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세 명이 옆으로 나란히 서면 꽉 찰 좁은 골목. 엉킨 골목들 사이로 대조적인 집들이 눈에 띈다. 한쪽은 갈색 벽돌로 단단하게 쌓아올린 건물이고, 다른 쪽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폐허로 변한 집이다. 몇몇 건물은 회색빛 시멘트를 입고 새 탄생을 준비하고 있다. 탄생의 그림자와 폐허의 음지가 묘하게 공존한다. 주민참여형 마을 재생사업이 한창인 서울 성북구 삼선교로 4길에 자리 잡은 장수마을의 모습이다.

▲ 장수마을 전경(서울시 ‘장수마을 가꾸기 설명서’ 자료)

재개발을 포기하고 새로운 대안을 시도하다
마을에 ‘장수(長壽)’라는 이름이 붙은 건 7년 전인 2008년이다. 마을 사람들은 어르신도 많이 계시고 또 동네가 오랫동안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장수마을로 이름을 정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이 동네는 서울시 재개발예정지구 삼선4구역으로 불렸다. 단순히 마을 이름만 바꾼 게 아니었다. 재개발과 관련해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난 것도 이때부터다. 도시가스도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환경이 열악했던 이곳은 2004년 재개발예정구역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지정만 됐을 뿐 진척은 없었다. 성곽 주변에 위치해 고도제한 등 제약조건이 많았고 사업성이 낮아 나서는 시행사가 없었다. 재개발 추진위원회조차 구성하지 못했다.

답보에 빠져있던 장수마을에 새로운 분위기가 싹 튼 것은 2008년이다. 전체를 밀어 버리고 쌓아 올리는 기존의 철거 방식 대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는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안개발연구모임’이라는 단체가 주민들에게 마을을 바꿔보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대안개발연구모임은 뉴타운식의 쫓겨나는 재개발이 아닌 거주민이 정착해서 살아가는 모델을 고민하는 모임이다. 연구모임과 주민들 사이에 미래 방향에 관한 토론이 이어졌다. 수년간의 논의 끝에 장수마을은 재개발예정구역에서 해제됐다. 이때부터 기반시설 정비가 진행됐고 마을기업인 ‘동네목수’와 주민협의회를 중심으로 주택개량과 경관관리 사업 등이 이뤄졌다. 동네목수는 대안개발연구모임이 집을 고치기 위해 꾸린 사회적 기업이다. 마을 재생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도시가스가 들어왔다. 지붕을 고쳤고 대문에도 새 페인트가 칠해졌다. 작은 화분들이 골목 곳곳에 자리 잡았다. 작은 변화지만 죽어있던 마을에 생기가 돌았다. 물리적인 공간이 변하자 주민들의 삶의 모습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 마을박물관에 전시했던 할머니들의 생태공예품 (장수마을 홈페이지 자료)

물리적 변화는 삶의 변화를 가능하게 만든다
마을 재생사업 이후 눈에 띄는 변화는 ‘마을 사랑방’이 만들어진 점이다. 이 공간은 주민들을 불러 모으는 공간이 됐다. 특히 외로운 어르신들의 ‘마음 충전소’로 자리 잡았다. 사랑방에서 만난 김욱자(69,여) 할머니는 “사랑방이 없을 때는 다른 할매네 집에서 모였는데 많이 모이지는 못했지. 좁으니까. 근데 인자 사랑방이 생겨가지고 못 보던 얼굴 덜도 많이 보여. 소일거리 하면서 얘기도 나누니까 참 좋지”라며 사랑방에 애정을 보였다. 이전에는 잘 볼 수 없던 주민들이 사랑방을 매개로 모인 것이다. 40년 넘게 장수마을에서 살고 있는 김 할머니는 영화를 처음 본 순간도 떠올렸다. “마을에서 영화제라는 걸 열어서 처음 영화를 봤는데, 이름은 기억이 안 나도 참 재밌었지. 우리 같이 늙은이덜이 언제 영화 보겠냐고.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이런저런 행사도 많아지고 참 좋아. 옛날에는 없던 일이지”라고 말했다. 김 할머니와 얘기를 나누는 짧은 시간에 사랑방에는 어느새 다른 할머니 세 분이 더 들어왔다.

김 할머니가 말한 ‘젊은 사람들’을 이끄는 사람은 주민협의회 배정학(49,남) 대표다. 배 대표는 대안개발연구모임에 소속된 회원이다. 배 대표는 동네목수에서 일하는 직원이기도 하다. 배 대표는 “2011년에 안암동에 살다가 장수마을로 이사를 왔다. 처음에는 마을 주민들과 신뢰 관계를 쌓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 어르신들을 보면 항상 먼저 인사했다”면서 “빗물이 샌다고 하면 지붕을 고쳐드리고 고장 났다는 것은 다 손봐 드렸다. 그냥 자잘한 것도 다 도와드리면서 마음을 얻었다”고 말했다. 외부인이 들어오는 것에 불편함을 느꼈던 주민들도 차차 경계심을 풀었다고 한다.

▲ 격월간으로 나오는 장수마을 소식지. 마을의 역사와, 주요 행사, 당부 이야기 등이 담겨있다.

