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자유의 편에 서다. 

조지 오웰은 생전에 자신의 정치적 색깔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 독자들은 그를 좌파 사회주의 작가로 기억한다. 그러나 <동물 농장>. <1984>를 비롯한 그의 대표작들은 소련의 전체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처럼 조지 오웰은 좌익의 권위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우익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맹렬히 공격했다.그는 언제나 자유의 편에 서서 자유를 위한 글을 썼다. 그렇기에 언론의 자유를 어느 누구보다 지지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언론인보다 소설가로서 더 활발히 활동했던 것은 그 자신이 언론인보다 작가일 때 더 자유로울 수 있었던 당대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다.

BBC 에서의 오웰 : 자유의 신념을 지키다.
기자로서 오웰의 가장 주목 받는 경력은 영국의 공영방송 BBC에서 근무한 것이다. 오웰은 작가로서 어느 정도 명예를 얻은 뒤 1941년 세계 2차 대전 무렵 BBC에 입사하게 된다. 당시 BBC는 전시 선전 방송을 위해 지식인들을 대거 고용했다. 오웰은 ‘전시 중요업무’를 맡아 당시 대(對) 인도 방송을 담당하게 되었다. 오웰은 주로 인도에 보내는 뉴스 해설이나 문화 프로그램의 원고를 쓰는 일을 담당했다. 이 때 T.S. 엘리엇과 같은 당대의 유명 시인들과 인도의 라디오 청취자들에게 영국의 시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이 당시 BBC의 선전 방송을 위한 검열이 그를 괴롭혔다. 이 때 당한 검열에 대한 불쾌함을 그는 이후 그의 소설 <1984>의 ‘뉴스피크’ 라는 선전용 언어를 통해 드러낸다.
 
▲ 조지 오웰이 BBC에 보낸 퇴직서
오웰은 인도의 독립을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제국주의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영국이나 BBC의 보도지침의 방향과 정반대였다. 오웰은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1942년 8월 인도에서 폭동이 터졌고 이에 수많은 영국군들이 투입되었다. 폭동의 결과로 인도인 1,060명이 군대와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고 9만 1,836명이 체포되었다. 오웰은 이 사건에 대해 미국의 「파르티잔 리뷰」에 보내는 ‘런던 통신’에서 영국이 “결정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사건으로 오웰은 BBC를 떠나게 된다.
 
트리뷴(Tribune) 지에서의 오웰 : 자유로운 글쓰기
1943년 11월 의용군과 BBC를 사직한 오웰은 트리뷴지 문학 편집자로 취직해 1년 3개월 동안 근무한다. 트리뷴지에서 오웰은 BBC에서와 달리 비교적 자유로운 언론인 생활을 하게 된다. 당시 트리뷴지는 처칠 정부를 철저히 비판하는 진보적인 잡지였다. 당시 편집장이었던 베번 역시 어떤 잡지의 편집인보다도 표현의 자유를 지지해 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트리뷴지의 문예란에는 아나키스트나 트로츠키파, 그리고 독립노동당 같은 독자적인 입장에 있는 작가들의 글들이 자주 실리고 있었다. 특히 이 잡지는 전쟁의 이론적 근거가 기본적 인권의 옹호에 있다면 국내에서도 기본적 인권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태도를 관철하여 정부의 미움을 사는 동시에 당시의 전위적인 작가들로부터 널리 지지 받았다고 한다.이곳에서 오웰은 <나 좋을 대로: As I please> 라는 칼럼란에 다양한 글을 기고한다. 여기에서도 그는 다시 한 번 영국 정부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당당하게 낸다. 영국에 주둔하던 미국 군인들에 대한 반미 감정을 표출하는 칼럼이 그 중 하나다. 조지 오웰의 이 칼럼은 정부가 반미 감정이 악화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유로운 토론을 억제하는 것을 비판한다.
 
이후, 전쟁이 끝날 무렵 그는 옵저버 지의 종군 특파원으로 선발된다. 그는 어느 때처럼 현장에 제일 먼저 달려갔다. 그는 프랑스의 해방과 독일 점령을 취재하기 위해 파리와 퀼른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독일의 전후 참상을 취재했다. 이때도 그는 독일에 대한 무참한 보복 행위에 반대하며 인권과 자유를 지지하는 글을 써낸다.
 
