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사고 15시간 뒤, 한 사이트에 글 한 편이 올라왔다. 배에 실은 화물을 단단히 묶지 않아 세월호가 침몰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세월호 사고는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8분경에 발생했고, 암초 충돌이나 급변침이 침몰 원인으로 꼽혔다. 이후 검찰 수사 과정에서야 ‘고박의 허술함’이 배를 기울게 했다는 점이 사실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사고 15시간 만에 세월호 침몰 원인을 정확히 지적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정답은 조갑제닷컴의 조갑제(趙甲濟) 대표다. 그는 2014년 4월 17일 새벽 1시 37분에 “화물을 제대로 묶지 않으면 급회전 때 탈락, 배가 기울 수 있다”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조 대표는 “언론 보도를 보던 중 사고 원인을 짐작했고 글을 쓴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글에서 여러 언론에 보도된 구조자들의 인터뷰를 빌려 자신의 주장이 맞음을 입증하려고 했다. 또한 세월호 조타수 등 승선원 등의 말을 통해 암초 충돌설이 사실이 아님을 설명했다. 일반 어선은 30도나 기울어도 복원력이 있다는 개인적 지식도 적절히 섞어 글 한 편을 완성했다. 기자 조갑제의 분석력과 통찰력이 돋보이는 글이었다.

대중에게 조갑제 대표는 이런 분석력보다 이념적 발언들로 더욱 유명하다. “조갑제는 신인 개그맨인가요?”라는 한 네티즌의 물음이나 “극우 파시스트다”라는 진중권 교수의 평가가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말 존경합니다! 많이 나오셔서 나라걱정 해주세요” 등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로부터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조 대표는 어떤 인물일까. 2015년 3월 12일, 조갑제닷컴 사무실에서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사실을 전하지만, 이념적으로 해석되는 것”
조갑제 대표는 1990년대 이후부터 <월간 조선> 기사와 각종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념적 발언을 해왔다. 그런 행보와 함께 대중의 호불호도 나뉘었다. 그는 대중이 자신을 이념가로 보는 것에 대해 “나는 사실을 기반으로 이야기하는데 이념적으로 해석되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3번 해직됐다. 정부의 포항 석유 발견 소식이 사실이 아님을 밝혀서 한 번,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취재하다 회사에서 해직된 후 신군부에 의해서 해직기자 명단에 올라 다시 한 번, 한국 내 미국 CIA 지부를 대중에 공개해서 한 번, 총 3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조 대표는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취재를 하면서 그들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가려보게 됐다”며 “따져보니 좋은 점이 더 많은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권력자들에 대한 긍정적 평가 또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판단한 결과라는 뜻이다.

정부를 향해 칼을 겨누던 사람이 그들을 옹호하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조 대표는 “사람은 생각이 바뀌기 마련”이라며 “역사도 자주 바뀌는데, 사람 또한 이에 맞춰 변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자신의 정치관에 대해 그는 “나는 Consevative liberalist(해석하면 보수적 자유주의자)”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통이나 안보를 중시하는 면에서는 보수주의자임을 인정하지만, 사실에 관해서는 진보주의자”라고 덧붙여 설명했다.

이렇게 사실을 강조하는 것을 두고 강준만 교수는 비판한다. <인물과 사상> 2005년 7월호에서 “조갑제는 사실(fact)을 자신만의 환경 속에서 해석하는 ‘사실 물신주의’의 함정에 빠져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글을 통해 이런 사실 물신주의(fetishism of facts)는 위험하며, 개개인의 보는 눈의 입장에서 세계를 생각하는 시각주의(perspectivism)의 함정에 조 대표가 빠져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일흔의 나이에도 현장에 남아 있다
조갑제 대표를 직접 만나기 전 전화통화를 하며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다. 그는 인터뷰가 언제 가능하냐는 물음에 “기사 마감이 언제입니까”라고 먼저 물었다. 직접 만났을 때는 “녹음기를 켜시죠”라고 먼저 말했다. 마감시간을 캐묻고, 녹음을 하라는 조 대표에게서는 여전히 기자다움이 묻어났다.

