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젊은 눈 크게 떠/그 큰 웃음소리/모든 것을 다 보아서 걸러내는/그의 입이야말로 그의 붓과 함께 강하다  지식인이란 이 세상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김중배는/늘 내일을 기다린다
- 고은의 <만인보> 중에서

시인 고은은 그의 시 <만인보>에서 언론인 김중배를 장지연, 문일평과 나란히 놓았다. 천관우의 무기교보다 그의 번득이는 기교와 시대감각을 높이 샀다. 1934년생, 올해 나이 여든둘이다. 2009년 동료와 후배들은 그의 기자인생 50년을 기념해 <대기자 김중배>란 기념집을 냈다. 그가 한사코 출간을 거절했다는 이 책엔 그의 기자인생을 함께한 22명의 증언이 담겼다. 그들이 말하는 김중배의 삶은 한국 언론사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언론인 김중배는 57년을 기자로 살았고, 여전히 언론의 곁에 머무른다.

문학을 좋아하던 법대생, 기자가 되다

1953년, 김중배는 전남대 법대에 진학했다. 법학을 택한 건 집안의 강권 때문이었다. 먹고 살기조차 어려운 시절이었다. 의대, 법대에 가는 것이 집안을 돕는 길이라 여겨지던 때였다. 억지로 택한 법 공부엔 재능이 없었다. 법학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성적은 받아야겠기에 열심히 적어 낸 시험답안엔 수필 같단 평가가 돌아왔다. 법보단 책이 좋았다. 문인 친구들과 어울리며 문학동인회도 꾸렸다. 그러다 재미 삼아 사제 신문까지 만들었다. 볼펜도 없이 펜에 잉크를 찍어 손으로 직접 써서 돌렸다. 진로는 자연스레 글 쓰는 일로 기울었다. 졸업 후 집안에선 고등고시를 보라고 성화였지만, 마침 <한국일보> 공고가 났다. 1957년 스물다섯의 나이로 <한국일보> 기자가 됐다.

당시 <한국일보>는 젊은 신문이었다. 창간된 지 고작 4년, 신문도 구성원도 새파랗게 젊었다. 편집국장까지 30대일 정도였다. 김중배도 당시 <한국일보>가 ‘파격적’이었다고 말한다. “편집국장도 젊었고, 견습기자가 쓴 기사인지 소설인지 모를 글까지 신문에 실어줬다”(<프레시안> “20대를 전포세대로 만든 죄인, 속죄한다”, 2015) 덕분에 젊은 기자들에게도 기사 쓸 기회가 많이 주어졌다. 의기투합해 좋은 신문을 만들자 다짐하던 시절이었다. <한국일보> 사주였던 장기영과의 인연도 그때 시작됐다. 장기영은 특이한 사람이었다. 현장에서 뇌물을 받지 말라며 기자들에게 백지 수표를 써주곤 했다. 사장실 칠판엔 ‘정상이 보인다’라고 쓰여 있었다. <동아일보>가 1위, <경향신문>이 2위를 하던 시절이었다.

<한국일보>는 기자사관학교라 불릴 정도로 젊은 기자들이 많았다. 편집국엔 혈기가 넘쳤다. 기사를 쓰다 자정을 넘기는 일도 잦았다. 통행금지 탓에 집에 가지 못하면 어김없이 편집국에서 술을 마셨다. 안주는 ‘신문’이었다. 밤새 뜨거운 논박이 오갔다. 동료와 선배의 힘으로 고단한 시절을 버틸 수 있었다. 김중배는 <프레시안> 창간 10주년 인터뷰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기자는 힘든 독자적인 직업이라 고독하기도 하고 육체적으로 힘들다. 그때 고단함을 풀어주고 의욕을 낳게 했던 사람들이 동료와 선배들이었다. 열정의 폭발이 있었다.”

1963년 김중배는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겼다. 회사를 옮겼지만 그는 여전히 사회부 소속이었다. 1년간 몸담았던 <민국일보>까지 그는 세 회사에서 항상 사회부만을 고집했다. <동아일보>에서는 사회부 차장과 부장을 거치며 현장을 누볐다. ‘기자의 꽃’이라는 사회부 기자로서의 특권을 마음껏 누린 셈이었다. 그는 유독 사회부를 아꼈다. 김종구 전 <한겨레> 편집장은 <대기자 김중배>에서 “그 자신이 사회부 경력이 많아서인지 사회부 경찰팀을 각별히 아꼈다”고 전한다.