작가인가, 기자인가?
그의 언론인으로서의 이력은 화려하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작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작가로서의 조지 오웰의 글에서 우리는 그의 기자로서의 면모를 더 잘 볼 수 있다. 그의 문학 작품들은 ‘르포타쥬 문학’의 대표로 여겨진다. 르포타쥬는 사회현상이나 사건에 대해 단편적인 보도가 아니라 보도자 자신의 식견을 동원한 심층취재를 바탕으로 대상의 에피소드 등을 곁들여 쓴 기사를 말한다. 픽션과 논픽션에 중간에 있는 이 독특한 장르는 작가와 기자라는 두 정체성 사이에 걸쳐있는 조지 오웰과 유사하다.
 
그가 쓴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위건부두로 가는 길> <까탈로니아 찬가>와 같은 초기 작품은 르포문학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그 이유는 그의 글쓰기 태도에 있다. 그는 언제나 현장에 제일 먼저 달려가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그는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쓰기 위해 하던 서점 일을 접고 두 달 동안 위건, 맨체스터, 셰필드 등 북부 탄광지대 일대를 다니며 하층민들의 열악한 삶을 직접 조사했다. 그는 노동자와 직접 면담하고 집회에도 참석했으며 탄광에도 들어가 보았다. 폐가 약했던 그는 지상에서 1~2마일 깊이의 탄광에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석탄 먼지의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그는 2월 리버풀로 옮겨 항만 노동자를 만나고 3월에는 셰필드에 이어 번즈리에 머물며 공산당 집회에 참석하는 등 끊임없이 현장을 누볐다.
 
이런 끈질긴 노력 끝에 쓰인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비학문적인 방식으로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영국의 실업 상태에 대한 가장 정확한 기록이자 영국 좌파의 실패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비판서로 읽힌다. 그리고 현재의 역사가는 물론 미래의 역사가들에게 가장 소중한 사료라고 평가받고 있다.
 
나는 왜 쓰는가 : 정치적 글쓰기
<위건부두로 가는 길>에서 나타나듯이 작가로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장’ 그리고 그 현장에서 포착한 ‘사실’이었다. 이런 점은 <까탈로니아 찬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스스로 까탈로니아 찬가를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책이라고 평한다. 그는 이 책을 쓸 때 문학적인 본능을 거스르지 않는 한 모든 진실을 말하기 위해 애를 썼다고 말한다. 이 책에는 프랑코와 내통한다는 혐의를 받는 트로츠키주의자를 변호하는 신문 인용문이 가득한 긴 장(章)이 있다. 문학이라기보다는 비문학에 더 가까운 딱딱하고 조금은 지루한 문체로 쓰여 있는 장이다. 이 부분에 대해 오웰은 존경하는 비평가로부터 “그런걸 뭐 하러 다 집어넣어요? 좋은 책이 될 만한 걸 보도물로 만들어버렸잖아요.”라는 평을 받았다고 자신의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 : Why I write>에서 밝히고 있다. 오웰은 그 비평가의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오웰은 말한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영국에선 극소수의 사람들만 알 수 있었던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을 어쩌다 알게 되었다. 그 사실에 분노하지 않았다면 나는 책을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이처럼 그가 자신의 문학에서 중요시 여긴 것은 정의를 위해 자신이 본 사실 그대로를 알리는 것이었다.
 
1946년 갱그럴에 게재한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 : Why I write>를 읽고 나면 그가 작가인가 기자인가 하는 질문은 무의미함을 알게 된다. 그의 ‘사실’을 알리려는 의지와 ‘자유’를 향한 투쟁은 기자와 작가 모두에게 절실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문학적 미학성을 희생시키더라도 ‘정치적’인 글을 쓰고자 했다. 그리고 여기서 그에게 ‘정치적’인 글이란 ‘자유’를 지지하는 글들을 말한다. 그는 언제나 스스로 기발하게 쓰기보다는 정확하게 쓰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고백한다. ‘사실’과 ‘자유’는 그 무엇보다도 그의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나는 앉아서 책을 쓸 때 스스로에게 ‘예술작품을 만들어내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쓰는 건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을 끌어내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남들이 들어주는 것이다.”
 
자유방어위원회 : 언론의 자유를 위한 외침.
자유를 향한 그의 열망은 그의 기자 생활에서도, 작품생활에서도 그리고 그의 정치적 활동에서도 나타난다. 자유방어위원회는 조지 오웰이 평생 단 한 번 참여한 자발적 결사였다. 1945년에 창설된 자유방어위원회는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고 이를 억압하는 이들에 반대하기 위한 결사였다. 당시 영국은 전시라는 비상사태 하에서 정부와 다른 의견을 내는 소수자들을 강경하게 탄압했다. 영국 정부는 현재 싸우고 있는 더 큰 자유를 확실하게 확보하기 위해 국내의 비판과 항의의 자유는 일시적으로 포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많은 평화주의자,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들이 투옥됐다. 오웰은 다른 지식인들과 이를 강렬히 비난했다. 그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한 번 상실되면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칼럼을 게재하고 있던 트리뷴지에서 아나키스트의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공원의 자유>를 발표했다. 그는 아나키스트들의 사상에는 반대했지만 아나키스트들이 영국 정부에 언론의 자유를 탄압받자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조지 오웰의 ‘좋은 글’을 위한 원칙.
그가 자유를 추구한 방식은 ‘좋은 글’을 통해서였다. 그에게 자유는 사실을 통해 획득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그런 글을 쓰기 위한 2가지 조언을 건넨다.
 
