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의 언론인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에 위치한 마석 모란공원 묘지. 이곳의 산비탈 한 면은 ‘민주열사묘역’이라 불린다. 노동자 전태일과 어머니 이소선 여사, 문익환 목사, 서울대생 박종철 등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이들이 잠들어있는 곳이다. 전태일 열사 묘에서 오른쪽으로 몇 걸음을 옮기면 잔디가 아직 다 덮이지 않은 새 무덤이 있다. 사진을 넣은 묘비엔 낯선 직함이 적혀있다. 언론인. 그것도 ‘참 언론인’이다. 故 성유보 전 동아일보 기자의 묘소다. 투사들이 모이는 이곳에 언론인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언론인은 직접 나서 싸우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어째서 투사의 자리에 묻힌 기자가 됐을까.

성유보는 1943년 6월 28일 경북 경산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잘하던 그는 대구·경북지역의 명문 경북중, 경북고, 그리고 서울대 문리대에 차례로 진학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기에 가장 좋은 단계를 밟았지만 그의 꿈은 애초에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60년 대구에선 2.28시위가 일어났다. 대구지역의 중·고등학생들이 학원자유를 외치며 시위에 나선 것이다. 여기에 참여한 성유보는 세상에 눈 뜨기 시작한다. 그는 이 무렵부터 동아일보를 읽으며 “어른들의 세계에 눈 떴다”고 말했다. 덕분에 전공도 부모님이 원하는 법학 대신 정치학을 택했다. 대학시절엔 자연히 학생운동에 매진했다. 그리고 함께 활동했던 문리대 동료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신문사에 입사했다. 자신을 눈 뜨게 해준 동아일보였다. 


기사 없는 기자

성유보는 기사 없는 기자다. 그의 이름으로 나온 기사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포털사이트에서 성유보가 신문사 재직 시절 작성한 기사를 검색하면 단 두 건이 나온다. 동아일보 수습기자 때 쓴 사건기사 하나와 한겨레 논설위원 때 쓴 칼럼 하나가 전부다. 외부 필자로 기고한 글과 인터뷰는 제법 되지만 정작 신문사 소속으로 남긴 글은 드물다.

그 이유는 우선 성유보가 편집기자였기 때문이다. 1968년, 스물여섯의 나이로 동아일보에 입사한 성유보는 이듬해 편집부로 배치를 받았다. 술을 못한 탓에 사회부나 정치부를 지망하지 않았다. 직접 기사를 작성하는 대신 다른 기자가 쓴 글을 다듬거나 고치는 역할을 했다. 그렇게 시작한 편집기자 생활은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기사가 적은 또 다른 이유는 신문사에서 일한 기간이 짧기 때문이다.

1975년 3월 17일 새벽, 성유보는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났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동료 기자, PD, 아나운서 등 112명과 함께였다. 바로 동아일보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사건이다. 유신헌법 발표 이후 노골화된 언론 탄압에 맞서 동아일보 기자들은 언론자유를 외쳤다. 노조결성, 언론자유수호선언, 제작거부, 편집국 점거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정부와 동아일보의 응답은 해고였다. 동아일보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기사를 낼 기회는 영영 사라졌다. 이때부터 성유보의 고단한 여정이 시작됐다.

오직 언론자유라는 외길을 걷다

“나는 이육사가 그의 시에서 읊은 것처럼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민주주의와 언론자유라는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노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라는 심정으로, 지금까지 오직 언론자유의 한길로 달려왔습니다.”

1976년 성유보가 법정에서 남긴 말이다. 그는 1975년 ‘청우회 사건’에 연루돼 구치소에 수감됐다. 대학 동료 몇몇과 함께 ‘청우회’라는 반국가단체를 조직했다는 혐의였다. 훗날 이 사건은 검찰의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임이 밝혀졌다. 위 발언은 이 사건으로 2심 재판을 받던 중에 한 발언이다. 성유보는 스스로 한 말처럼 언론자유의 한길을 달렸다. 기자라기 보단 투사에 어울리는 삶이었다.

