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 공원, 신촌 문학의 거리, 북서울 꿈의 숲, 월드컵공원, 서울숲 공원. 모두 피아노가 있는 곳이다. 알록달록 그림이 그려진 피아노는 거리에서 공원에서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린다. ‘선유도 공원’에는 브로콜리 천사 그림이 ‘북서울 꿈의 숲’에는 손 그림이 그려진 흰색 피아노가 있다. ‘누구나 칠 수 있는 피아노입니다.’, ‘사랑해’ 같은 메시지들도 적혀 있다.

‘선유도 공원 피아노’를 검색 창에 입력하면 제이레빗의 곡 ‘수고했어 오늘도.’를 피아노로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의 동영상이 나온다. 1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의 표정에 웃음이 가득하다. ‘좋다’라는 말소리도 들린다. 이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피아노는 왜 공원과 거리에 있는 것일까?

“뉴욕 Sing for Hope재단의 거리 공연 동영상을 보고 무작정 연락했죠.”

서울 곳곳에 있는 피아노는 ‘달려라 피아노’ 대표 정석준씨에 의해 탄생했다. 그를 서울시 영등포구 당산로에 위치한 ‘하자센터’에서 만났다. 하자센터는 공익 활동을 하는 개인과 단체들에게 사무실을 제공한다. 건물 앞에 다다르자 아이 얼굴이 그려진 피아노가 먼저 반긴다. 피아노를 뒤로 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학교 교실 정도 되는 크기의 공간 가운데 커다란 나무 원탁이 있고 ‘달려라 피아노’ 대표 정석준씨와 직원 두 명이 있다.

정석준씨는 2012년까지 문화재단, 축제 사무국 등 문화기획자로 일했다.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고민이 생겼다. 모두를 위한 공연을 하고 싶은데 쉽지가 않다는 거였다. "공연장이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이 있지만 실제로 공연이나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죠. 경제적 여건, 시간이 모두 맞아야 하니까요.”

그의 고민을 우연하게 본 유투브 영상이 풀어줬다. 뉴욕 Sing for Hope재단에서 만든 ‘The Sing For Hope Pianos: A Short Documentary’ 란 제목의 6분 58초짜리 피아노 거리 공연 영상이었다. “이거면 시간과 장소, 경제적 능력에 상관 없이 누구나 예술이나 음악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게 시작이었다. 무작정 Sing for Hope재단에 메일을 보냈다. 소식이 없어 전화도 했다. 3개월 뒤 2012년 가을, ‘한국에도 확산되면 좋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 다음해 초부터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정식으로 ‘달려라 피아노’를 시작했다. 웹사이트를 하나 만들고 ‘달려라 피아노’를 함께 할 사람들을 찾았다. 여섯 명이 연락이 왔다. 그렇게 ‘달려라 피아노’ 기획단 7명이 모였다. 정석준씨를 제외하고 모두 직장에 다니고 있어 2주에 한 번 주말에 모인다. 올해부터 평일에 함께 일 할 직원 두 명이 들어왔다. 그들의 노력으로 지금까지 설치된 피아노는 46대다. 20대 정도는 교육 목적을 위해 복지시설에 10대 정도는 공원 같은 공공시설에 재기증 됐다. ‘달려라 피아노’ 처음부터 지금까지 함께 하는 채정은씨는 피아노가 새롭운 공간에서 음악 재료로 사용된다는 사실이 기쁘다고 했다. “예전부터 음악은 하는 사람들만의 축제라는 인상이 강했어요. 저희 프로젝트가 생기면서 아마추어도 자신의 음악을 세상에 보일 수 있고 소통할 수 있죠.”

거리의 피아노, 소통의 시작이 되다.

피아노가 거리에 처음 나타난 곳은 2008년 영국의 도시 버밍엄이다. 영국의 설치 미술가 루크 제럼(Luke Jerram)은 토론토 라디오 프로그램 '메트로 모닝'에서 설치 배경을 밝혔다. “빨래방에 매 주말 가는데, 매번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잖아요. 그런데도 서로 대화가 없었어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도시에,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이겠구나.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피아노를 설치 한 거죠.“

피아노가 소통의 촉매제가 되기를 바라는 루크 제럼의 바람은 ‘달려라 피아노’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이뤄지고 있다. ‘달려라 피아노’로 소통과 행복을 경험한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작년 가을 ‘달려라 피아노’를 알게 된 후 연주를 위해 주말에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온다는 강재용씨도 그 중 하나다. “길거리에 놓여진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음악으로 소통 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피아노로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느낄 수만 있으면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해요.“ 거리의 피아노를 연주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즐겁다는 이도 있다. 60세 치과의사이자 팝 피아니스트인 장요한씨다. 신촌 문학의 거리에 놓인 ‘달려라 피아노’의 46번째 피아노를 연주하는 그에게 사람들은 감사인사를 건넨다. “이런 연주 듣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선물 잘 받고 갑니다.” 피아노가 아니었다면 지나쳤을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짧지만 대화 몇 마디가 오고 간다.

‘달려라 피아노’는,

달려라 피아노는 무거운 피아노가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정석준씨가 붙인 이름이다. “’달려라 피아노’는 기증과 재기증 캠페인, 거리 공연 캠페인, 가을 페스티벌을 진행해요.” 피아노 기증을 받는 것도 쉽지 않았다. 처음 6개월은 기증자 전화가 한 통도 없었다. “그러다 선유도 공원 소장님이 연락을 주셨어요. 공원에 오래된 피아노가 있으니 한 번 봐달라는 거였죠.” 조율하고 아티스트의 손을 거쳐 선유도 공원에 재설치 됐다. 원래 있던 피아노라 엄밀한 의미의 기증은 아닌 탓에 ‘0호 피아노’란 이름이 붙었다. 이걸 시작으로 첫 번째 피아노 기증자가 나타났다. 강명선씨다. “작년에는 40대를 기증받았어요. 올해는 100대 정도로 예상하고 있어요.”