뉴스타파 김용진 대표는 2013년 7월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조 대표에 대해 아쉬운 부분을 언급하면서도 “현장 취재 기자로서 언론인 조갑제는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1945년에 태어난 해방둥이 조 대표는 현재도 조갑제닷컴을 운영하며 하루 서너 건의 기사를 쓴다. 그는 “기자에게 현장은 어디든 될 수 있다”며 “정보가 모인 곳이 현장이기에 때로는 책 속이 현장이 될 수도, 길을 가다 마주친 현수막이 현장이 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조 대표는 뉴스를 통해 세월호 사고를 접하고는 글을 쓰기도 하고, 명언 너 댓개를 묶어 짤막한 글을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글을 ‘기사’라고 말한다.

“과거에는 기사란 게 사건・사고 소식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개념이 넓어졌습니다.” 조 대표는 기사의 개념을 다시 정립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터넷의 발달로 기사를 써낼 수 있는 창구가 많아졌다. 그는 이런 환경의 변화를 바탕으로 “흥미로운 일은 모두 기사로 쓸 수 있으며, 재밌는 이야기는 기사라는 이름으로 남길 수 있는 시대가 됐다”고 말한다. 기사 아이템을 어떻게 잡느냐는 물음에는 “아이디어는 전날 읽은 책을 통해서 얻기도 하고, 열 살 된 손자를 통해 얻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의 흥미를 끄는 것은 모두 기사가 된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정확히 만 69세인 조 대표는 직접 트위터를 한다. 자신의 기사를 알릴 수 있는 통로이기에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게 그의 설명. 조 대표는 기자가 가져간 노트북을 직접 들어보며 “이 노트북 정말 가볍네요. 얼마 정도 합니까?”라며 관심을 보였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허리춤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바로 검색해보기도 했다. 그는 젊은 사람 못지 않게 뉴미디어와 새로운 기계에 호기심이 많은 기자였다.

조갑제를 대표하는 말, 호기심과 집요함
“그(조갑제)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도 자꾸 남에게 묻고, 흥미롭다 싶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메모를 한다. 아주 짧은 시간에 남이 알고 있는 것을 다이제스트로 뽑아내 자기 것으로 만드는 독특한 능력을 갖고 있다” -국제신보 입사 동기였던 정순태, 2006년 <신동아> 인터뷰

조 대표는 호기심이 많다. 조 대표 자신도 “아무리 아는 것이라도 자주 되묻는다”고 2008년 4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그는 가슴 한 켠에 수첩을 늘 품고 다닌다. 사람들과 대화하다가 궁금한 내용이 생기면 그곳에 적어둔다. 이런 끊임없는 호기심은 그를 ‘특종 기자’로 만들었다. 실제로 만난 조 대표는 양복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수첩을 꺼냈다 넣었다를 반복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거나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곳에 적었다. 
 
“책, 신문 잡지를 한 보따리 싸안고 화장실로 들어가버린다. 그리곤 함흥차사다. 나오면 한 바탕 하려고 전의를 불태우다가도 내가 먼저 지쳐 잠이 들어버리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부인 임귀옥씨, 1991년 조선일보 사보

그는 독특한 독서 습관도 갖고 있다. 사소해보이지만, 조 대표의 성향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어느 누가 책상도 없는 화장실에 앉아 몇 시간이고 책에 집중할 수 있을까. 그는 그만큼 무서운 집중력으로, 자료에 파묻힐 줄 아는 집요한 인물이다. 인터뷰 당일 조 대표는 저녁 8시경에 사무실을 떠나면서 Eric Schlosser의 책 <Command And Control>을 가방에 담았다. 그러면서 “핵 관리에 관련된 책인데, 오늘 밤 이 책을 다 읽을 것”이라고 말했다. 책을 펴보니 전문이 영어로 쓰여 있었다. 