성유보가 다시 편집을 맡은 건 1985년의 일이다. 해직기자들이 모여 만든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발간한 월간 <말>지의 편집인이 됐다. 출간 당시 이 잡지의 모든 기사엔 그것을 작성한 기자 이름이 없었다. 정부의 허가가 나지 않은 잡지였기에 탄압으로부터 기자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발행인과 편집인의 이름만이 겉면에 인쇄돼 나갔다. 이름을 올린다는 것은 곧 잡혀간다는 뜻이었다. 잡지가 발간되면 편집인은 곧바로 경찰서에 잡혀가 구류를 살았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편집인을 자처하고 잡혀가기를 반복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해직기자들이 주축이 돼 한겨레 창간준비에 들어갔다. 성유보 역시 이 과정에 적극 참여했다. 마침내 88년 한겨레가 창간됐을 때 그는 초대 편집위원장을 맡았다. 그가 맡은 편집국은 혁신적이었다. 한겨레 안수찬 기자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에서 성유보가 단행한 혁신적인 조치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전에 없는, 전무후무한 부서들을 만들었어. 정치부가 아니라 정치경제부를 만들었지. 정치와 경제의 결탁을 감시하는 게 언론의 역할이니까. 사회부가 아니라 인권사회부를 만들었지. 검찰, 경찰 자료를 받아쓰는 게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도하는 게 언론의 역할이니까. 한국 언론 최초로 여론매체부도 만들었지. 권력을 감시하는 게 언론이라면 언론권력을 감시하는 것도 언론이니까.”(안수찬 기자 페이스북)

한겨레에서 성유보는 그간 동아투위 활동에 쏟았던 노고를 인정받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한겨레 생활 역시 오래 가지 않았다. 창간 3년 후 그는 한겨레를 나왔다. 내부의 여러 사정이 있었지만, 그는 충분히 남아서 명예를 추구할 수도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성유보는 언제나처럼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신문사를 나온 뒤로 성유보는 시민단체의 길을 걸었다. 대표적인 것이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후신인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 활동이다. 민언련은 언론을 민주사회의 주인인 시민의 품으로 돌려주자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시민단체다. 오늘날까지도 기존 언론에 대한 감시와 비평, 언론 교육 등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이어오고 있다. 성유보는 이사장으로서 이 민언련의 활동에 앞장섰다. 이밖에도 언론개혁시민연대, 청암언론문화재단,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등지에서 부나 명예와는 거리가 먼 활동을 계속했다. 언론계에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 자리엔 어김없이 성유보가 있었다.

환갑을 넘어가면서부터 그의 인터뷰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이제 몸도 힘들고 좀 쉬어야 하는데’와 같은 말들이다. 그는 늘 그렇게 말하면서도 늘 현장에 나왔다. 쉬고 싶고 쉬어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가 바라는 언론자유가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에도 그는 세월호 특별법을 걱정해 시청광장 나왔다. ‘세월호 진상규명’이라 쓰인 조끼를 입고 맨바닥에 앉아있던 이 70대 노인은 여전히 국내언론을 걱정했다.

“언론은 육하원칙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다. 사물을 누구의 눈으로 보느냐가 중요하다. 예를 들면 독재권력의 눈으로 보느냐, 아니면 대자본의 눈으로 보느냐, 아니면 국민의 눈으로 보느냐.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언론은 국민의 눈으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기레기 언론이 됐다.”(뉴스타파와의 인터뷰 중)

이것이 성유보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다. 마지막까지 국내 언론 현실을 걱정하던 성유보는 광장을 다녀온 열흘만인 2014년 10월 8일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

“깊은 언론의 겨울에 또 한 분의 스승을 잃는 것은 베인 가슴에 쓴 소주를 붓는 것 같은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40년 전 30대 초반의 가장이었던 그를 동아일보에서 쫓겨나게 했고 평생을 풍찬노숙하게 했던 그 꿈이야말로, 그때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아름다운 꿈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성유보 선생의 영전에 나직이 외쳐보고 싶습니다. 자유언론 만세.”(뉴스타파)

