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부터 계단을 급히 뛰어내려 오는 소리가 들린다. “아, 아직도 안 왔네.” 얼마 전부터 대학생 김지영(21)씨는 아파트 우편함을 하루에도 몇 번씩 확인한다. 빈 우편함을 몇 번 뒤적거리는 그녀의 얼굴이 어둡다. “남자친구가 이주일 전에 논산에 훈련병으로 입대를 했어요. 입대해서 바로 편지를 써서 보내 준다고 했는데 아직도 안 왔네요. 거기 주소를 남자친구가 알려줘야 제가 쓴 편지를 보낼 수 있거든요. 항상 옆에 있다가 갑자기 없으니까 너무 허전해요. 어제도 편지를 쓰다가 울면서 잠 들었어요.” 지영씨는 들고 있던 가방을 열어 자신이 쓴 알록달록한 편지 14장을 어루만지며 말한다. 그녀는 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고무신’이다.
 
사람들은 군대를 간 남자친구를 ‘군화’, 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고 있는 여자 친구를 ‘고무신’, 군대 간 남자친구를 끝까지 기다려준 여자를 ‘꽃신’이라고 부른다. 대한민국의 건장한 18세 이상의 남자라면 일정한 기간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여야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군 입대자는 주로 19~25세 사이에 있는 남성이고 매년 20만 여 명이 군대에 입대하고 있다. 남성들은 신체 등급에 따라 혹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특정 군대에 가게 된다. 육군, 해병대, 의무경찰의 복무일은 21개월이며, 해군은 23개월, 공군은 24개월을 복무하게 된다. 이렇게 군대는 건강한 성인 남자라면 모두 가야하는 곳이기 때문에 20대 초반 남성들에게는 엄청난 관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오롯이 성인 남자만이 군대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군대를 갈 또는 이미 군대를 간 남자친구가 있는 여성들에게도 군대는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남자친구가 군대에 가게 되면 여자 친구는 그들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바로 고무신 문화이다. 고무신들은 군화를 기다리는 방법을 크게 5가지로 형성하고 있다. 이는 편지쓰기, 면회 가기, 소포보내기, 전화 기다리기, 웹상의 고무신 커뮤니티에서 의견 및 정보 나누기이다.
 
먼저 고무신들은 군화가 군대에 가면 꾸준히 편지를 쓴다. 고무신들은 인터넷으로도 편지를 쓰며, 이는 손 편지보다 빠르게 전달된다. 서로의 안부를 빠르게 주고받고 싶은 군화들은 편지에 8개의 우표를 붙여 더 빠르게 전달되도록 한다. 고무신과 군화들의 사랑을 이어주는 우체부 아저씨의 눈치로 우표를 8개 붙인 편지는 다른 편지보다 빠르게 전달되고 있다.
 
군화가 자대에 배치 받고, 계급이 높아지면 고무신과 전화도 할 수 있다. 고무신들은 군화가 주기적으로 전화하는 시간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전화기만 바라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저녁 8시만 되면 가슴이 두근거려요. 그 시간에 남자친구한테서 전화가 주로 오거든요. 8시부터 개인정비 시간이고, 9시에 점호를 하니까 8시에서 9시 사이에는 전화가 꼭 와요. 그 시간만 되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게 되죠. 친구랑 놀거나 공부를 하고 있을 때도 어김없이 8시만 되면 핸드폰을 자꾸 봐요. 병이죠. 병.” 대학생 고지운(21)씨가 말했다. “군화가 군대를 간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오늘 전화가 올까 안 올까가 문제였어요. 그런데 이제 군화가 계급이 높아지고, 전화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하루에 1시간 이상 통화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전화비가 너무 많이 나왔죠. 군인 월급도 얼마 되지 않는데 전화비로 다 나가는 것이 미안해서 인터넷 전화기를 구입하게 되었죠. 남자친구가 나라사랑카드로 후불결제를 신청하고 인터넷 전화기로 전화를 걸면 분당 28원만 나가요. 원래는 분당 100원이 넘게 나왔는데 정말 많이 아끼는 셈이죠. 요새 센스 있는 고무신들은 자기 방에 인터넷 전화기 한 대는 꼭 있을 거에요.” 남자친구를 해군에 보낸 김나연(23)씨가 말했다.
 
편지와 전화만으로 사랑이 채워지지 않는 고무신들은 면회를 간다. 군화를 자주 보지 못하는 고무신들은 군화가 있는 곳이 아무리 멀어도 달려간다. 남자친구가 육군에 간 이강희(25)씨는 “어제는 왕복 10시간 넘게 걸려서 남자친구 면회를 다녀왔어요. 저희 집에서 남자친구 부대가 있는 거제도까지 가려니 시간이 오래 걸렸죠. 새벽 4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기차를 타고 갔어요. 피곤했지만 남자친구의 얼굴을 보니 피곤이 눈 녹듯 사라졌어요. 이게 다 사랑의 힘이죠.”라고 말했다.
 
고무신들은 군화가 군대에 있어 사지 못하는 물건들을 소포로 보내준다. 군대에서 힘들어 하는 군화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군대매점인 px에서 구하지 못하는 외국 과자들을 보내주기도 한다. 정성이 넘치는 고무신들은 군화의 선임들에게 군화한테 잘해주라는 의미로 외국 과자나 물품들을 개별 포장하여 보내기도 한다. “남자친구가 선임들에게 예쁨을 받아 조금이나마 덜 힘든 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같은 소대 사람들 18인용 분의 과자를 소포로 보냈어요. 하나하나 제 사진을 붙인 포장지로 개별 포장했는데 그때 아마 돈이 20만원 넘게 든 것 같아요. 그걸 받은 남자친구도 너무 좋아하고, 선임들도 좋아했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 기뻤어요. 남자친구 기를 세워준 것 같아서 뿌듯해요.” 직장인 장유선(28)씨가 말했다.
 