알고자 하는 욕구, 알리고자 하는 욕구
조 대표는 “기자는 알고자 하는 욕구, 즉 호기심이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더불어 “안 것을 알리고자 하는 욕구, 정의감 혹은 명예심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두 가지가 기자 마음 속에 공존할 때 ‘특종’이 나올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 조 대표는 당당하게 “기자는 특종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장 먼저 보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감추어진 사실을 보도하거나, 심층적으로 파고들어 핵심을 보여주거나, 같은 사안을 두고도 관점을 새롭게 해서 기사를 쓰거나. 조 대표는 그 모든 행위가 특종을 낳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1971년에 부산에서 37만부를 찍던 최대 일간지 국제신보에 입사했다. 3명의 동기 중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사람은 조 대표가 유일했다. 그는 수산대학을 중퇴해 고졸의 신분이었다. 고려대 영문과를 나온 안주홍 씨와 서울대 중문과를 나온 정순태씨가 동기다. 쟁쟁한 대학을 나온 사람들 중에서 그는 1등으로 합격했다. 입사 후 문화부, 사회부 기자로 생활했다. 조 대표는 입사 3년차이던 1973년에 경주에서 천마총 고분 관련기사를 썼다. 당시 문화부 취재를 담당해 고분 발견 현장에 갈 수 있었는데, 쟁쟁한 전국지 기자들 사이에서 그는 연일 고분 발견 관련 특종을 뽑아냈다. 이 일에 대해 입사 동기 정순태는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조갑제가 불러주는 기사는 일목요연했다. 선배들이 부르는 기사 중에는 문장이 되지 않는 것이 허다했는데 그는 달랐다. 스트레이트, 해설, 낙수, 1면, 문화면으로 딱딱 나눠 불러주는데, 다 적고 나면 노트 한 권 분량이 넘었다. 그가 부르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절로 공부가 되는 재미가 있어 팔이 아프도록 받아쓴 기억이 있다. 서울을 비롯해 전국의 기자가 다 모인 가운데서 그는 연속해서 특종을 뽑아냈다.” - 정순태, 2008년 <신동아> 인터뷰

조 대표는 포항 석유에 경제성이 없다는 논문을 써서 잠시 기자생활을 그만두기도 했다. 중단됐다는 것이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1976년의 일이다. 당시는 포항에서 유전이 발견됐다는 소식에 전국이 산유국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던 때였다. 포항 석유에 대해 심층적으로 취재하던 그는 유전이 아닌 유징만 발견된 것임을 알았다. 당시 이 사안은 중앙정보부가 관할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실망할까 사실 보고를 하지 않고 각 언론사 기사를 막아둔 상태였다. 조 대표는 이를 기사가 아닌 논문으로 썼고, 각 언론사에 배포했다. 논문을 접한 산케이 신문은 이 내용을 보도했다. 그리고 조 대표는 1976년 6월에 해직됐다.

포항 석유 특종은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조 대표는 “특종 욕심 때문에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 바다에서 석유를 시추하기 시작한 1970년대 초반부터 석유 개발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석유 발견’이라는 특종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포항에서 석유가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직접 달려갔다. “이미 공부를 했으니 잘 아는데, 가서 확인해보니 유전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는 게 조 대표의 말이다. 결국 특종을 꼭 해보겠다는 욕심이 진짜 특종을 만들었다. 바라던 ‘석유 발견’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지자, 조 대표는 광주로 들어간다. 그는 “회사에는 병가를 내고 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광주에서 5.18 민주화 항쟁을 직접 목격했다. 목격한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조 대표는 현장에서 본 일을 기사로 써서 회사에 송고하기도 했다.
 
조 대표는 5.18 민주화 항쟁이 일어나던 당시, 부마 항쟁에 대한 책을 쓰고 있던 상황이었다. 부마 항쟁과 광주에서 벌어지는 일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그는 역사의 현장에 직접 가보고 싶었다. 현장에서 기사까지 썼지만, 무단으로 취재했다는 이유로 기자직에서 또 한 번 해직됐다. 현장을 보고 싶다는 호기심, 휴가 중에도 기사를 써내던 집요함. 이는 그에게 특종을 안겨주기도 했으나, 결국 일간지 기자 생활에 마침표를 찍게 만든 이유로도 작용한 셈이다.

