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이화여자대학을 방문한 김영희 대기자가 남긴 말이다. 이날 언론정보학과 워크숍에 초청됐던 김 대기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언론인이 되기 위해선 문학, 사학, 철학을 아우르는 폭넓은 독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방대한 독서량이 뒷받침될 때 세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주체적인 안목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해 연합TV와 인터뷰에서도 그는 독서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기자로서 가장 노력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아나운서의 질문에 그는 "첫째 독서, 둘째도 독서, 셋째 역시 독서다"라 답했다. 그는 독서를 크게, 정보를 알기 위한 독서(1단계), 지식을 쌓기 위한 독서(2단계), 가치판단을 위한 독서(3단계)로 나눠 설명했다. 이 단계들의 독서를 다 하려니 하루 24시간은 너무 짧았다. 그가 골프도 끊고 저녁 약속도 잘 잡지 않는 이유다. 

그가 이토록 독서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데엔 초년병 시절 만났던 사람들의 영향이 컸다. 실제로 그는 2007년 관훈저널 봄호 미니회고록에서, 1958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만난 외신부 차장 송건호(한겨레 신문 창간인)과 편집자 최정호(전 연세대 교수)에 대해 얘기했다. 그들의 방대한 독서량이 김 대기자에게 지적 자극이 됐고 공부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당시 이들이 추천한 책을 사는데 월급 전부를 쏟아 부을 정도였다.
 
1965년 중앙일보 외신부 기자로 입사해 1972년부터 1978년까지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만난 미국 대기자들은 더 큰 자극을 줬다. 특히 뉴욕타임스 대기자 해리슨 솔즈베리의 집을 방문했을 때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로 된 책과 막대한 자료들을 봤던 충격은 상당했다. 칼럼니스트 조지윌과 조셉 크래프트를 인터뷰하러 그들의 서재를 찾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허버트 마르쿠제와 존 롤스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넘나드는 철학 서적들을 보고 그가 깨달은 점은 분명했다. 기자로서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독서가 중요하단 사실이었다.
 
말로만 독서의 중요성을 외친 기자가 아니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읽고 공부하는 현역 기자였다. 1970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컬럼비아대 저널리즘스쿨에서 1년간 국제보도과정을 공부하면서도 아파트에 텔레타이프(글을 기록해 보내는 전신장치)를 설치해 기사를 써 보냈다. 이듬해부터 워싱턴특파원으로 발탁돼 워터게이트 사건, 베트남 전쟁 등으로 조용할 날 없던 미국 곳곳을 누비면서도 공부는 쉬지 않았다. 1978년 조지메이슨대 철학과를 졸업할 때조차 그는 기자 신분이었다. 
 
이후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다 편집국 국장으로 일하면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은 굽히지 않았다. 쉰 한 살의 나이에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올라 아들뻘 되는 학생들과 공부하게 된 것도 이 열정 때문이었다. 1988년 미주리대학교대학원 신문학 석사과정을 졸업할 당시 그의 성적은 9과목 A에 1과목 B였다. 그때에도 그는 현역이었다.
 
이토록 열심히 공부한 내용들은 사라지지 않고 그의 글에 묻어났다. 특히 현안을 설명할 때 역사적, 철학적 설명을 풍부하게 제시하는 것은 그의 글이 차별화되는 점이다. 현재와 비슷한 선례를 역사에서 찾아와 그 해결책까지 밝혀내는 것은 그의 독서량이 만들어낸 또 다른 특징이다.
 
[김영희 칼럼] 저 불통인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중앙일보 2015년 1월 16일 자)

…프로이트의 다빈치 해석은 역사심리학(Psychohistory)의 효시다. 직역하자면 심리학적 역사가 맞지만 한국어의 어감상 역사심리학이 자연스럽다. 역사심리학은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id)과 자기의식(ego)과 어린 시절 부모와 스승에게서 배운 가르침의 잔상으로서의 무의식적 양심(superego) 같은 내면세계를 역사적인 인물에 적용하여 현재의 문제에 대한 답을 과거에서 찾는 방법이다.