논객, 김중배

1973년 논설위원이 됐다. 16년 논설위원 인생의 시작이었다. 82년 3월부터는 이름을 내걸고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그게 그렇지요 – 김중배 세설>이었다. 당시엔 기명칼럼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하지만 선우휘나 최일남 같은 이름난 필진들의 칼럼은 신문의 얼굴이 돼주었다. 김중배 칼럼도 마찬가지였다.
직설은 쉽지 않았다. 당시 칼럼은 행간을 읽어야만 의미 파악이 가능했다. 시대가 그랬다. 소설가 최일남은 ‘천생 기자인 김중배의 글쓰기’란 글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날아간 자유에 낙담한 사람들은 일상에 떠도는 소문에 귀를 쫑긋거리고, 지상의 뉴스나 글의 행간에 모종의 뜻이 행여 숨어있지나 않을까 탐색하기 시작했다.”

군부의 언론통제는 김중배가 칼럼을 쓰기 시작할 무렵엔 더 심해졌다. 칼럼을 쓴 날엔 집에 가기조차 어려웠다. 검은 차들이 편집국 앞을 지키고 있었다. 집에 협박 전화가 걸려오는 일도 흔했다. 결국 장영자.이철희 사건을 다룬 칼럼으로 김중배는 안기부 지하실에 끌려갔다. ‘서울은 몇 시인가’라는 제목의 칼럼은 게오르규의 소설 <25시>가 그린 부조리에 빗대 정권의 부패와 연고주의를 비판했다. 안기부에선 ‘바둑을 두다가 패착이 인정되면 바둑판을 딱 쓸고 다시 둬야 한다’라는 표현을 문제 삼았다. 정부에 대한 전복을 이야기한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84년 4월 그는 지면을 잃었다. 도쿄로 유배 아닌 유배까지 다녀와야 했다.

1년간 도쿄 생활을 마친 김중배는 칼럼으로 복귀했다. 80년대,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김중배 칼럼’의 시작이었다. 그의 칼럼은 여전히 ‘행간읽기’가 필요했다. 인용이 많은 비유적인 글이었다. 독재정권과 군부정권에서 16년간 칼럼을 쓰기 위해선 그래야 했다. <한겨레> 한승동 기자는 “비유와 상징의 우회화법으로 쏟아내는 비장과 절절함은 ‘문장의 훈남’으로 알려진 스타일리스트 김중배의 폭넓은 교양의 산물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당시의 폭압적 상황을 헤쳐나가는 방편이었다”고 말한다.(<한겨레> “군사독재 후려친 죽비칼럼 그 통렬한 쾌감 기억합니다”, 2009) 김중배는 자신이 쓰는 문자가 비유와 상징의 우회화법을 통해 활자로 살아나길 바랐다고 고백한다. 독자들은 그런 그만의 인용을 좋아했다. 누구도 나서지 않았던 살벌한 시대에 독자들은 김중배의 글에서 쾌감을 느꼈다.

통금은 우리가 갖는 자유의 한계를 상징하는 빗장이었다. (중략) 시간은 인간을 감시하는 상전이었다. (중략) 시간의 감금이 어른들의 자유를 엘레지의 한 가락쯤으로 떨어뜨렸다면, 학생들의 제복은 ‘옷의 감금’으로 비유될 만했다. (‘밤의 해방과 옷의 자유’, 1985)

흔히 권력은 알코올과도 같다고 비유된다. 그 어느 쪽이나 잘못 쓰면 머리를 앓는다. 특히 권력은 인간의 깊은 곳을 외면한 채, 자르고 도려내고 누르고 거기다가 인공장기를 갖다 붙이면 된다는 식으로만 행사될 수 없다. 그러한 권력사회엔 인간의 피가 통하지 않는다. (‘잘린 손과 민중문화’, 1985)

은유적인 문체는 시대의 아픔과 만나면 뜨거워졌다. 87년 박종철 물고문 사건에 대한 그의 칼럼은 격문(檄文)이었다. ‘사인은 거침없이 밝혀지고 사인을 죽이는 길이 열려야 한다.’는 그의 글은 단호했다. 바람대로 자신이 쓴 문자가 사람들의 마음에서 살아 움직이는 활자가 됐다. 손석춘 건국대 교수는 이 칼럼을 ‘그가 쓴 숱한 명문 가운데 가장 돋보인 절창’이라고 평가했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기 바란다. 태양과 죽음은 차마 마주볼 수 없다는 명언이 있다는 건 나도 안다. 태양은 그 찬란한 눈부심으로, 죽음은 그 참담한 눈물줄기로, 살아있는 자의 눈을 가린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박종철 군, 스물한 살의 젊은 나이에 채 피어나지도 못한 꽃봉오리로 떨어져 간 그의 죽음은 우리의 응시를 요구한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1987)