- 정직하게 세상을 살피려는 노력.
그는 “정직하게 세상을 살피려는 노력”이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조건이라고 말한다. 정직하게 살피면, 전체주의나 해로운 이념에 붙잡힐 위험이 많이 줄기 때문이다. 그는 <문학의 예방 : the prevention of literature>에서 “쉽고 힘찬 말로 글을 쓰려면, 두려움 없이 생각해야 하고, 두려움 없이 생각하려면, 정치적 정통에 속할 수 없다. (To write in plain, vigorous language, one has to think fearlessly and if one thinks fearlessly one cannot be politically orthodox)”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정직 다음 필요한 덕목은 용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웰은 이런 정직과 용기가 별개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정직 하지 않은 사람은 용기를 지닐 수 없고, 용기 없는 사람은 사물을 정직하게 살필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 정확한 언어 쓰기
1946년에 쓴 에세이 <정치와 영어 : Political and the English Language>에서 그는 언어 남용을 막기 위해서는 쉬운 말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완곡어를 혐오했다. 그에게 완곡어 사용이란 무방비 상태의 마을이 폭격당하고 주민들이 들판으로 쫓겨나고 가축은 기관총 세례를 당하는 모습을 ‘평화회복’이란 추상적인 언어로 상황을 왜곡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는 정치 담화와 공산주의 팸플릿에 나오는 이데올로기적인 표현, 완곡어, 과장어를 극도로 혐오했다. 이런 단어들은 구체성이 결여되어 사실을 왜곡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이를 피하기 위한 방안으로 그는 이렇게 조언한다.
 
“의미가 단어가 선택하도록 해야지 그 반대가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구체적인 대상에 대해 생각할 경우 먼저 단어로 표현하지 말고 생각부터 해보자, 그리고 머릿속에 그려본 것을 묘사하고 싶다면, 거기에 맞을 듯한 정확한 단어를 모색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무언가를 생각할 경우엔 애초부터 단어를 선택하는 쪽에 끌리기가 쉽다.”
 
아래는 조지 오웰이 제시한 6개의 좋은 글을 위한 원칙이다.
 

1 익히 봐왔던 비유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2. 짧은 단어를 쓸 수 있을 때는 절대 긴 단어를 쓰지 않는다.
3. 빼도 지장이 없는 단어가 있을 경우에 반드시 뺀다.
4. 능동태를 쓸 수 있는데도 수동태를 쓰는 경우는 절대 없도록 한다.
5. 외래어나 과학 용어나 전문 용어는 그에 대응하는 일상어가 있다면 절대 쓰지 않는다.
6. 너무 황당한 표현을 하게 되느니 이상의 원칙을 깬다.
 
 
“에릭 아서 블레어는 죽었지만 조지 오웰은 남았다.”
조지 오웰의 에세이를 번역해 한국에 소개한 이한중 씨의 말이다. 에릭 아서 블레어는 그의 본명이다. 인간 에릭 아서 블레어는 죽었지만 작가이자 기자 조지 오웰이란 이름은 여전히 우리에게 회자된다. 기자이자 작가였던 그. 그는 어느 기자보다도 현장에 먼저가 자신이 보고 느낀 사실을 전하려 했다. 그는 어느 작가보다도 더 정확한 언어로, 더 섬세한 언어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했다. 그리고 그는 어느 인간보다도 인류의 자유를 갈망했다. 오늘날까지 그의 책들이 끊임없이 읽히고 그의 이름이 기억되는 이유다.
 
참고서적
 
장영희, 『문학의 전설과 마주하다』, 중앙북스, 2010
이한중 역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한겨례출판사, 2010
박홍규, 『조지 오웰』 이학사 2003
조지 오웰 『까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2014
이한중, 『위건부두로 가는길』 조지 오웰, 한겨례 출판 옮김 2010
박금자, 『폴리티컬 코렉트니스 : 정의롭게 말하기』, 기자협회보,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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