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현수막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지난 2월 24일 오후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도로. 횡단보도 근처에 걸려 있는 현수막들이 매서운 겨울바람에 나부꼈다. 대한민국 정치의 중심지답게 각 정당에서 내건 정책 홍보, 의원들이 주최하는 토론회, 각종 포럼 등을 알리는 것들을 합쳐 20개가 넘었다. 그런데 현수막은 아무데나 걸면 안 된다. 지정된 자리가 있다. 그걸 어기고 신호등이나 나무에 매놓으면 불법이다. 옥외 광고물 관리법 위반이다. 5백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릴 수 있다.

이 기준으로 주변의 정당 현수막들 가운데 불법에 해당하는 게 몇 개인지 헤아려봤다. 그 자리에서 4개를 잡아냈다. 지하철 9호선 국회의사당역 3번 출구에는 새정치민주연합이 정치위원을 모집한다는 현수막을 횡단보도 근처에 걸었고(<사진1>), 6번 출구에는 새누리당이 공무원연금 개혁에 공무원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현수막을 가로수에 매달았다(<사진2>). 시선을 돌려 보니 부자재벌 감세를 철회하면 세수확보가 가능하다는 정의당의 현수막도 눈에 띄었다. 국회의사당으로 들어가는 정문 바로 옆이었다.(<사진3>)

▲ 사진 1
▲ 사진 2

 

▲ 사진 3

근처에 지정 게시대가 없는 게 아니다. 국회의사당역 출구 앞에 영등포구에서 2개를 세워놓았다. 새정치민주연합 홍보담당자는 “게시대가 이미 가득 차, 자리가 없을 경우에는 게시대 외의 구역에 현수막을 걸어왔다”고 말했다. 법을 만드는 국회 앞에 불법 현수막이 걸려 있는 풍경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왜 그럴까? 정당이라서 눈치를 보는 걸까? 신고하면 단속을 하기는 할까?

국회 앞 현장을 서울불편신고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영등포구청 해당과에 신고했다. 사진을 첨부해 불법 게시물이 걸려 있다고 위치를 설명했더니, 신속히 철거하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다음날 신고자에게 알리는 문자 메시지가 왔다. 4개를 모두 철거 완료했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신고를 하면 조치는 즉시 이뤄진다. 정확히 말하면, 신고를 해야만 그제서야 조치한다. 회기동 경희대학교 앞 삼거리에는 정의당에서 게시한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횡단보도 옆 전봇대에 매달려 있으니 불법이었다. 신분을 시민이라고 말하고 불법 광고물을 철거해 달라는 민원을 2월 23일에 제기했다. 이튿날 동대문구청 정비팀이 현장을 방문해 떼어냈다는 답변을 받았다. 구청 담당자는 “불법게시물이 워낙 많아 철거하기가 쉽지 않다. 하루에 두 번 정비팀이 현장에 나가 단속한다”고 했다. 그러나 정의당의 현수막은 2월 내내 걸려 있었다. 기자도 신호 대기시간에 자주 쳐다봤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신고를 하면 신고한 현수막만 떼어간다는 것이다. 다른 불법 현장에는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유동 인구가 많은 지하철 2호선 신촌역에 가 봤다. 지정되지 않은 위치에 정당의 현수막들이 두세 개 눈에 들어왔다. 다른 것들은 놔두고 6번 출구 옆에 걸린 정의당의 건강보험료 관련 현수막에 대해 철거 민원을 제기했다. 이튿날 마포구청 도시경관과는 ‘신고한 민원에 대해 현장 확인 후 조치하겠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현장에 다시 가봤다. 신고한 현수막은 사라졌지만 다른 불법 현수막은 그대로였다. 7번 출구 앞에 새누리당의 공무원연금 관련 현수막은 여전히 걸려 있었다. 구청 담당자는 “외근자가 미처 못 봤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그 현수막의 위치는 앞서 떼어낸 현수막이 걸려 있던 6번 출구의 대각선 맞은편이다. 등을 180도 돌리면 곧바로 시야 정면에 들어온다. 빨간색이라서 더 눈에 띈다.

이처럼 구청의 태도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다. 동대문구청 담당자는 정당 현수막의 경우 “공익에 관련된 것이라고 판단해 시민들에게 노출될 수 있도록 일정 시간 그대로 놔둔다”고 말했다. 서대문구청 건설관리과 광고물관리팀 담당자는 “민원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 지정 게시대 이외에 설치된 정당 현수막이라 하더라도 강제로 철거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 근거로 정당법 37조 2항을 들었다. 그 조항을 보면 ‘당의 정책이나 정치적 현안에 대한 입장을 인쇄물·시설물·광고 등을 이용해 홍보하는 행동을 보장한다’고 돼 있다.
그러나 행정자치부 주민생활환경과 담당자는 그 조항이 아무 곳에나 현수막을 걸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실제로 선거철에는 구청들도 소극적이지 않다. 서울시 25개 자치구를 상대로 정보공개를 청구해 입수한 답변서에 따르면, 지난해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마포구는 예비후보자들에게 유선 전화 17회, 공문 3회 등을 통해 현수막 자진 수거를 요구했다. 구청의 의지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서울의 자치구들이 선거철에는 불법 선거운동에 대한 사회적 감시를 의식하지만, 선거철이 아닌 경우에는 굳이 정당과 불편한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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