‘부끄러움의 깃발’

이름을 날리던 칼럼니스트였지만 정작 본인 마음에 차는 글은 아니었다. 드러내는 게 아닌 감춰서 보여주는 데 대한 아쉬움이었다. 그는 2013년 고려대 대학원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후배들에게 과대평가를 받았지만 신문기자는 저런 문장을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을 적시하고 직설적인 논리를 펴는 것이 맞지, 마치 다른 사람의 글인 양 인용을 많이 하는 글쓰기는 비겁하다”고 말한다. 2011년 <미디어오늘>이 마련한 손석춘 교수와의 대담에서도 그는 자신의 글이 비겁했다고 말한다. “돌리고 돌려서 완곡의 화법으로 비겁하게 썼다. 정말 비겁했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육성을 울리지 않고 그 행간을 읽어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한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이런 겸손은 김중배의 ‘부끄러움’과 궤를 같이 한다. 부끄러움은 그의 글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정조란 게 세간의 평가다. 칼럼을 쓴 초창기부터 그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고백했다. 1979년 그는 칼럼에서 “몰염치의 시대에 누구나 입에 올릴 수 있는 오늘의 처방은 부끄러움, 그 중에서도 염치의 회복”이라고 적었다. 칼럼의 제목은 ‘부끄러움의 깃발’이었다. “그의 글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정조도 단연코 부끄러움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옳고 그름의 구별이 사라지는 세상에 대한 분노였고, 또한 그것을 막아내지 못한 당신 자신에 대한 질책이었습니다.”(‘<대기자 김중배>를 펴내며’, 2009) 부끄러움의 바탕에는

부끄러운 시대를 살았던 언론인으로서의 당연한 부끄러움과 다시는 그러지 말자는 다짐이 공존한다.
1996년 <미디어오늘>에 쓴 칼럼에서 그는 “부끄러운 시대를 살았던 부끄러운 선배로서의 당연한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은 마땅히 부끄러움을 아는 부끄러움으로 타올라야 하고, 다시 부끄러움을 되풀이 하지 않는 다짐으로 피어올라야 한다. 나는 그것을 짐짓 ‘인격’의 바탕인 ‘치격’이라고도 불러오는 터”라고 적었다. 아예 부끄러움을 아는 인격이란 의미의 ‘치격’이란 단어까지 만들었다.

김중배 선언

1990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된 김중배는 이듬해 9월, 1년 만에 그만뒀다. 사실상 해임이었다. 그는 30년간 몸담았던 <동아일보>를 떠나면서 이른바 ‘김중배 선언’을 남겼다. 자본과 언론의 관계에 대한 통찰력이 엿보이는 일갈이었다. “언론은 이제 권력과의 싸움에서보다 자본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

언론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90년대 초반 <미디어오늘>에 실린 칼럼들에서 그의 생각은 뚜렷이 드러난다. 그는 권력과 자본, 언론의 관계를 ‘철의 삼각구조’라고 꼬집었다.

닫힌 언론, 비뚤어진 언론은 민주와 자유와 정의의 가치만을 뒤엎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삶과 죽음마저 뒤엎는다. (중략) 그릇된 정보, 왜곡된 정보, 조작된 정보는 사람을 죽인다. 의견의 경우도 동일하다. 곡필은 사람을 죽인다. (중략) 자본주의 아래서의 이른바 권산언 또는 권자언의 세모 고리는 그만큼 견고하다. 가히 ‘철의 삼각구조’라고 말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터이다. (‘권력.자본.언론, 그 ‘철의 삼각구조’, 1995)

1993년 <한겨레> 사장을 지낸 후에는 시민단체로 자리를 옮겼다. 1994년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맡았다. 참여연대는 전 영역을 아우르는 단체였지만, 그의 관심은 언론에 있었다. 언론개혁시민연대 활동은 본격적인 언론운동의 시작이었다. “참여연대 활동을 하면서 시민단체가 언론운동을 할 수 없을까를 고민하던 끝에 다국적 미디어 재벌인 머독이 한국 미디어시장을 넘본다는 소리가 나돌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위기감에 언개련을 발족시켰다.”(‘정연구의 언론인물 탐구 – 김중배 언론개혁시민연대 상임대표’, <신문과방송>, 1999)

게릴라식 언론개혁이 아닌 정제된 형태의 운동에 대한 필요성에 공감을 한 터였다. 언론운동을 시작한 저변에도 후배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었다.