 
요새 고무신 카페에 푹 빠져 산다는 대학생 유지원(20)씨가 말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씩 고무신 카페에 들어가요. 남자친구가 보고 싶을 때마다 들어가는 것 같아요. 다른 고무신들은 남자친구가 없는 허전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군대에서 어떤 물건이 필요할지 정보도 나누고, 혹여나 남자친구와 전화로 싸우게 된 날에는 답답한 마음에 제 심정을 토로하는 글을 쓰기도 하죠. 일단 고무신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있으니까 말이 잘 통해서 더 자주 방문하는 것 같아요. 제 글에 쓰인 댓글을 보며 위로를 받기도 하고 정보도 얻을 수 있으니까요.”
 
이미 웹상에는 다양한 고무신 커뮤니티들이 형성되어 있으며 고무신들의 활발한 활동이 진행되고 있다. 가장 활성화 되어있는 고무신 커뮤니티는 2003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12년 동안 운영되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군대에 보낸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네이버 카페이다. 이 카페의 멤버는 2015년 6월 1일 기준 497955명이고 총 방문자는 1031152957명이다. 카페등급은 네이버 카페의 카페등급 중 최고등급인 숲이며 전체 네이버 카페랭킹 97위다. 2014년에는 상위 0.1퍼센트 카페 중 카페활동이 많고 공유된 양과 품질이 우수한 카페에 부여되는 네이버 대표카페로 선정되었다. 이 커뮤니티에는 다양한 게시판이 존재한다. 크게 고무신들의 이야기를 상담하는 게시판, 각 군대 별 고무신 게시판, 계급 별 고무신 게시판, 고무신 편지, 소포, 면회도시락 뽐내기 게시판이 있다. 고무신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게시판에 올리며 다른 고무신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조언을 하기도 한다. 이 중 고무신 편지, 소포, 면회도시락 뽐내기 게시판은 굉장히 인기가 많다. 고무신들은 자신들이 보낸 엄청난 양의 편지, 과자 소포, 10단 면회도시락 등을 뽐내며 카페에 올리고 이를 본 다른 고무신들은 필요한 정보를 얻거나 자극을 받아 더 열심히 편지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을 보는 시각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남자친구가 군대에 갔다고 말을 하는 순간 사람들의 눈빛이 변하는 경우가 많다. 옛날에는 여자 친구가 군대 간 남자친구를 배신하고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다’는 말만 있었다. 하지만 요새는 군인들의 잦은 사회와의 접촉으로 군대에 있을 때나 재대한 후 기다려준 여자 친구를 배신한다는 ‘군화를 거꾸로 신는다’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21개월을 꼬박 남자친구만 기다렸는데 제대하고 3개월 후에 차였네요. 더 이상 제가 예전처럼 좋지 않대요. 지금도 믿기지는 않지만 받아들여야죠. 이렇게 끝났지만 남자친구의 어려웠던 시기를 함께 보낸 것에 대해서 후회하진 않아요. 인연이 여기까지였던 거죠 뭐.” 3살 연하 남자친구를 군대에 보냈다가 얼마 전 헤어진 직장인 김지연(26)씨가 말했다. “딸이 지금 남자친구와 제발 헤어졌으면 좋겠어요. 아직 20대 초반, 가장 예쁠 나인데 군대 간 남자를 기다리는 건 너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요. 세상의 반이 남잔데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자기가 춘향인 마냥 저렇게 그 남자만 기다리는 걸 보면 마음이 좋지 않네요. 행여 저렇게 기다리다가 차이면 어떡해요. 빨리 헤어지고 군필인 좋은 남자를 만났으면 좋겠어요.” 딸의 남자친구가 한 달 전 해병대에 입대했다는 최희경(52)씨는 딸을 걱정했다.
 
하지만 정작 고무신들의 생각은 달랐다. 한 달 후에 남자친구가 재대를 하는 하윤주(24)씨는 말했다. “남자친구가 군대에 갔다고 하면 ‘헤어져라, 왜 기다리냐, 니 청춘이 아깝다, 기다려봤자 니가 차인다’라는 말을 정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어요. 처음에는 남자친구도 곁에 없는데 이런 소리까지 들으니 너무 비참했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말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사랑을 하는 건 저와 제 남자친구니까요. 그리고 저는 한 번도 남자친구를 기다린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남자친구가 군대에 가있을 때 저는 멍하니 남자친구만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니까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책도 읽고, 친구도 만나고 제 나름대로의 삶을 살고 있는거죠. 남들보다는 조금 힘들지만 다른 일반적인 커플들처럼 사랑하고 있는 거에요.” 다음 달에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꽃신 6년차인 장하원(29)씨는 예비 신부답게 얼굴에 꽃이 피어있었다. “고무신들이라면 누구나 알거에요.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쓴 편지가 얼마나 소중한지를요. 요즘같이 1초 만에 연락할 수 있는 시대에서 이러한 값진 경험을 얻기는 쉽지 않죠. 21개월이라는 힘든 시기를 같이 보내면서 서로에 대한 소중함을 더 느끼고, 배려하는 법도 배우면서 남자친구와 저 모두 성숙해졌던 것 같아요. 그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고요. 주위에서 하는 말에 흔들리지 말고 고무신과 군화 모두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의 모든 고무신들 파이팅 하세요.”
 
오늘도 군인들은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그들의 곁에 고무신이 있기에 이 힘든 시기를 잘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간이 군화와 고무신 모두가 성장하는 인생의 값진 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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