호기심과 집요함, 월간지에선 탐사보도로 이어져
국제신보에서 쫓겨난 조 대표는 1981년 서울로 올라온다. 백수가 아니라 월간<마당>의 취재부장 신분으로였다. 월간<마당>은 1981년 9월에 창간호를 내놓은 월간지다. 이 잡지는 세로쓰기가 아닌 가로쓰기로, 미국 잡지처럼 시각효과를 극대화한 잡지였다. 조 대표는 이곳에서 르포 기사를 주로 썼다. 대표 기사는 1982년의 ‘부산 김근하군 유괴 살인사건의 내막-하느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이 르포기사는 1967년에 부산에서 일어난 김근하군 유괴 살인 사건을 파헤친 내용이다. 당시 경찰과 검찰은 해병대 출신 김기철씨를 범인으로 체포했다. 하지만 그는 법정에서 수사 과정에서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무죄를 선고받았다. 석방 이후 김기철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조 대표는 1982년이 이 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해임을 감안해 기사를 썼다. 이에 대해 그는 “공명심에 가득찬 검사가 어떻게 사건을 조작했는지가 내 관심사였다. 그 고문으로 전과도 없는 건실한 젊은이의 인생이 어떻게 망쳐졌는지를 추적했다”고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보도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연극으로도 만들어져 상연될 정도였다.

1983년 10월, 조 대표는 <월간조선> 기자로 자리를 옮긴다. 그는 이때부터 더욱 탐사보도에 심취하기 시작한다. 탐사보도란 영어로 ‘investigative report’로 ‘수사식(搜査式) 보도’를 뜻한다. 당시 한국 언론에서 르포르타주식 기사는 익숙했으나, 탐사보도 영역은 다소 생소한 영역이었다. 조 대표는 탐사보도에 대해 “기자가 수사관처럼 집요하게 진실을 규명해내려는 취재방식”이라며 “이런 진실 규명은 언론의 주된 기능인 사실 전달보다 한 차원 높은 어려운 작업”이라고 말했다. 주간경향 인물연구는 조 대표에 대해 “1980년 이후 그가 <월간조선>에쓴 탐사보도는 많은 기자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했다”고 2008년에 쓴 바 있다.

그는 ‘한국내 美 CIA의 내막’이라는 기사도 썼다. 1986년 월간조선 2월호에 실린 기사다. 기사에서 CIA의 한국 거점이 어떻게 구성되어있는지, 그곳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밝혔다. 기사 하단에는 CIA 거점 사무실의 전화번호까지 공개해 파장이 컸다. 주한 미대사관은 안기부장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 일로 조 대표는 안기부 대공수사국 대공수사단의 지하 조사실에서 취재 경위에 대해 조사받기에 이르렀다. 조사과정에 대해서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취재원이 누구냐는 질문이 있었지만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고 말했다.

34년을 조 대표와 교류한 산케이 신문의 구로다 가쓰히로 전 특파원은 2006년 8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10.26과 12.12, 광주사태 등은 매우 미묘한 사건인데, 조갑제는 이념적인 오염 없이 탐사보도 형식으로 취재해 썼기에 우리는 그의 기사를 인용해 보도할 수 있었다. 그는 항상 자기 테마를 갖고서 집요하게 추적했는데, 이는 국적을 막론하고 스쿠프(scoop, 특종)하는 기자의 공통점이다.”

조 대표가 한길사에서 1986년에 낸 책<사형수 오휘웅 이야기>도 대표적 탐사보도로 꼽힌다. 오휘웅은 살인죄로 기소된 사형수였다. 1979년 오휘웅은 사형 집행 직전에 “저는 절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죽은 뒤에라도 누명을 벗도록 해주십시오”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를 전해 들은 조 대표는 기자 신분으로 사건을 캔다. 수사와 재판 기록을 찾아보고 당시 증인들을 만난 뒤 쓴 기록이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오휘웅의 무죄를 주장했다.

한겨레21의 정재권 전 편집장은 “오휘웅 사건을 물고 늘어진 조갑제의 문제의식만큼은 100%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고 2008년 편집장의 말을 통해 언급한 바 있다. 또 뉴스타파 김용진 대표는 2013년 7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의 1986년 한길사에서 출간한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등은 사실 한국 언론사에 남을 탁월한 탐사보도”라고 생각을 밝혔다. 또 2013년 한 강연에서 금태섭 변호사는 사법부의 오판과 제도의 모순을 지적하며 이 책을 언급한 바 있다.