나는 감내하기 어려운 그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자각하고 ‘누워서 침뱉기’를 넘는 ‘자기 매질’의 작업으로 언론운동에 종사한다. 지금도 깨어 있으리라 믿는 언론 종사자들의 자유와 독립과 비판정신,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언론종사자들의 자존을 위해서 민주언론의 이름에 걸맞는 통합 방송법을 마련해내야 하고 정기간행물 등록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미디어오늘>, 1998. 11. 11)

2001년 <문화방송> 사장을 맡았다. 개혁적 성향의 김중배를 사장으로 선임한 것을 두고 ‘작은혁명’이라는 말까지 돌았다. 사장 자리에선 오래지 않아 스스로 물러났다. 임기 2년을 남겨두고 사직서를 냈다. 다시 언론개혁운동의 자리로 돌아왔다. 2004년 일흔의 나이로 뉴미디어 포럼인 <언론광장>을 발족시켰다.

그는 여전히 언론에 따끔한 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2004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미디어가 우선적으로 도려내야 할 환부로 사주들의 미디어 지배를 꼽았다. 2004년 홍세화와의 대담에서도 그는 신문시장은 시장도 아니라며 비판의 날을 세웠다. “신문시장의 왜곡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신문시장을 시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거다. 세상에 이런 시장이 어디 있나. 처음에는 거대 미디어들의 패권주의적 발상이 깔린 무한 경쟁으로 시장질서가 파괴됐다. (중략) 광고 즉 자본과의 관계에서 지난날의 권력과의 관계처럼 수직적 관계가 형성돼, 광고 수주를 확장하는 것이 사운을 거는 싸움으로 변질된 것으로 본다.” (<한겨레> “김중배 언론광장 대표와의 대담”, 2004)

그가 보는 한국 언론의 현실은 참담하다. 2011년 <미디어오늘>의 송년대담에서 그는 현재 언론이 권력과 자본이 추구하는 시장논리에 편입돼버린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드러냈다. “(이승만, 박정희 시대를 살며 기사가 왜곡되거나 버리지는 건 일상이었음에도) 적어도 기자 사회에 하나의 공감대는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당연히 보도돼야 할 기사인데 보도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저항감과 분노, 마땅히 보도해야 한다는 의지, 적어도 그런 것을 바라는 공감대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현재 한국의 주류언론에는 그런 공감대가 부재하다는 게 그의 평가다. 2013년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 특강에서 그는 “현재의 주류언론이 참담하다”면서 후배기자들에게 끝없는 겸손함과, 자기점검을 당부했다.

‘김중배 칼럼’은 없지만 김중배의 말과 글은 여전히 유효하다. 언론의 정도를 위하는 길이라면 어디든 목소리를 보탠다. 그는 2011년 전국언론노조가 마련한 언론자유 행사 길거리 강연에 나섰다. 강연의 주제는 ‘언론인이여 분노하라’였다. 2013년 <뉴스타파> 개소식에서 그는 “뉴스타파를 후원하는 3만 명의 사람들은 진실의 수호자”라며 탐사저널리즘 본연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말했다.

기자라는 소명의식

그는 기자를 말할 때 ‘소명의식’이란 말을 즐겨 쓴다. 기자란 직업은 하늘의 부름에 답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게 그의 오랜 신념이다. 그는 후배기자들에게 전문직업인으로서의 자존을 요구한다. 사주와 조직에만 충실한 것은 자존을 잃어버리는 것이란 게 그의 생각이다. “기자들이 처한 현실적 조건이 매우 어렵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 (중략) 또 기자는 저널리즘의 종결자가 되어야 한다.”(<기자협회보> 창립47주년 인터뷰, 2011)

그는 평생 언론이라는 외길을 걸어온 동력을 묻는 질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한다.
“뭐, 정치 쪽에서 오라는 소리도 안 하고, 하하. 다른 데 가서 장사할 능력도 없고. 이런 짓이 그래도 체질에 비교적 맞았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한겨레> “김중배 언론광장 대표와의 대담”, 2004)
올해 나이 여든둘, 여전히 언론의 곁에 머무르는 대기자 김중배의 지나친 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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