…박 대통령은 어머니를 재일 조총련계 암살자의 흉탄에 잃었다. 아버지를 시해한 사람은 아버지의 오랜 친구요 측근인 중앙정보부장이다. 그의 의식 깊숙이 인간에 대한 불신의 트라우마가 완고하게 자리 잡았어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신당동으로 이사한 뒤에 겪은 인심의 변화를 이렇게 적었다. “당시 아버지의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조차 싸늘하게 변해가는 현실은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사람들은 뚜렷한 신념 없이도 권력을 좇아 이쪽과 저쪽을 쉽게 오갔다. 서로에 대한 신의는 없고 얄팍한 계산만이 난무했다.” (후략)
 
위 칼럼은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정책 실패 원인을 프로이트의 역사심리학으로 설명했다. 연관이 적어 보이는 분야에서 현안을 밝힐 열쇠를 찾아내는 그의 능력이 한껏 발휘된 예였다. 같은 방법으로 해결책을 제시한 글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김영희 칼럼] 세월호 수습, 거대담론을 경계한다 (중앙일보 2014년 5월 9일 자)

『국부론』(1776)의 저자 애덤 스미스는 인간 본성에 관한 저서 『도덕 감정론』(1759)에서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자 자신의 슬픔과 분노와 같은 정도의 슬픔과 분노를 느끼는 일체감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일체감이 없으면 둘 사이에 진정한 대화가 안 된다. 피해자는 제3자의 냉혹과 무신경에 분노한다.” 스미스는 불행을 당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과 다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일치하는 것을 볼 때 가장 큰 위안을 받는다고 강조했다. 애덤 스미스는 255년 뒤 한국에서 일어날 엽기적인 비극의 희생자들의 슬픔과 분노에 동참하는 우리의 감정을 잘 대변해준다.

…다산 정약용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다산은 1817년 썩은 나라를 새롭게 개혁한다는 ‘신아지구방(新我之舊邦)’을 위한 『경세유표(經世遺表)』를 썼다. 요즘 말로 국가개조의 마스터플랜이다. 그러나 그는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힘든 백성들의 참상이 눈에 밟혀 『경세유표』를 미완으로 남겨두고 바로 『목민심서』를 저술했다…정부는 애덤 스미스의 통찰에 귀를 기울여 진정으로 희생자 가족에 다가가 교감하고, 다산이 『경세유표』를 미완으로 남겨두고 『목민심서』를 펴낸 지혜를 모델 삼아 사건 수습의 우선순위를 정확히 매겨 실천에 과감해야 한다. 
 
위에서 보듯 그의 글은 당위성만을 강조한 주장 일색의 글이 아니다. 애덤 스미스와 정약용과 같이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의 이론을 근거로 들어 객관성을 갖췄기 때문이다. 최근 그가 동북아 안보 전문가들과 펴낸 『동북아 국제정치 질서, 어디로 가나』에서도 그의 특징은 뚜렷이 나타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는 밤하늘의 별을 관찰하다 마당의 우물에 빠져 하녀의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멀고 높은 것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발아래부터 살피자는 경구다. 동북아평화협력구상으로 이 지역의 긴장을 완화하고 장기적으로 평화의 비전을 실현하는 것도 가까운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4강들의 이익에 맞는 선택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말대로 작은 것부터 실천하여 접촉을 통해 남북한이 함께 변해야 한다. 접촉과 교류의 축적으로 북한 문제라는 분모를 최대한으로 키워 핵이라는 분자를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173쪽)
 
현안과 비슷한 사례를 동서고금에서 발견해내는 유비추리 능력과 통찰력 뒤엔 그만의 취재방식이 있었다. 지난 2013년 9월 문학 월간지인 '문학사상'과 인터뷰에서 그는 "다른 기자들이 보지 못한 걸 보여주려면 해당 사안과 관련된 역사적, 철학적 저서들을 모두 들여다봐야만 한다"고 말했다. 막대한 자료를 읽고 분석하는 역사적 고증작업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한 예로 2013년 7월 정치인들의 막말이 이슈가 됐을 때도 그는 <플루타아크 영웅전>부터 키케로, 칸트의 글들을 찾아보고 난 뒤에 펜을 잡았다. '정치인들의 거친 입을 어쩔 것인가'란 칼럼은 그렇게 나온 글이었다. 
 
[김영희 칼럼] 저 정치인의 거친 입을 어쩔 것인가 (중앙일보 2013년 7월 26일 자)

로마의 대정치가 키케로(기원전 106~43)는 말 잘하는 변호사·변론가였지만 자신의 언어 능력에 한계를 느끼고 수사학을 공부하러 그리스로 유학을 갔다…“바로 핵심을 말하라. 청중을 울리고 웃겨라. 청중이 열광하면 얼른 자리에 앉아라. 눈물처럼 빨리 마르는 것이 없다.” 거기서 키케로가 두 계절 배워 정리한 것이 서양 사회에 오늘까지 전해지는 수사의 기본이다. 그는 말하는 기술(웅변)이 없으면 지식이 힘을 못 쓰지만, 지식이 없이 입으로만 하는 웅변은 쓸모없다고 가르쳤다.

