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북구 수유동 한빛맹학교 영어교사인 정의석씨(남,36)는 지인들과 식당에 갔다가 황당한 일을 겪었다. 정 씨가 앉은 테이블의 반찬 가지 수와 옆 테이블의 가지 수가 달랐다. 정 씨는 전맹인(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다. 그날 식당에 동행한 이들 모두가 시각장애인이었다. 약간의 시력이 남아있던 일행이 “왜 우리 반찬과 저기 반찬이 다르냐”고 묻자, 가게 주인은 “보이냐”고 되물었다고 정 씨는 기억했다. 밥 한 끼 사먹는 일에서도  시각장애인은 차별을 겪는다.

정 씨는 동네 슈퍼에서 물티슈 하나 사기도 망설인다. 그는 “몇몇 사람들은 우리가 눈이 안 보이는 점을 악용한다”며 “일부러 유통기한이 지나거나 잘 팔리지 않아 재고가 쌓인 제품, 혹은 상대적으로 비싼 물건을 내놓는다”고 말했다. 남들과 같은 돈을 내고 물건을 사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피해를 입는다는 얘기다.

시각장애인을 비양심적으로 대하는 사람들만이 문제는 아니다. 김유림씨(남,24세)는 지난해 7월 대학 친구와 서울 종로구 세롱로의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갔다가 허벅지에 멍이 크게 들었다. 고객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통로에 진열한 낮은 가판에 부딪치면서였다. 김 씨도 전맹인이다. 비장애인의 눈길을 끄는 책장 진열 방식은 시각장애인에게는 장벽으로 작용한다. 광화문 교보문고에는 하루 4만 명 정도가 다녀가지만 시각장애인을 배려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맹인을 위한 점자 유도 블록이 전혀 없다. 서점뿐만이 아니다. 서울 중구 명동의 대형 백화점 두 곳에도 점자 유도 블록이 없다. 시각장애인에게 서점이나 백화점 등 소비 공간의 물리적 제약은 여전히 많다.

정의석씨는 “그래도 요즘은 백화점에서 물건 사는 일이 쉬워졌다”고 이야기한다. 백화점에 미리 전화하면 접객 서비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백화점은 미리 전화한 시각장애인이 백화점에 도착하면 직원 한 명이 장애인을 전담한다. 쇼핑하는 동안 따라다니며 어떤 제품을 원하는가를 묻고 제품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하지만 정 씨는 말한다. “우리가 부자도 아닌데 백화점에서만 물건을 살 수는 없잫아요.” 백화점이 아닌 일반 상점의 서비스는 대체로 좋지 않은 편이다. 정 씨는 서울 종로의 한 SPA브랜드에서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가 냉대를 당했다. 정 씨는 “직원이 귀찮게 하지 말고 안 살 거면 가라고 말했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고 덧붙였다. 이런 이유로 시각장애인은 직접 정보를 찾고 가격을 비교할 수 있는 온라인 쇼핑을 자주 이용하게 된다. 여기는 사정이 어떨까?

온라인 쇼핑도 산 넘어 산
시각장애인은 스크린 리더기를 이용해 온라인에서 웹 서핑을 한다. 스크린 리더기는 모니터 상의 문자들을 읽어주는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기자는 스크린 리더기가 설치된 컴퓨터를 이용해 유명 온라인 쇼핑사이트에서 도서를 구입하려고 했다.  눈을 감고 전적으로 소리에만 의존했다.

우선 웹 사이트에 들어가 도서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검색창을 찾아 키워드를 입력하기까지 3분 정도 걸렸다. 검색창(사진1-③)에 도달하기까지 웹페이지 상단의  정보(사진1-①②)를 모두 들어야만 했다. 검색 후 ‘바로 구매’(사진2-④) 버튼을 찾아 누르는 데까지 10분이 걸렸다. 전적으로 소리에  의존하므로 버튼을 찾기 위해서는 다른 정보들을  모두 들어야만 했다. 원하는 물건을 찾아 검색하고 구매 버튼을 누르기까지 15분 가까이 걸렸다. 비장애인의 경우, 인터넷 쇼핑창에서 원하는 도서를 찾아 구매버튼을 누르기까지 5분이면 충분하다. 이런 어려움을 두고 한국웹접근성인증평가원 홍금표 상무는 "쇼핑몰 관련업체들이 장애인을 위한 웹 접근성 준수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웹 접근성(Web Accessibility)이란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웹 사이트의 모든 정보를 동등하게 이용하도록 보장하자는 개념이다.