기증 받은 피아노는 세 등급으로 나뉜다. 상태가 가장 좋은 A등급은 교육을 위해 복지시설로 가고 그 다음 단계인 B등급 피아노는 공원 같은 공공장소에 설치된다. 조율을 해도 음정 맞추기가 힘든 C등급 피아노는 재기증이 어렵다. ‘달려라 피아노’ 홍보를 담당하는 이유선씨는 기증 과정에서 발생하는 아쉬움을 전했다. “가끔 피아노 기증을 폐기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요. ‘이사를 해야 하니 어서 가져가라.’며 짜증 섞인 말투로 말을 하기도 하죠. 기증하시는 분들이 피아노를 ‘선물’한다는 생각으로 보내주셨으면 좋겠어요.”

기증 받은 피아노는 아티스트들의 손길을 기다린다. 페인트 재료비 20만원 정도를 받고 아티스트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기부한다. ‘달려라 피아노’의 첫 번째 피아노 페인팅은 밥장으로 불리는 일러스트레이터 장석원씨가 맡았다. 브로콜리 천사들이 그려져 있는 그의 피아노는 선유도 공원에 있다. 올해도 피아노 페인팅에 참여 한다는 그는 ‘달려라 피아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길을 걷다가, 산책을 하다가 잔잔히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피아노 선율에 행복해지고 추억에 빠지고 위로 받게 되는 존재가 ‘달려라 피아노’인 것 같아요.” 2015년 피아노 페인팅에는 밥장씨와 그림책 작가 최숙희씨를 비롯해 총 8명의 아티스트들이 참여했다.

‘달려라 피아노’의 수입은 크지 않다. “좋은 일을 하면서 수익을 내보려고 하는데 쉽게 풀리지 않네요.” 때문에 대부분의 캠페인이 후원을 통해 이뤄진다. “올해는 문화체육관광부와 문화융성위원회의 후원을 받아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어요. ‘문화가 있는 날’인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에 거리 공연을 하는 거죠.” 문화가 있는 날은 작년부터 시행됐고, ‘달려라 피아노’는 올해 4월 29일부터 참여했다. 지난 4월 28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성호 문화융성위원장은 ‘달려라 피아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공공장소에 놓일 피아노가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문화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작은 계기가 됐으면 하고, 일상이 문화로 더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그 시작으로 지난 4월 마지막 주 수요일, 서울 지하철 2호선과 강남 역 5번 출구, 금천구청에서 이한철 밴드가 피아노 공연을 가졌다.“ 이 날은 연주자를 사전에 미리 정해 거리 공연을 해요. 특별한 행사가 있지 않는 한 연주자를 따로 정하지는 않아요. 누구나 쉽게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거죠.”

“재기증 된 이후의 이야기가 더 주목 받았으면 좋겠어요.”

‘달려라 피아노’를 하면서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 “’달려라 피아노’라 하면 기증하고 재기증하는 걸 더 많이 생각해요. 그 과정이 많이 노출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건 일부일 뿐이죠. 피아노를 기증 받고 피아노가 설치된 후 일어나는 아름다운 모습을 놓치는 것 같아요.” 찰나의 순간을 발견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할 거라 한다. “재기증 된 피아노가 어떻게 쓰이고 연주되고, 세상을 바꾸는지 많은 사람들이 지켜봐 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것이 ‘달려라 피아노’의 또 하나의 목표죠.”

피아노가 앞으로 어떤 의미였으면 좋겠는지 묻자 자신이 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한다. “각자가 생각하는 ‘어떤’ 피아노가 됐으면 좋겠어요.” 많은 사람들에게 ‘달려라 피아노’가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 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저마다 좋아하는 음악이 생기고 기억할 수 있는 추억이 생기길 원해요. 언젠가는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어렸을 때 거리에서 피아노 쳤던 게 기억에 남는다.’라고 말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그는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세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선뜻 피아노 앞에 앉을까?’ ‘달려라 피아노’ 프로젝트 기획 단계부터 나온 걱정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의 시선에 너무 갇혀 있어요. 피아노 앞에서는 눈치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피아노 치는 걸 가만히 들어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곡들을 많이 치는 것 같아요. 비슷한 레퍼토리가 반복돼요. ‘말할 수 없는 비밀’ 주제곡을 가장 많이 치죠. 외국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먼저 생각하지 않아요. 우선 두드려 보는 거죠. 그게 중요한 것 같아요. 사람들이 거리에서 마음 편히 쳤으면 좋겠어요. 틀려도 돼요. 음악은 즐기는 건데.”

“’달려라 피아노’ 같은 프로젝트들이 계속 되고 5년, 10년이 지나면 우리 나라 예술 교육도 조금 바뀌겠죠.” 정석준씨의 말에 기대감과 자신감이 묻어난다.

6월 말, 상반기에 기증 받은 26대의 피아노가 달릴 준비를 마쳤다. 26대는 복지시설에 10대는 공원에 설치됐다. 수준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든, 어릴 적 쳤던 곡이 잘 기억 나지 않아도 한 번 피아노 앞에 앉아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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