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보도는 신문의 탄생과 함께 존재해왔지만 뭐니뭐니해도 일약 각광을 받은 것은 <워싱턴포스트>의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입니다. 일본에서는 다치바나 다카시가 <분게이순주>에서 폭로한 ‘다나카 금맥’이 그 선구라고 할 수 있죠.” 야마모토 히로시가 1988년 ‘리크루트 사건’ 보도로 미국 조사보도협회상을 수상했을 때 한 말이다.
일본의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로 비유되며, 일본 탐사보도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꼽히고 있는 ‘다나카 연구’. 이러한 ‘작품’을 만들어 낸 다치바나 다카시는 과연 누구일까?

빽빽한 3단 편집, 40쪽에 이르는 장문의 기사. 다치바나가 쓴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그 금맥과 인맥’이다. 이 기사가 실린 <분게이순주>를 사기 위해서 사람들은 재고가 없어 정가보다 비싸게 사기도 했다는 후문이 있다. 그만큼 다치바나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더 나아가 현대판 도요토미라고 불리면서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취임한 다나카 가쿠에이 정권을 붕괴시키고, 그가 정치적 파멸의 길을 걷게 하는 데 다치바나가 큰 역할을 했다. 다나카는 ‘수의 논리’를 주장하며 압도적인 자금으로 정치를 했다. 수의 논리란, ‘정치는 곧 머릿수이고, 머릿수는 곧 힘이며, 힘은 곧 돈’이라는 그의 주장이다. 당시 같은 손가락 하나라도 후쿠다는 100만엔, 다나카는 1억엔을 뜻하고 어디서든 조금이라도 다나카를 옹호하면 그날 안에 돈이 도착한다는 말이 있었다.

다치바나는 다나카의 자금통로를 파헤치기 위해 그에 관한 자료를 전부 모았다. 특히 문헌자료의 정보는 원자료로 확인했다. 토지는 토지대장으로, 사람은 호적등본으로 확인하며 임원 모두를 조사했다. 그렇게 모은 정보들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기업의 관계로 알아보기 쉽게 표로 만들어 졌다. 이 조사방법에 대해 한국일보 황영식 논설위원은 실로 답답하지만, 착실한 작업으로, 이는 탐사보도의 기본이라고 평가했다.

▲ 다치바나 다카시의 독서편력을 볼 수 있다.

결국 다치바나의 보도로 다나카는 사퇴한다. 그러나 다나카는 자민당의 막후 실력자로서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일본 언론들은 다나카를 추궁하기는커녕 옹호하는 기사를 냈다. 또 정치의 본질적인 문제를 모두 정쟁문제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의 폐단도 한 몫을 했다. 이 때부터 다치바나는 금맥문제에 대해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그는 후속보도 <신세이 기업 ‘금맥상법’의 의혹을 마침내 밝혀냈다>에서 ‘검찰수사 발표가 유일한 사실로 확정되기 이전에 실상을 폭로해 나름대로 검찰수사에 영향을 미치려는 분명한 의도에서 쓴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치바나가 다나카를 계속 추적한 결과, 1974년 분게이순주에서 ‘록히드 사건’을 다루게 된다. 록히드 사건은 미국 군수업체인 록히드사가 항공기를 팔기 위해서 여러 나라에 뇌물을 뿌렸고, 일본의 고관들이 뇌물로 약 24억 엔을 받은 사건이다. 이 보도로 1976년 7월 27일, 다나카는 끝내 구속된다. 이는 일본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로 기록된다. 또한 국민들이 1955년 이후 38년간 집권한 일본 자유민주당 정권에 불신을 갖는 계기가 됐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1964년 도쿄 대학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분게이순주(文藝春秋문예춘추)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2년 만에 퇴사했다. 이유는 자신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1967년에 다시 도쿄대학 철학과에 입학했고, 재학 중에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호기심이야말로 가장 중요합니다. 인간에게 기본이 되는 것은 자신의 호기심이죠.” 작년 5월, 일본 잡지사 PRESIDENT(Online)와의 인터뷰에서 다치바나가 한 말이다. 다치바나는 배움의 원천은 ‘호기심’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근원적인 것을 지향하면서 파고드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이러한 지적 호기심으로부터 ‘다나카 연구’가 시작되었다.