45년차 기자가 보는 우리 언론의 문제점
조 대표가 보는 언론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그는 “기자로 40여년 일했지만, 언론에 대해서 비판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갑자기 그는 “며칠 전 조선일보 1면에 ‘북한 2020년까지 핵무기 최대 100기’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는데, 잘못된 부분이 뭘까요?”라고 물었다. 당황스러웠다. 답을 모르겠다고 하자 조 대표는 “어휘 선택이 잘못됐다는 걸 모르냐”고 말했다. 핵무기는 대수를 의미하는 것인데, 크기나 규모를 의미하는 최대(最大)를 쓴 것을 옳지 않다는 뜻에서다. 그러면서 “‘최다(最多) 100기가 있다’라고 써야 정확한 표현”이라고 덧붙였다.

조 대표는 말한다. “한국어는 70%가 한자, 30%가 우리말로 구성된 언어이기 때문에 한자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하지만 언론사가 90년대 후반부터 한글 전용을 택함으로써 기자들의 어휘력이 쇠퇴했고, 이는 정확한 문장을 만들지 못해 정보전달도 제대로 되지 않는 문제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조 대표는 “기자는 상업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말인 즉, 많이 읽히는 기사를 써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중이 놀랄만한 기사를 써야 한다. 하지만 현재 언론은 그렇지 않다고 조 대표는 말한다. 그는 “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더 좋은 기사를 쓰기 위해 고민하는 게 아니라, 괴팍하거나 야비하거나 튀는 사람을 TV에 내보내 시청률을 끌어올리려고 하니까 문제”라고 덧붙였다. 결국 조 대표가 말하는 상업적인 기자는 아이템의 독창성이나 깊이 있는 보도를 통해 특종을 하는 사람이지, 가십 기사를 뽑아내는 사람은 아닌 셈이다.

세월호 보도에 대해 조 대표는 “언론이 사람들 마음에 위안이 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보도가 많았다”고 평가했다. 또 조 대표는 “언론이 절망적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해경을 역적처럼 몰아세우고, 대통령이 해경 해체를 지시한 것은 ‘백주(白晝)의 암흑’과 같은 사태”라고 흥분했다.

그의 평가처럼 세월호 사고와 함께 언론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무너졌다. 정부 발표만 믿고 ‘승객 전원 구조’라고 보도했던 언론사들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기자가 현장에서 취재는 하느냐”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저의 꿈이 바뀐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러분이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적 양심과 신념을 뒤로 한 채 가만있어도 죽을 만큼 힘든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 분들, 애타게 기다리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큰 실망과 분노를 안겨줬기 때문입니다.” 사고 후 기자라는 꿈을 포기했다는 안산 단원고 3학년생의 편지가 알려지기도 했다.

이념적으로는 그를 이해할 수 없더라도, 조갑제의 기자정신만큼은 무시할 수 없다. 수많은 언론인이 ‘이념가 조갑제’라는 말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도, 그가 ‘특종을 수도 없이 해낸 능력있는 기자였다’는 데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조갑제의 평가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주요 경력

1971년 부산 국제신보 수습기자

1981년 월간 마당 편집장-취재부장

1983년 朝鮮日報 月刊朝鮮 기자

1991년~1996년 8월 月刊朝鮮 편집장

1998년7월~2000년 12월31일 月刊朝鮮 편집장

2001년 1월 3일 月刊朝鮮의 독립법인化에 따라 편집장 겸 대표이사

2005년 4월1일 조갑제닷컴 대표

저서

朴正熙 전기 (全13권)

10·26사건의 기록 -『有故』 1, 2권

軍部, 대폭발, 국가안전기획부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 코리안 커넥션

젊은 巨人의 초상-李龍文장군 傳記

金賢姬의 하느님

7광구의 대도박

12·12사건-鄭昇和는 말한다

석유사정 좀 환히 압시다

金大中의 정체

북한-그 충격의 실상(편집책임) 등 다수

주요 기사

중금속 오염의 추적(1974년 국제신문 시리즈=한국기자상 수상)

부산대학 미술 실기시험 출제 유출 사건 특종(1975년 국제신문)

浦項석유 경제성 없다」 특종(1976년 국제신문)

마산만 어패류 채취 금지 특종(1979년 국제신문)

 

부산 김근하군 유괴살인 사건의 내막-하느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월간 마당 1981-82년 연재. 연극과 드라마로도 만들어짐)

수퍼 탱커 타고 오일로드를 가다(1982년 월간마당 연재)