동네목수와 주민협의회는 마을 주민과 공감대를 형성한 뒤에 집수리 외에 다양한 사업을 펼쳤다. 집을 고쳐 ‘마을 박물관’을 만든 게 대표적이다. 마을 아래쪽에 있는 박물관은 이곳에서 53년을 거주한 심재석 할머니의 집을 개조한 것이다. 심 할머니는 2013년 마을을 떠났지만 박물관은 장수마을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오래된 문짝부터 옛날 소반, 마을 사람들의 흑백사진, 유리 상자에 넣은 플라스틱 동네 모형 등이 전시 중이다. 배 대표는 “박물관에 오는 사람을 세지는 않지만 한해에 천 명 정도, 한 달에 백 명가량은 구경하러 온다”고 말했다. 10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지만 박물관 홍보 전단이 놓여 있을 정도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랑방에 모인 할머니들은 열매나 씨앗을 이용해 팔찌와 목걸이, 컵받침 등을 만들었다. 이런 생태 공예품을 ‘장수할멈솜씨’라고 이름 붙여 전시했다. 또 10명뿐이지만 마을 어린이들을 위해 ‘마을학교’를 열어 사진 교육, 목공 교육 등의 수업을 진행했다. 배 대표는 “사랑방, 박물관이라는 물리적 거점 공간이 생기면서 주민들이 모여 무언가 만드는 변화가 생겼다. 공동 작업 공간이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생태 공예품을 만들고 담금차 등을 만들어 판매하기도 했다. 다른 사회적 기업과 연계해 작은 결혼식에 제공할 음식을 사랑방에서 만든다”며 “지난해에 3~4번 정도 했는데 일당 8만 원을 받았다. 어르신들 입장에서 적은 액수가 아닌 만큼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올해는 단기적인 행사가 아닌 꾸준히 추진할 수 있는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 장수마을 홈페이지는 마을 연혁과 함께 마을에서 개최한 행사의 취지와 과정, 앞으로 있을 계획을 안내한다. 마을 홈페이지임에도 잘 관리되고 있다.

장수마을은 ‘뜨는 마을의 역설’을 알고 있다
장수마을은 경복궁 근처의 서촌 북촌 한옥마을, 천사 날개 벽화로 유명한 이화마을과 크게 다른 게 있다. 무척 조용하다는 점이다. 마을이 인기가 많아지면 세입자가 밀려나는 ‘뜨는 마을의 역설’ 때문이다. 급상승한 집값을 부담할 수 있는 주민은 많지 않다. 장수마을도 세입자 비율이 50% 정도다. 스스로 조용한 마을을 선택한 이유다. 벽화를 그리는 대신 집수리에 집중하고 ‘작은 카페’가 있어도 대놓고 홍보하지 않는다.

동네목수의 박학룡(46,남) 대표는 “큰 언론사에서 취재 요청이 오면 죄송하다고 말하고 돌려보내는 편이다. 보도가 돼 마을 이름이 알려지면 오히려 주민들에게는 안 좋을 수 있다”고 말했다. 동네목수가 만든 작은 카페에서 일을 보던 직원 A 씨도 “카페를 만든 이유가 명소처럼 만들어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가끔 마을을 배우러 오는 분들이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려고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마을기업과 협의회, 주민들이 뭉쳐서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었는데 이게 알려져 유명장소가 되면 세입자인 주민들이 쫓겨날 가능성을 우려한 것이다. 장수마을은 마을 개발의 아이러니를 일찌감치 고민했고 지금은 새로운 모델을 시도하는 중이다.

우리가 꿈꾸는 마을은
장수마을 주민참여형 마을 재생사업은 주민들이 집수리 비용을 일부 부담하긴 해도 대부분이 서울시 지원으로 이뤄진다. 기존 건축물 정비지원, 주민 공동이용시설 조성, 기반시설 조성 등에 총 32억 원의 예산이 들어갔다. 앞으로 마을을 유지하고 동네목수가 계속 운영되려면 지원 외에 지속 가능한 수익 모델이 필요하다. 또 다른 과제도 남아 있다. 마을에 10년 전에 집을 사서 들어왔다는 박두순(77,여) 할머니는 재개발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박 할머니는 “헐린다고 해서 8천만 원에 사서 들어왔는데 여태까지 변함이 없다. 집 구들장 아래로 하수구가 지나가는데 비가 많이 오면 무섭다”며 “어떻게든 재개발이 다시 돼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장수마을의 재생사업은 성공 완료형이 아니라 도전 진행형인 셈이다.

마을개발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든 주민 간의 갈등이 불가피하다. 집주인과 세입자 간의 이해관계가 상충하고 정부와 지자체가 어떤 정책을 펴느냐에 따라서 결과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입장일 뿐 선악으로 구분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마을이란 이익을 보는 공간이 아니라 이웃과 어울리며 살아가는 삶의 터전임을 잊지 않는 자세다. 배정학 마을협의회 대표의 말은 어떤 개발이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사업 이후에 이사 간 분은 없는 것으로 알아요. 대신 10가구 정도가 새로 들어왔어요.”

▲ 장수마을 야경. 한양도성 조명과 골목길 전봇대 불빛이 어둠을 밝히고 있다.(서울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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