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다기 보다는 피하기 바쁜 길 같아요." 2000년 '걷고 싶은 거리'로 지정된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길은 현재 청파로47길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곳을 거의 매일 지나는 안효정(24, 대학생) 씨는 이 길이 걷고 싶은 거리인 걸 알았냐는 질문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울시는 ‘걷고 싶은 도시 만들기’ 사업의 하나로 ‘걷고 싶은 거리 만들기’ 사업을 1998년 시작했다. 이어 2002년에는 서울연구원이 시범가로 조성사업에 대해 중간 평가를 벌였다. 사업 시행 이후 16년. 중간 평가 결과 이용자 만족도 조사에서 평균 이하의 점수를 받았던 세 곳을 걸어봤다.

입간판에 가로막힌 효창공원길

효창공원길은 중간평가에서 불법주차가 가장 큰 문제로 꼽혔다. 당시 상인을 대상으로 하는 설문조사에서 걷고 싶은 거리 시범가로 조성사업 이후 가장 불편을 주는 사항에 대한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50% 이상이 주차공간의 부족을 꼽았다.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 시민들은 보도 위에 무질서하게 주차된 오토바이와 차를 피해서 걷기 바빴다. 효창공원길 인근의 건물주와 주차요원은 "이곳은 사유지에 속하기 때문에 유료 주차장 대신 주차 공간으로 쓴다"고 말했다.

시민들의 보행을 가로막는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상가에서 설치한 입간판이 길 한가운데를 차지했다. 길거리에 옷이나 액세서리를 내놓고 파는 가게도 보였다.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제20조 1항)에 따르면 건물 밖에 설치한 입간판은 모두 불법이다. 또한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 시행령 12조 7항에는 이동할 수 있는 간판을 설치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다양한 음식점이 몰려 있는 효창공원길은 눈에 띄는 입간판을 세워 손님 모시기 경쟁이 한창이다.

 용산구청 건설관리과의 김용구 주무관(광고물관리팀)은 “입간판에 대한 민원이 반복되는 곳을 위주로 꼼꼼하게 단속한다. 처음에는 경고를 하고, 그 다음에는 직접 수거하는데 업주들 간의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돌아서면 또 세워놓는다”고 했다. 이 일대에서 8년 동안 부동산을 운영한다는 한황렬 씨는 "오토바이 불법주차나 이동식 간판이 보행 환경을 해친다"고 말했다.

30m 간격으로 전신주만 10개, 참살이길

지하철 6호선 안암역의 4번 출구에서 내려와 고대안경을 끼고 오른쪽으로 꺾으면 참살이길이 시작된다. 서울시가 2000년에 걷고 싶은 거리로 지정했다. 젊음과 생기가 넘치는 대학가이지만 길 한쪽에만 약 30m 간격으로 늘어선 전신주가 어수선한 느낌을 준다. 가로수의 나뭇가지와 뒤엉켜 있는 전선들이 참살이길의 미관을 해치는 셈이다. 참살이길이 시작되는 고대안경에서 하나은행까지의 우측 약 385m 거리에만 전신주가 10개. 길 한가운데 세워진 전신주는 보행을 방해한다.

참살이길은 보도와 차도 사이의 경계가 낮다. 차량 진입을 막는 볼라드가 없어 갓길 주차와 보도 위 주차가 쉬운 구조다. 실제로 이곳에는 치킨집, 패스트푸드점 등 배달업체가 많아 보도 위 오토바이 주차와 개구리 주차가 거리를 어지럽힌다. 인근 패스트푸드점의 직원들은 "계속해서 배달을 왔다, 갔다 하니까 주로 가게 앞에 세워둔다. 단속에 걸린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참살이길 인근 상인 김정훈 씨는 "우리 가게 앞에도 주인 모를 오토바이가 거의 매일 세워져 있는데 가게 앞을 가로막기 때문에 영업에 불편을 준다"며 "걷고 싶은 거리로서 인근 상인들과 상생하기 위해서는 이런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 아예 차가 못 들어오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안암 로터리에 진입하기 전 버스 정류장 근처에 설치한 벤치 주변은 쓰레기 더미가 가득했다. 고려대생인 송현준 씨는 "마을버스가 지나는 데다 교통량이 많아 보행자가 차를 피해 다녀야 할 지경이어서 걷고 싶은 거리라는 느낌이 안 든다. 아예 보행자 전용 거리로 만드는 게 더 낫지 않을까“라며 불편함을 토로했다.

좁아도 너무 좁은 은행나무 길

금천구 은행나무길의 시작을 알리는 은행나무 사거리에는 호랑이상이 보인다. 2000년에 걷고 싶은 거리로 조성됨에 따라 인근 호암산을 떠올리게 하는 호랑이상을 상징조형물로 삼았다. 이곳은 과연 어떨까.

중간평가 당시 은행나무길의 유효 보도폭은 1.5m였다. 2012년 국토해양부에서 발간한 도로설계기준에 따르면 보도의 유효 폭은 1.5m 이상이어야 한다. 그러나 기자가 줄자로 쟀더니 폭이 약 92cm였다. 여기에 가로수가 있다면 보도폭은 60cm 정도로 줄어든다. (사진25, 사진26) 주변 마트에서 물건들을 내놓고 팔 때는 상인과 물건을 사는 사람들, 보행자들이 뒤엉켜 혼잡해진다. 이때의 보도 폭은 50cm에 불과했다.

은행나무길을 따라 동일여고로 향하는 길. 범일운수종점 정류장이 여기의 한 가운데 자리 잡았다. 보도폭은 불과 25cm. 한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다. 시민들은 정류장 뒤 좁은 구석으로 불편하게 길을 지날 수밖에 없었다. 매일 등하굣길에 이곳을 지나는 동일여고 3학년 이지윤 양은 "(길이) 너무 좁아서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과 부딪힐 때도 있는데, 그럴 때 욕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다.

금천구 도시계획과는 ‘금천구 도시디자인비전21’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하며 간판개선, 디자인서울거리조성 등 도시 디자인과 관련된 사업을 진행하는 중이다. 이혁재 주무관(도로과 보도관리팀)은 “걷고 싶은 거리를 특별히 관리하고 있지는 않지만 은행나무길을 포함해서 오래된 보도에 대한 관리는 상시적으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걷고 싶은 도시가 되려면

서울시 관계자는 걷고 싶은 거리들에 관한 자료는 너무 오래 돼서 찾기 어렵다고 밝혔다. 또한 이후에 다양한 보행환경사업이 진행되면서 해당 거리를 특별히 관리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2003년에는 이명박 시장이 청계천 복원사업을 벌였고 4년 뒤에는 오세훈 시장이 거리 르네상스 사업을 통해 거리의 디자인을 강조했다. 박원순 현 시장 역시 보행친화도시 서울을 위한 토론회를 열었다.

보도환경개선과의 조재관 팀장은 “시대가 바뀌면서 사업 명칭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같은 취지로 여러 사업이 진행되는 중이다. 보도블록 10계명, 인도 10계명 등은 이름과 중점 분야만 다를 뿐 기본 원칙을 공유한다”며 “(관리가 미흡한 거리의) 불법주차 등 세세한 부분도 개선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2002년에 중간 평가를 진행했던 서울연구원 박현찬 선임연구원은 “걷고 싶은 거리 중간평가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비롯해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서울시가 보행환경개선 사업을 계속해서 발전시켜 가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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