네덜란드 인문주의 신학자 에라스뮈스(1466~1536)는 『어리석음의 찬미』라는 책에서 그리스 비극시인 에우리피데스의 말을 소개했다. “인간은 두 개의 혀를 가졌다. 하나는 진실을 말하는 혀, 또 하나는 상황에 따라 말하는 혀다.” 몰론과 에우리피데스의 경구를 기준으로 보면 오늘 우리 정치인들의 말본새는 기본도 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두 개의 혀 중에서 상황에 따라 말하는 혀만 사용할 뿐 진실과 사실 관계는 안중에 없다.

라틴어로 웅변을 의미하는 오라티오(Oratio)의 어간(몸통)은 이성과 지성이라는 의미의 라티오(Ratio)다. 상황만 좇는 것은 대중의 인기만 좇는 것이다. 우리 정치인들은 대중을 끌어모아 상대 진영을 압도하기 위해 가장 자극적이고 천박한 용어로 말한다. (후략)

올해로 기자생활 57년째를 맞는 그는 후배 기자들을 위한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지난해 4월 기자협회보에 낸 글에서 그는 "비판적인 눈은 사실(Fact) 뒤의 진실(Truth)을 간파하는 눈이다"라고 말하며 "그건 사설과 칼럼을 쓰는 경우뿐 아니라 취재와 보도에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비판이 빠진 보도는 냉소주의(Cynicism)란 것이다.
 
그는 한국 언론사의 인사권자와 경영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 역시 꺼리지 않았다. 지난 2013년 9월 문학사상과 했던 인터뷰를 포함한 많은 자리에서, 그는 한국 언론에서 더 많은 대기자가 나오려면 언론사의 최고 인사권자와 최고 경영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고 노력하는 기자의 모습을 알아볼 줄 아는 인사권자의 안목과 최고 경영자의 신문경영철학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기자는 읽는 대로의 존재다(Journalist is what he or she reads).’ 4년 전 신문의 날을 맞아 중앙일보에 그가 올렸던 글의 제목이었다. 기자 생활 평생 줄곧 강조해온 그의 철학을 함축하는 말이기도 했다. 실제로 세 차례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그가 전한 메시지는 일관됐다. 기자는 독서와 공부를 천직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결국 기사를 쓰는 바탕 실력은 문․사․철의 넓은 소양에서 나오니까 미친 듯 독서해야 상위 5%인 기자가 될 수 있어요”라 했다.
 
올해로 여든이 된 그지만 독서에 대한 애정은 식을 줄 몰랐다. 메일을 통해 그는 최근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란 책을 읽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 책의 저자이자 미국 유명 인류학자인 잭 웨더포드와 메일을 주고받으며 책을 읽는다고 덧붙였다. 이와 별개로 독일 통일에 관한 책들과 니체의 저작들은 항상 읽는다고도 했다. 읽고 있는 책들의 언어는 영어, 일본어, 독일어로 다양했다. 그가 분기별로 외국에 나가는 것은 이 원서들을 직접 구입하기 위해서다.
 
지난 2009년 관훈저널 겨울호에서 그는 읽기에 존재할 수 있단 자신의 철학에 공감하지 못할 후배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말도 남겼다. "기자가 왕성한 독서를 한다고 반드시 성공이 보장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동시에 우리는 독서가 싫은 사람은 기자로, 아니 적어도 라이터(Writer)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참고 자료>
 
2007. 3. 25. 102호 관훈저널 봄호. 미니회고록, ‘엉덩이가 어지간히 무거운 사람’
2008. 11. 26. 한국기자협회. ‘김영희 대기자는…‘
2009. 2. 신문과 방송. ‘공부하고 준비하는 기자돼야’
2009. 12. 24. 113호 관훈저널 겨울호. ‘나의 기자 반세기’
2011. 4. 7. 중앙일보 [신문의 날 특별기고] ‘기자는 읽는 대로의 존재다‘ 
2011. 5. 11. 한국기자협회 ‘“공부는 나의 힘” 조중동 공부 열풍‘
2012. 연합뉴스TV 인터뷰
2013. 7. 26. 중앙일보, [김영희 칼럼] ‘저 정치인의 입을 어쩔 것인가’
2013. 9월호 문학사상. 특별 인터뷰, ‘소설가 김영희’
2014. 4. 2. 기자협회보, ‘비판없는 보도는 냉소주의다’
2014. 5. 9. 중앙일보, [김영희 칼럼] ‘세월호 수습, 거대담론을 경계한다’
2015. 1. 16. 중앙일보, [김영희 칼럼] ‘저 불통인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2015. 3. 『동북아 국제정치 질서, 어디로 가나』, 김영희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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