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생소한 직업이 하나 있다. 농촌기획자. 이름만으로는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구글에서 농촌기획자로 검색을 하면 오로지 한 사람의 이름이 등장한다. 박종범. 서른여섯 살이다. 그는 2013년 농사 펀드라는 것을 세상에 내놓았다. 도시 소비자가 농부에게 직접 투자하고 배당은 농산물로 받는 방식이다. 농산물 유통의 새로운 대안이라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것 말고도 농촌과 관련된 일을 이것저것 벌였다. 스스로를 농촌기획자라고 부르는 박종범 씨를 지난 달 14일 서울 양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파란색 바탕에 붉은 색 줄무늬가 눈에 띄는 폴로 스웨터에 회색 머플러를 하고 나왔다. 얼굴에서는 장난기와 귀염성이 묻어났다. 차림새와 생김새를 놓고 봐서는 ‘농촌’하고는 별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영락없는 도시 청년처럼 보였다. 앉자마자 물었다. 농촌기획자가 뭐 하는 사람이냐고. 

    ▲농촌기획자 박종범씨(36)

그는 ‘농촌’이라는 영역을 두고 ‘기획일’을 하는 사람이 농촌기획자라고 설명했다. 너무나 당연한 설명에 기자가 아리송해 하자 밥집을 열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사람들은 흔히 농부라고 하면 싱싱한 농산물이 가득한 밥을 먹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대개 정 반대에요. 부부가 함께 농사를 짓는데, 둘 중 한 사람이 식사 준비를 위해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매일 빵이나 컵라면으로 때우기 일쑤죠. 그 얘기를 듣고 마을 단위의 밥집이 있으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농부들이 밥할 시간을 줄여주고 식사를 해결할 수 있도록. 밥집 운영에 필요한 비용은 지자체에서 지원받아 해결했어요.”
 

이처럼 농촌에서 일어나는 문제라면 그게 무엇이든 해결 방안을 기획하고 실행한다. 그게 농촌기획자의 일이라고 했다. 그러니 기획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박종범씨의 기획으로 세상에 나온 농사펀드는 농산물 유통의 새로운 대안 모델을 제시했다. “농사짓는 분들을 만나면서 그분들이 가장 힘들어하시는 게 ‘과연 1년 농사를 열심히 지어도 제값 받고 팔 수 있는지’ 예측이 안 된다는 점이었어요. 수확물을 원하는 사람이 얼마가 될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농부들은 항상 리스크를 지고 있죠. 자연재해는 농부들의 잘못이 아닌데도 그로 인한 손실을 농부들이 다 감수해야 하고요. 그런 리스크를 도시 소비자와 나눠지면 농부들이 생산에만 더욱 힘을 쏟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농부와 도시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는 크라우드 펀딩을 적용했다. 2013년 박씨의 농사 펀드 실험에 동참한 1대 ‘펀드 매니저’는 충남 부여에서 쌀농사를 짓는 농부 조관희 씨였다. 20만 원짜리 10구좌와 7만 원짜리 30구좌에 투자자를 모집했다. 이런 식의 농사 펀드는 2년 새 10개로 불어났다. 현재는 투자자 모집이 끝나기도 전에 투자액 100%를 초과 달성하는 펀드가 나올 정도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2013년 그의 첫 ‘농사펀드’ 실험이 시작됐다.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지자체의 지역 축제에도 반짝거리는 아이디어를 보탰다. “강원도 화천에서 하는 토마토 축제가 있었어요. 그걸 지원하는 사업을 맡은 적이 있죠. 막상 축제에 가보니 지역 농부들과는 상관없더라고요. 지자체가 사둔 토마토를 가지고 노는 게 축제의 전부더군요. 그런 축제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생각에 토마토 농가를 직접 방문해서 수확 체험을 할 수 있게 해보자고 제안했죠.”

농촌에 살지 않으면서도 농촌 아이템을 기획할 수 있는 비결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드는 그의 ‘네트워킹’ 노력에서 찾을 수 있다. 박씨는 2008년부터 5년 동안 행정자치부가 추진하던 ‘정보화마을 운영사업단’에서 마을 컨설팅을 담당하면서 여러 마을과 인연을 맺었다. 그 뒤로도 틈틈이 내려가 일손을 거들고 SNS 등으로 연락을 이어갔는데, 그렇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마을만 100여 곳에 달한다. “농촌 어른신들 중에 제가 농촌기획자라고 아시는 분은 없어요. 그냥 가끔 와서 농사일 도와주는 청년 정도라고 생각하세요. 굳이 그분들에게 제가 하는 일을 거창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렇게 현장에서 보고 듣는 얘기가 기획의 밑거름이 되죠.” 
 

