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캐나다인 최신형(26)씨는 2014년부터 캐나다 토론토와 서울 그리고 북한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평양과학기술대학교(이하 평양과기대)에서 학생들에게 국제 금융 및 관리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는 북한에 상주하는 동안 사진 공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인스타그램에서 @shinchoi라는 ID로 북한에서 찍은 사진을 올리고 있다.

지난 10월 6일, 그에게 이메일 인터뷰 제의를 했다. 최 씨는 한국계 캐나다인이라 한국어 사용이 가능하지만 정확한 답변을 위해 영어로 답을 했고 이 기사는 그의 답변을 번역한 것이다. 11일까지 5일간 3차례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평양 주민들의 생활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최 씨가 사는 북쪽

“역사에 관심이 많았어요. 역사는 단순히 특정 국가나 기간에 대한 공부가 아니라 과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에 대한 공부거든요. 전공은 당연히 사학으로 정했어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한국사까지 손을 뻗었지만 북한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극히 일부였다. “이런 게 저를 좌절시켰어요. 그래서 대학원에서 북한에 대해 연구하기로 한 거고요.” 북한에 대한 열망이 컸던 최 씨는 토론토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국제관계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던 중 한국인 교수 지인이 평양과기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쳐보지 않겠냐 물었다. 최 씨는 어떤 주저도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한국인 부모님 밑에서 자란 최 씨가 북한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의 기분은 어땠을까. “새로운 건 없었어요. 선전 포스터들은 여기저기 붙어있었고, 사람들은 1960년대처럼 입고 다녔어요. 빈곤의 흔적도 고스란히 묻어났고요. TV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였죠.” 그러나 감정은 달랐다. TV로 볼 때 느꼈던 무덤덤함이 아니었다. “한국어를 쓰는 그 사람들을 보니 저도 모르게 알 수 없는 감정적 유대가 생기더라고요. 다른 사회에 있는 한국인이랄까. 교포같다고 생각했어요.” 최 씨는 “그들의 정부를 지지하지도,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맞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 독특한 문화를 가진 또 다른 한국 사람이라 생각했다. “근데 그들도 똑같아요. 제가 그런 생각으로 그들을 대하니 그들도 서구나 한국에 대해 묻더라고요. 반감을 가지는 게 아니라요.”

물론 최 씨의 북한 생활은 불편한 게 한 둘이 아니다. 거의 매일 일어나는 갑작스런 정전과 단수에 적응하기엔 시간이 걸렸다. 혹 전기가 나갈까 싶어 아침엔 일어나자마자 물을 끓이고 아침을 한다. 아주 차가운 물이지만 샤워를 할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란다. “물도 갑자기 안 나와요. 그럴 때를 대비해 근처 가게에서 물을 사둬요. 세수랑 양치는 하고 나가야 되니까요.”

북한 음식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남한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경쟁을 하기 때문에 맛있는 음식점들이 많잖아요. 북한은 거의 모든 음식점이 국영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맛이 없어요. 학교에서 주는 점심은 유기농 제품을 써서 몸에 좋고 건강하긴 하지만 야채 위주의 식단이기 때문에 고기는 거의 먹을 수가 없고요. 북한에서 나오는 과자나 음료수도 맛이 없어요.” 그런 최 씨가 즐겨 찾는 곳이 바로 장마당(북한 시장)이다. “장마당엔 거의 모든 것이 있어요. 물론 상인들과 친해지는 게 필요해요. 근데 전 한국어를, 그것도 남한 발음으로 할 줄 아니까 상인들이 더 관심 있게 봐주더라고요. 북한에서 남한 제품을 파는 건 불법이지만 장마당에선 가끔씩 남한 라면도 살 수 있어요.” 그러나 20대의 건장한 청년인 그에게 고기를 먹을 수 없다는 건 힘든 일이다. “가끔은 교정을 걸으면서 햄버거나 스테이크 생각을 하기도 한다니까요?”

인민이 사는 평양

 

 

 

 

 

 



▲ (왼쪽) 평양소년궁전의 학생들이 무용 연습을 하고 있다.
▲ (오른쪽) 북한 시민들이 금강산 레스토랑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사진 제공 최신형.

최 씨의 인스타그램을 보며 가장 놀랐던 건 북한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언제 배웠는지도 아득한 그들의 삶은 분명 궁핍해야 했다. 풍족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어야 했다. 여유로움이란 건 묻어날 수 없어야 했다. 그러나 최 씨가 올린 사진들엔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그들은 웃고 춤추고 노래하고 있었다. “제 인스타그램을 본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런 것 때문에 놀라요. 남한에선 그들의 모습이 너무 과장돼있거든요. 거리엔 굶주린 사람들이 있고, 언제나 군사 퍼레이드를 한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북한 사람들이 웃고, 소풍 가고, 춤 추고, 즐거워하는 걸 상상하지 못 해요. 그러나 북한도 사람 사는 곳이예요.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예요.”