독립언론 뉴스타파의 성유보 추모영상 마무리 멘트다. 진행자는 ‘만세’를 온전히 발음하지 못하고 떨리는 입을 급히 앙다물었다. 2012년 MBC에서 해직된 최승호PD다. YTN에서 해직된 노종면 기자도 자신이 진행하는 국민TV의 <뉴스K>에서 성유보 부고 기사를 길게 전하며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다. 해직언론인들 외에도 수많은 후배 언론인들의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미안해요 성유보씨, 당신처럼 꿋꿋하게 살지 못해서요.”(김선주 전 한겨레 기자, 한겨레), “저 스스로 되짚어보아도 ‘성유보’가 되기엔 지나치게 편히 살아왔습니다.”(손석춘 건국대 교수, 미디어오늘)

언론인들의 반응은 일관됐다. 먼저 타협 없이 한평생 언론자유를 위해 헌신한 성유보를 상찬하고, 그 앞에 부끄러운 자신의 삶을 고백했다. 그만큼 성유보는 누군가는 꼭 가야 하는 길, 그러나 누구도 함부로 걸을 수 없는 길을 걸었다는 말이다. 그가 열사들과 나란히 묻힌 이유다.

동시에 성유보는 진짜 기자다. 평생 신문사에 몸담지 않았어도, 남긴 기사가 적어도 기자다. 독재정권 시절 그는 말을 할 수 없어 거리로 나왔다. 언론이 말할 권리를 어느 정도 되찾았을 때도 안주하지 않았다. 그라고 신문밥 먹는 기자의 꿈을 버렸을 리 없다. 적당히 타협하면 얼마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유보는 그러지 않았다. 기자들이 권력과 자본에 타협하지 않고 국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조건을 먼저 만들려고 했다. 그래야 기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자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고 온몸으로 실천했다. 그래서 성유보는 투사인 동시에 ‘참언론인’이다.

“우리 모두 성유보가 되겠습니다”

지난 4월 국제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는 세계 언론자유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전체 199개 나라의 언론자유지수를 평가했다. 여기서 한국은 아프리카의 나미비아와 함께 공동 67위에 올랐다. ‘부분적 언론자유국’에 해당하는 순위다. 동아투위가 결성된 지 정확히 40년이 되는 뜻 깊은 해에 든 부끄러운 성적표다. 40년 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우리 언론이 갈 길은 여전히 멀다. 때로는 권력이, 때로는 자본이, 때로는 언론 스스로의 관성이 언론자유를 가로막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거치며 언론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성유보를 조문한 후배 언론인들은 “우리 모두 성유보가 되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 성유보가 못 다 이룬 꿈을 미약하나마 마저 이어가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런데 언론자유는 그의 생전보다도 오히려 후퇴했다. 이 다짐이 영결식장을 나와 더 많은 곳에서, 더 절절히 울려 퍼져야 할 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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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칼럼] 그 사람 성유보...미안해요”, <한겨레>, 2014.10.14.
“만장:‘내릴 수 없는 깃발’/이창곤”, <한겨레>, 2014.10.12.
“성유보, 기사썼다 끌려가던 그 시절, 지금은...”<미디어오늘>, 2011.03.17.
“성유보 전 위원장, 떠나는 길을 배웅하다”, <기자협회보>, 2014.10.10.
“‘성유보 선생 별세’ 성한표 한겨레 전 편집국장 추모사”, <한겨레>, 2014.10.11.
“[손석춘 칼럼] ‘성유보의 길’을 걸으려는 젊은 언론노동자들에게”, <미디어오늘>, 2014.10.14.
“[이채훈의 힐링클래식] 성유보 선새 영전에 드리는 음악 한 송이”, <미디어오늘> 2014.10.13.
“정의의 초대장이 도리 당신의 죽음/최민희”, <한겨레>, 2014.10.20.
“[조사] 이부영이 54년지기 성유보를 보내며...”, <오마이뉴스>, 2014.10.09.
“진짜 기자의 죽음, 그가 한국 사회에 던지는 질문”, <미디어오늘>, 2014.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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