▲ 사진 1
▲ 사진 2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적용되는 사업장의 범위는 2013년 4월 11일부터 넓어졌다. 법안 시행령은 공공 및 민간 웹 사이트가 웹 접근성 준수를 의무화하도록 규정했다. 이에 따라 보건복지부는 웹 접근성을 높이라고 인터파크나 옥션 같은 온라인 쇼핑업체에 지시했다. 예를 들어 스크린 리더기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미지 파일을 줄이고, 지나치게 방대한 정보를 한 페이지에 넣지 않는 식이다.얼마 전까지는 온라인 쇼핑 장벽이 구매 버튼을 누른 후에도 존재했다. 국내에서는 인터넷 결제를 위해 액티브X를 설치해야 했기 때문이다. 액티브X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 멀티미디어 파일을 재생하거나 웹 서비스를 지원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이 소프트웨어의 설치는 음성으로 안내되지 않았다. 설치를 위한 별도의 창을 스크린 리더기가 인식하지 못했다. 스크린 리더기를 통해 구매과정을 체험하려던 기자는 결국 액티브X 설치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액티브X 설치 후의 카드 결제 과정도 음성지원이 되지 않아, 혼자 힘으로 결제를 끝낼 수 없었다. 그러나 현재는 액티브X가 사라졌고, 다른 결제 시스템으로 대체됐다. 

보건복지부가 지시한 지 1년 9개월여가 지난 지금은 어떨까. 인터파크, 옥션 등 대형 온라인 쇼핑몰은  화면의 이미지 파일을 줄이지 않았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결제시스템 음성지원이 언제쯤 가능하냐고 이들 쇼핑몰에 물었지만 "연내에는 계획이 없다"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인터파크의 경우 “웹 접근성 담당 부서가 없어 답을 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쇼핑몰들은 “카드사가 결제과정을 간소화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국웹접근성인증평가원 홍금표 상무는 "결제대행사(PG사)의 결제시스템이 접근성을 준수하지 않는 곳이 많아서 쇼핑사이트를 이용하는 장애인들이 혼자 힘으로 물건을 구매하기 힘든 현실"이라고 말했다. 결제를 대행하는 카드사의 노력도 필요하다는 뜻이다.

롯데카드는 지난해 12월 18일부터 간편결제 서비스를 시행했다. 액티브X를 설치하지 않아도 결제정보를 등록한 뒤 회원 로그인을 하면 추가 인증절차와 금액제한 없이 한 번의 클릭으로 결제할 수 있는 서비스다. 이렇게 인터넷과 모바일에서 원클릭 결제가 가능한 곳은 대형 온라인 쇼핑몰 15개사 정도다. 이에 앞서 BC카드도 액티브X 없이 결제 가능한 온라인 결제 프로그램을 개발해 지난해 12월 초부터 자사 포인트 쇼핑몰인 탑 쇼핑에 적용했다.

보건복지부가 2011년 실시한 ‘장애인실태조사’ 자료에 따르면 시각장애인 중 선천적 원인에 의한 경우는 4.5% 정도다. 90.1%는 질병이나 사고에 의해, 즉 후천적인 원인에 의해 시각장애가 발생한 경우다. 눈이 갑자기 안 보이는 상황에도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외출을 해야 한다. 소비생활 역시 마찬가지다. 허종호 서울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본래 오감이 충족되어야 소비의 만족감이 큰데, 시각이 제한된 장애인이 시스템적 제약까지 겪는다면 스트레스는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국내 첫 시각장애인 변호사인 김재왕씨는 시력을 갑자기 상실할 때의 공포감과 상실감이 크다고 했다. 그는 서울대 대학원에서 생물학을 연구하던 중 시신경이 죽어가는 병이 악화되어 2009년에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그 후로는 쇼핑을 하지 않게 됐다. 김 변호사는 “인터넷 구매라도 수월해져서 모든 장애인이 혼자 주문하는 날이 왔으면 한다”고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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