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고은과의 만남

1월 24일 오후 2시, 서울 책과 문화 클럽은 중구 명동에 위치한 서울글로벌문화체험센터에서 ‘고은과의 만남’ 행사를 열었다. 이 클럽은 스코틀랜드 출신인 배리 웰시(Barry Welsh․36) 숙명여대 국제언어교육원 객원교수가 2011년부터 운영해 온 다국적 독서클럽이다. 매달 1회 한국 작가를 초청해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과 소통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이날 행사에도 한국을 포함해 미국, 호주, 헝가리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200여명의 다국적 회원들이 참석했다. 행사는 시 낭송, 인터뷰, 그리고 책 사인회 등을 포함해 2시간동안 진행됐다. 한국으로 귀화한 영국 출신 안선재(영국명 Brother Anthony․73) 서강대 영문과 명예교수가 사회를 맡았고, 외국인들을 위해 동시통역사도 무대에 함께했다. 

▲ 고은 시인은 노래하듯 말한다. 의자가 있었지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온몸으로 대답했다. 그는 시를 '자가자무自歌自舞'라고 설명했다. 스스로 노래하고 스스로 춤춘다는 뜻이다. 이 날 강연에서 그는 스스로 흥에 못 이겨 덩실덩실 춤사위를 보이기도 했다.

“나의 시가 나다. 나는 없다”

그의 표현대로 그는 시 그 자체였다. 그는 온 몸의 감각으로 써낸 시를 다시 온 몸으로 토해냈다. 그는 ‘일인칭은 슬프다’, ‘두고 온 시’ 등 자신의 시를 낭송했다. 아니 시를 포효했다. 나지막이 속삭이다가, 어느 순간에는 울부짖듯 내뱉었다. 준비된 좌석을 채우고 남은 청중들은 자리 사이사이 바닥에 앉아 그의 시에 빠져들었다.

동영상1> http://youtu.be/q_r3Q1bCnO4 일인칭은 슬프다

동영상2> http://youtu.be/nFf4jDyZVcs 두고 온 시

SBS의 오디션 프로그램 'K팝스타 시즌4'에서 박진영 심사위원은 '말하듯 노래하라'고 강조한다. 몸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부르라는 뜻이다. 고은은 그 반대다. 노래하듯 말한다. 감정을 담는다. 운율도 있다. 그래서 자꾸 들썩인다. 흥은 저절로 나오는 것이라며 흥에 따라 몸을 움직여보였다. 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사회를 맡은 안선재 교수의 물음에 고은은 마치 한편의 '시'를 말하듯 답을 이어나갔다.

“나의 모국어는 밤이었다”

1933년 전북 군산에서 그가 태어났을 때는, 일제가 한국어 말살 정책을 펴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그는 어떻게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 될 수 있었을까. 그는 유년시절을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 이내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그는 밤에 어른들로부터 숨어서 한국말을 배웠다. 그래서 그는 '나의 모국어는 밤’이라고 표현한다. 그렇게 배워서일까. 그의 모국어 사랑은 대단하다. 그는 ‘무덤 속에서라도 한국어로 시를 쓰겠다’고 다짐했다.

“우리는 폐허였다”

일제시대가 끝나자 전쟁이 일어났다. 10대 아이에게 죽음은 너무 힘들었다. 한국전쟁을 몸소 겪은 시인은 그 시절을 ‘폐허’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폐허였어요.” 그 당시에는 절망조차 없었다고 했다. 산 자들은 오직 몸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뼈저리게 느낀 ‘폐허’와 ‘죽음’은 곧 시인의 삶에 중요한 화두가 됐다. “나의 ‘허무’는 고대 인도의 무無,와 노장세계의 무위無爲 그리고 19세기 말 서구의 니힐리즘이 아니에요”. 그는 자신의 허무를 조국의 폐허에서 스스로 자라난 언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그는 어떠한 시학도 거부한다. 대학에서 시를 가르치기도 하는 그는 자신의 첫 수업 내용을 설명했다. “모든 시학은 잊으라고 말합니다. 자신만의 언어로 노래해야죠.”

“인간에게 추억은 결코 사치가 아니다”

허무주의에 빠져있던 시인은,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자살을 계기로 현실에 눈을 뜬다. 이후 군사정권에 저항하며 감옥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는 4번이나 다녀왔다며 스스로를 ‘4성 장군’이라 불렀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20년형을 선고받고는 죽음을 직감했다. 창이 없는 아주 작은 캄캄한 방에 갇혔다. 관속에 들어있는 시체와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그는 현재를 박탈당했다. “과거만이 ‘없는 현재’를 대체하죠.” 매일 그리운 얼굴들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외할머니, 옆집 아저씨, 이웃마을 친구들…. 인간에게 추억은 결코 사치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는 현재에 오직 과거만이 현재를 살게 했다. 그는 만약에 살아 나갈 수 있다면, 떠오르는 인물들 하나하나를 노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온 생애를 바쳐 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만인보’는 이렇게 감옥에서 잉태되었다. 그는 국내외의 구명운동으로 1982년 특별 사면됐고, 1986년부터 만인보를 쓰기 시작했다. 만인보는 전체 30권, 총 4001편의 분량으로 5600여명의 인물을 담았다.

“시는 심장의 뉴스다”

그는 시의 형식을 거부한다. 그에게 시는 아무런 형식도 없다. 애기처럼 혹은 오래 산 노인처럼, 그냥 삶이 절로 노래하고 절로 춤을 추는 게 시다. 노래의 법칙이나 규범이 있어서 그것에 맞추어 부르는 것은 근대에 태어난 결과물일 뿐이다. 시도 마찬가지다. 시론이 있고, 시학이 있어서 그대로 운율을 맞추는 게 아니다. "시는 그냥 나오는 거에요. 자가자무自歌自舞를에요.” 스스로 노래하고 스스로 춤추는 것이 무엇인지 시인이 직접 보여주었기에 이해하기 한결 쉬웠다. “시가 뭡니까? 누가 만들어서 가르쳐주는 겁니까? 심장이 팔~딱 치면 피가 돌면서 뉴스가 막 생기는거죠. 아주 자연스러운거죠. 이게 시에요.”

두 시간에 걸쳐 시 낭송과 사회자 안선재 명예교수와의 대담이 진행됐다. 고은의 익살스러운 몸짓과 표현에 한국어에서 한 번, 잠시 뒤 통역된 영어에서 또 한 번씩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어 고은의 사인회가 진행됐다. 행사장 입구에서는 지난 8월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김형수 씨가 고은의 시 중 100편의 명구를 새로 엮은 책 ‘시의 황홀’을 판매 하고 있었다.  50여명의 청중들은 새로 산 책에 고은의 친필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섰다. 청중들은 사인을 받고 고은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사인회는 약 30분간 진행됐다. 헝가리에서 온 레카(Adamek Reka․24)씨는 '헝가리에서 이미 헝가리어로 번역된 고은의 시를 읽어보았다'며 '고은을 직접 만나보니 아주 유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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