그러나 평양은 북한의 수도다. 그들의 삶으로 북한 사람들 전체의 삶을 말하기엔 무리가 아닐까. “물론 평양은 북한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지만 평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부자인 건 아니에요. 서울도 그렇잖아요.” 북한은 남한의 빈부격차를 비판한다. 남한은 북한의 절대적 빈곤만을 말한다. “북한의 빈곤함이 남한에선 많이 과장돼있지만 북한이 가난한 나라라는 건 사실이죠. 반면 남한은 꽤 부유한 나라죠. 남한은 풍요롭고 북한은 빈곤해요. 그러나 남한 사람들은 여유로움이 부족해요. 반면 북한은 여유롭죠. 소소한 것에서도 행복해해요.” 여유란 시간과 돈의 함수다. 어떤 사회가 여유롭다는 것은 여유가 싸다는 의미다. 경제적으로 가난하다는 뜻이다.

남한 사람들은 풍요롭지만 행복하지 않다는 진단은 최근 11년째 OECD국가들 중에서 1위인 자살률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많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갤럽과 보건컨설팅 회사 헬스웨이가 발표했던 ‘갤럽/헬스웨이 2014 글로벌 웰빙’ 보고서에서 한국은 조사 대상 145개국 가운데 최하위권인 117위를 기록했다. 한국인들의 경제적 만족도는 53위였지만 삶의 목표, 사회적 웰빙, 경제적 웰빙, 공동체, 육체적 웰빙 등 5개 항목으로 측정한 주관적 삶의 질에 대한 순위는 100위권 밖이었다.

북한이 빈곤하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한국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북한경제는 중국과의 교역이 증가하면서 2011년 이후 매년 1퍼센트 가까운 경제 성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핵 개발이 야기한 경제 제재가 이어지고 이명박 정부 취임 후 8년 동안 경직적인 남북 관계로 남북 교역이 축소됐다. 거기에 북한이란 나라가 가진 폐쇄성과 폭력성이 더해지며 북한 주민들은 고통 받고 있다. 유엔 인권이사회가 북한인권 결의안을 12년 연속으로 채택한 이유다.

좀 더 들어가 북한 학생들에 대해 물었다. 최 씨는 “북한의 교육과정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수학도, 과학도, 지질학도 배워요. 하지만 굉장히 정치적이예요. 산의 지형에 대해 배울 때는 김일성이 그 산을 어떻게 발견했는지, 산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지도 함께 배워야 하죠.” 우리가 북한에 대해 배웠던 것과 비슷했다.

그래도 최 씨가 있는 평양과기대 선생님들은 자유로운 편이다. 정치적 사안은 가능한 피해야 하지만 거의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있다. 최 씨는 유튜브를 보여주며 수업을 하기도 했다. 자본주의, 온라인 마케팅, 주식 시장, 소셜 네트워킹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남한은 북한의 최신 군사 훈련이 무엇인지만 궁금해하죠. 그러나 진짜 관심을 가져야할 건 북한의 이런 변화예요. 북한은 바뀌고 있어요.”

그는 북한이 외국을 대하는 태도도 변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북한에 있는 외국인이 몇 명인진 모르겠어요. 중요한 건 북한 내에 23개국의 대사관이 주재하고 있단 거예요. 심지어 북한 사람들 대부분이 싫어하는 미국인들조차 특정 조건 하에는 북한을 드나들 수 있어요. 북한은 계속해서 외국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려 하고 있어요.”

북한에서 인스타그램이 가능한 것도 변화하고 있단 증거 중 하나다. 물론 북한 주민들은 인터넷을 할 수 없다. 몇몇의 연구자나 대학원생은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지만 엄격하게 감시당한다. 평범한 북한 주민들에게 통신의 자유는 없다.

외국인은 다르다. 공항에 도착해 3G 인터넷이 가능한 심카드를 살 수도 있고, 최 씨처럼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교내 와이파이를 사용한다. 심지어 중국보다 자유롭다. 중국 정부는 구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모두 금지하고 있다. 최 씨는 북한에서 유튜브로 동영상을 보고,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고,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린다. “인터넷 사용은 못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핸드폰은 갖고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스마트폰도 갖고 있고요. 심지어 저는 북한 핸드폰으로 앵그리버드까지 했다니까요?”