다치바나는 원래 다나카에게 흥미가 없었다. 어느 날 다나카의 금권에 대해 의문 가질만한 것이 있냐는 편집부의 질문에, 단순히 다나카가 돈 만드는 방법이 궁금해지면서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다치바나는 편집후기에서 “‘특집 다나카 연구’는 정의심에서가 아니라 호기심에서 나온 기획이다. 신문과 여타 매스컴이 가르쳐 주지 않아 본지가 기획한다”라고 전했다. 그의 지적 호기심과 함께 신문의 한계를 알 수 있는 말이다.

1980년대에 들어 다치바나는 변신한다. 그는 특종기자, 권력과 싸우는 언론인의 이미지에 머물지 않고 ‘일본사회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 자리매김한다. 다치바나는 우주, 뇌를 포함한 과학 분야에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며, 탐구의 결과물들을 책으로 엮어냈다. 그의 집필활동은 1981년에 30여명의 미국 우주비행사들에게 편지를 보내 직접 인터뷰한 『우주로부터의 귀환』으로 시작된다. 1985년에는『뇌사』가 출간되면서, 독자의 궁금증을 대신해 기초적인 질문에서 본질적인 질문으로 진행하는 다치바나만의 서술방식인 ‘대화형식’이 확립됐다. 1996년, 다양한 이론과 가설을 제시하며『원숭이학의 현재』가 출간됐는데, 이 책으로 다치바나는 과학 저널리스트로 각광받게 된다.

그는 1995년에 도쿄 대학 교양학부 객원교수로 취임한 뒤, 현재 ‘조사해서 쓰고, 알린다’는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또한 도쿄대학 첨단과학연구소에서 정기적인 강의를 통해 일반교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왕성한 지적호기심을 반영하듯이, 그는 스페셜리스트보다는 제너럴리스트의 육성을 목표로 한다.

▲ 지난 9월 14일, NHK스페셜 ‘임사 체험-다치바나 다카시의 사색 문서, 죽을 때 마음은 어떻게 될까’ 방송 장면

그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9월 일본방송 NHK에서, 다치바나가 임사체험 연구현장을 다니며, ‘죽음’에 대해 사색하는 모습이 방영됐다. 올해 그의 나이 74세다. 이미 20여년 전 임사체험에 대해 취재했던 다치바나지만, 2007년 방광암 수술 이후 암의 재발을 염려하며 죽음을 경험하고자 한 것이다. 최신 뇌 과학, 심리학, 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을 철저하게 취재함으로써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다치바나는 그의 저서 <암, 생과 사의 수수께끼에 도전하다>에서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암 치료 현장을 취재했음에도, 그는 암이 재발한다면 화학요법을 거부하고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한다. 역설적이다. 방광암 수술 후 미국, 유럽 등을 돌아다니며 암에 대해 전문가 이상으로 조사한 그가 의학 기술을 부정하고, 순순히 죽음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자신을 생태계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삶과 죽음은 끊임없이 이어져 전체 생태계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생각에서다.

일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끌어 온 다치바나 다카시. 그의 끊임없는 호기심과 추적은 언론인의 무한한 가능성과 동시에 반성의 계기를 제공했다. 언론인도 노력을 통해 전문적인 세계에서 활동할 수 있고, 탐사보도 영역이 그만큼 무한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TBS 저녁정규뉴스의 한 캐스터는 다치바나의 ‘다나카 연구’를 보고 반성했다. “다나카 정권의 행방보다도 내가 몸담고 있는 정치저널리즘에 거부감이 들었다. 정부 측의 발표를 그대로 전하는 ‘객관보도’가 국민의 알 권리에 답하는 진정한 저널리즘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알고 있었으면서 왜 안 썼을까.”

앞으로도 지식에 대한 다치바나의 호기심은 계속 될 것이다. 그의 고양이 빌딩에서.

▲ 다치바나 다카시의 ‘고양이 빌딩’ 외관과 내부. 고양이 빌딩은 다치바나가 책읽기와 글쓰기를 위해 지은 건물로, 약 3만5천권의 책을 꽂을 수 있다. 오른쪽 내부그림에서, 책상, 의자, 잠시 눈을 붙일 쇼파 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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