 지적이 존재함에도 그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히 존재한다. 주류 언론은 국가 안보와 관련해 정부와 줄곧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라크 전쟁’이다. 2003년 3월 20일,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전쟁의 목표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파괴하고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권력으로부터 축출하는데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로 전쟁이 발생했고 미국 주류 언론은 부시 정부의 전략을 선전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허쉬는 달랐다. 그는 항상 정부와 주류 언론에 배치되는 목소리를 내며 정부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견제했다. 그렇다면 “권력의 남용을 눈 뜨고 못 보는” 허쉬가 보기에 우리 언론은 어떤 모습일까? 바람직한 모습일지 아니면 한심한 모습일지, 그 답은 허쉬만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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