코리언 커넥션(1983-84년 月刊朝鮮. 영화화)

 

심층취재/KAL에 칼을 댄다-대한항공의 안전문제(月刊朝鮮 1984년 4월호)

특종: 李龍文-朴正熙의 李承晩 제거계획(月刊朝鮮 1984년 6월호)

부마사태와 10·26사건의 내막(月刊朝鮮 1985년 5,6월호)

한국내 美CIA의 內幕(月刊朝鮮 1986년 2월호)

KAL 007 최후의 목격자(月刊朝鮮 1986년 12월호)

독점 인터뷰: 鄭昇和, 입 열다(1987년 9월호)

 

추적: 全斗煥의 금맥과 인맥(月刊朝鮮 1988년 4월호)

심층취재: 공수부대의 광주사태(月刊朝鮮 1988년 8월호)

추적: 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다(月刊朝鮮 1989년3월호)

최초 인터뷰: 金賢姬는 말한다(月刊朝鮮 1989년 5,6,7월호)

특종: 6·29선언은 全斗煥 작품이었다(月刊朝鮮 1989년 6월호)

심층취재: 한반도의 核게임(月刊朝鮮 1990년3월호)

 

李穗根 처형후 북한노동당 간부들 대상 비밀강연:『변절자의 말로는 이렇다』(月刊朝鮮 1991년10월 호)

특종: 全斗煥 육성증언-6·29의 진실(1992년1,2월호)

특종: 李善實 간첩사건 수사 速報(月刊朝鮮 1992년 9,10,11,12월호)

논평: 朴正熙와 金泳三의 역사적 화해(月刊朝鮮 1993년 11월호)

논평: 대한민국은 전쟁을 결심할 수 있는 나라인가(月刊朝鮮 1994년 3월호)

특종: 金日成-徐東權 비밀접촉(月刊朝鮮 1994년 8월호)

특종인터뷰: 이스라엘 라빈 수상 피살 전날의 마지막 인터뷰(月刊朝鮮 1995년 12월호)

추적: 全斗煥 구속은 정의를 具顯하는가(月刊朝鮮 1996년 1월호)

르포: 몽골벨트를 가다(月刊朝鮮 1996년 7,8,9,12,1월호)

하버드 연수보고 연재(月刊朝鮮 1997년9월호부터 7회)

姜慶植 독점인터뷰-換亂사건의 진실(月刊朝鮮 1998년4,5월호)

심층취재: 한국언론의 사실포기-北風사건과 괌사고 취재행태 비판(月刊朝鮮 1998년)

趙甲濟의 심층인터뷰/盧泰愚 육성 회고록(月刊朝鮮 1999년 5,6,7,8월호)

수상

1974년 제7회 한국기자상(한국기자협회)-중금속 오염의 추적

1990년 한국잡지협회 제정 잡지기자상

1991년 제4회 아시아-태평양상 특별상(일본 每日新聞 주관)

1994년 관훈클럽언론상-북한인권문제 보도(월간조선이 수상, 당시 편집장)

출처 - 조갑제닷컴

■참고자료

-“화물을 제대로 묶지 않으면 급회전 때 탈락, 배가 기울 수 있다”, 조갑제닷컴, 2014.04.17. -救國의 논객’vs‘안보상업주의자’ 조갑제의 비밀, 신동아, 2006.08.01 통권 563 호

-[인물연구] 전 월간조선 대표 조갑제, 주간경향, 2008.06.26.

-반골기자에서 극우논객으로 ‘비판의 펜’ 조갑제, 유인경, 경향신문, 2008.04.10.

-조갑제 인터뷰, 설호정 편집장, 샘이 깊은 물, 1987.10 (조갑제닷컴에 있음)

-부인 임귀옥의 글, 조선일보 사보, 1991.07.27. (조갑제닷컴에 있음)

-책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조갑제, 1986

-강준만 코멘트, 인물과 사상, 2005년 7월호

-김용진 뉴스타파 대표 인터뷰(“왜 탐사보도냐고? 권력은 감추고 기성 언론은 못 밝히니까”), 한겨레, 2013.07.01.

-오휘웅과 김명호, 정재권 편집장, 한겨레21, 2008년03월13일 제7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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