우리가 사는 한반도

통일평화연구소가 2014년 조사한 통일의식조사에 따르면 “통일이 필요하다”는 응답은 55.8%에 달했다. 그러나 통일 시기에 대해서는 “여건이 성숙될 때”라는 응답이 61%였고, “현 상태 유지”가 19.2%, “관심 없음”이 7.4%였다. “가능한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응답자는 12.4%였다. 통일은 필요하지만 시급한 과제는 아니고, 구호로 외치긴 하지만 피부에 와 닿는 실질적 사안은 아닐 수 있단 말이다.

통일코리아의 주역이 돼야 할 2030세대는 어떨까. 동아일보가 지난 2013년 실시한 통일 의식 여론조사 결과 ‘절대 통일되지 않을 것’이란 응답을 한 20대는 33.4%였다. 전체 평균인 28.3%보다 5.1%포인트 높았다. 30대는 통일 준비 비용 부담에 가장 부정적이다. 연령대별 구분에서 유일하게 부정 답변(50.6%)이 긍정 답변(48.0%)보다 많았다. <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의 저자 김동조는 ‘통일은 대부분 남한 사람들에게 경제적 재앙’일 것이라고 전망한다. 더불어 ‘통일 정책이란 경제 정책이 아니라 사실상의 이민 정책’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일수록 통일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통일연구원, 서울대 통일연구소, 한반도 통일평화포럼 등 통일에 대해 연구하고 분석하는 기관에선 일반 국민들, 특히 대학생들이 중점이 되는 젊은 세대의 통일에 대한 무관심이 우려스러운 지경에 이르렀다고 분석한다.

“그게 참 슬퍼요. 북한 사람들은 완전히 반대거든요. 제가 본 북한 사람들은 언제나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과 한국의 역사에 대해 말했어요. 그때마다 통일 얘기를 하고요.” 그들에게 통일은 피부에 와 닿는 실질적 사안이다. 북한은 하나였던 한반도의 모습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남한이 통일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여러 가지겠죠. 경제적 이유도 있을 거고요. 근데 전 남한 사람들이 누군가와 진정으로 소통하는 법을 잊어서라고 생각해요. 언제 어디서든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하고, 터치 한 번이면 세계 어디든 갈 수 있잖아요. 누군가를 그리워 할 필요가 없죠.” 최 씨는 북한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들은 한 번 떨어지면 언제 볼 지 몰라 불안해해요. 분단 직후 느꼈던 감정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죠. 북한을 짊어질 젊은이들조차 그 감정에 익숙해요.”

과거엔 남한도 그랬다. 부산에서 서울을 가는 것은 외국을 가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한 번 서울에 가면 언제 보나 싶은 마음에 부산역에 주저앉아 울던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남한의 젊은 세대는 이런 불안감과 그리움을 알지 못 한다. 최 씨는 남한에선 과거에만 볼 수 있던 모습이 북한에서는 계속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북한이 아직 경제적으로 낙후된 곳이란 말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질 수 밖에 없는 북한 사람들의 감성이 그의 마음을 건드렸다. “북한은 아직도 그래요. 평양역엔 울고 있는 사람이 늘 있어요. 가족들과 헤어지면 언제 볼까 싶어 너무 슬픈 거예요. 그들에겐 상실, 거리감같은 감정들이 진짜 현실이예요. 이런 감정들이 그들이 통일에 관심을 갖게 한 원동력이 아닐까 싶어요.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 남한에 떨어져있는 가족이란 생각에 그리운 거죠. 진심으로 소통하고 싶은 거겠죠.”

        ▲ 정(Chung) 교수가 고향인 신의주역을 지나고 있다. 사진 제공 최신형.

그는 인터뷰 답변과 함께 인스타그램에 올리지 않았다는 사진을 한 장 보내왔다. 평양에서 중국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찍은 정(Chung) 교수의 사진이었다. 그는 신의주 근처에서 태어났지만 그와 그의 가족은 한국 전쟁 발발 전에 북한을 떠났다. 그 뒤 정 교수는 미국인이 되었고 현재는 최 씨와 함께 평양과기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신의주는 갈 수 없다. 외국만이 아니라 북한 내에서의 이동도 철저히 제한되기 때문이다.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마다 유동 인원을 단속하는 검문초소가 있다. 열차도 마찬가지다. 기차마다 여객 전무가 있고 그들은 여행증명서와 차표, 공민증(북한 주민 신분증) 검열을 한다. 외국인도 예외는 아니다. 평양과기대 교사들도 학교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생활 매니저가 따라붙는다. 북한은 이동의 자유와 같은 본질적인 자유마저도 통제하고 있다.

“그는 예순이 넘도록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어요. 이 때, 우리는 신의주를 지나고 있었고요.” 그가 고향을 못 가본 지 65년이 지났다. 그는 신의주를 지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얼 바라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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