SNS도 기획의 중요한 원천이다. “SNS도 꼼꼼히 봐요. 요새는 SNS에 그냥 일기처럼 자기 이야기를 써서 올리시는 분들이 많으니까. 그런 걸 보면서 그냥 일상적으로 하신 얘기에도 ‘저건 왜 그렇지? 저렇게 밖에 방법이 없는 걸까?’라고 질문을 던지죠. 그리고 비슷하게 느끼는 다른 분들은 없나, 또 해외에는 이런 문제가 없는지 자료들을 많이 찾아보는 편이에요.”
 

일단 기획 아이템을 잡으면 일하는 방식은 태크스포스팀 운영과 비슷해진다. 프로젝트마다 그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아 팀을 꾸려 진행하고 프로젝트가 끝나면 해체한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반복해 왔다. 농사 펀드 프로젝트를 위해서는 아예 법인을 만들었다.

이렇게 농촌 기획에 미친 그의 행보는 우연이 아니다. 고향이 춘천인 그는 어렸을 적 방학이면 늘 외할아버지의 논에서 살다시피 했다. 대학에 들어가 경영을 공부하면서 잠시 수트를 차려입고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직장인의 모습을 꿈꾸기도 했지만, 한 농부의 미소가 어릴 적 논두렁에서 만졌던 벼의 촉감을 되살아나게 하면서, 그를 대한민국 최초의 ‘농촌기획자’로 만들었다. 한 동안 잊고 있던 강원도 화천의 토마토 축제 사진 한 장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자기 손보다 훨씬 큰 토마토를 따면서 환하게 웃는 어린 아이가 찍혔더라고요. 그런데 그 사진 한 귀퉁이에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해하는 농부의 모습이 있었어요.”

농부의 환한 미소를 본 순간, 박씨는 농부들에게 스스로 하는 일의 가치를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가 얼마 전까지 ‘밥벌이’로 했던 일도 농촌기획과 무관하지 않았다. 주중에는 농산물 유통 온라인 회사에서 마케팅 담당자로 일했다. 하지만 그것도 3월부터는 그만두었다. 본격적인 농촌기획자로서의 일에만 집중하기 위해서다.

박씨는 농촌 문제에 대한 관심이 경제적인 부분에만 쏠리는 것에 아쉬움을 갖고 있다. “농촌 경제를 활성화하자는 쪽으로만 시선이 집중되면, 농촌복지나 다른 영역의 문제들에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어요. 일을 할 때 항상 농촌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영역을 비교해 가면서  해법을 찾으려고 해요.” 농사펀드의 경우가 그랬다. 농산물 유통 방식만 바꾼 게 아니라, 농부들의 일상생활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보통 농부들은 수확 후의 상황에 따라 수입이 달라지기 때문에 계획적인 소비를 하기가 쉽지 않다. 수확 후에 한꺼번에 들어오는 돈을 감당하지 못해 도박이나 유흥비로 날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랬던 농부들이 농사 펀드를 통해 스스로의 인건비를 매기고, 한 해 농사 비용을 미리 확보하게 됐다. 1년 소비 계획을 세우는 것도 가능해졌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지속 가능한 기획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그럴만한 실패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2010년 경기도 여주의 서화마을에서 귀촌한 도시 예술가들이 마을 주민들의 작업화인 장화에 그림을 그려주는 ‘레인부츠 프로젝트’를 기획해, 그 마을의 체험 프로그램으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1년도 지나지 않아 박씨가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그 프로젝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기획자가 빠져도 잘 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 뼈대를 짜 놓는 게 중요하죠. 이제는 1년 후에도 부끄럽지 않은 농촌기획자가 제 모토가 됐어요.”

농촌 기획으로 먹고 살려는 그에게 꿈이 무엇인지 물었다. “언젠가 직업란에 농촌기획자라는 직업이 보이도록 하고 싶어요. 농촌기획자를 대안 직업이 아닌 하나의 정식 직업으로 만들고 싶거든요. 나중에 제 노하우가 더 많이 쌓이면 농촌기획 학교도 만들 생각이에요. 지역의 특수성을 이해하고 활동력 있는 젊은 친구들이 나서야 농촌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제2, 제3의 농촌기획자를 만들어내는 게 제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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