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운 외투를 입어도 칼바람이 파고드는 날씨에 열심히 몸을 풀던 ‘WT프렌즈 야구단’ 선수들은 경기 전 직접 베이스와 마운드를 옮겨 왔다. 정식 야구 경기장이 아닌 초등학교 운동장이라 잔디는 물론 야구를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여건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운동장은 전날 내린 비로 바닥 곳곳이 패이고 미끄러워 정상적인 플레이가 불가능한 상황. 이로 인해 공이 불규칙한 바운드로 튀어 오르고, 주루 플레이를 하던 주자가 미끄러지는 등 경기 중 위험한 상황들이 연출됐고 그 때마다 선수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운동장 한 켠에 마련된 더그아웃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 파라솔과 의자 몇 개가 전부인 더그아웃은 선수들이 잠시 쉬는 동안 꽁꽁 언 몸을 녹일 곳조차 없었다. 2시간에 15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내고 대여한 경기장이라기엔 너무 열악한 환경.

WT프렌즈 선수들은 이와 같은 상황에 한숨을 내쉬면서도 “이렇게라도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것에 어디냐”며 절대적인 경기장 수 부족으로 이런 경기장조차 구하기 어려운 현실에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 경기 전 직접 마운드를 설치하고 있는 ‘WT 프렌즈 야구단’ 선수들.

한국여자야구연맹(WBAK)에 따르면 2014년 현재 연맹에 소속되어 있는 야구단은 43개, 활동 중인 선수는 800여 명으로 최근 2년 사이에만 10개 팀이 늘어났다.

해를 거듭할수록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여자 야구. 하지만 정식 프로 리그도 존재하지 않는 데다 위험한 스포츠라 인식되어 외면 받아 와서 여전히 활성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여자 야구 연맹이 만들어져 야구를 할 수 있는 제반 환경이 갖추어지기 시작한 것도 불과 7년 전으로 그 역사도 짧다.

이처럼 녹록지 않은 환경 속에서 야구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하는 야구’를 실천하고 있는 여성들을 만나 한국 여자 야구의 실정에 대해 들어보았다.

▲ “여자가 야구를 ‘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요.”

남도학숙 야구 동아리 ‘NOVICES’의 멤버로 활동했던 최유은(23) 씨는 여자로써 야구를 하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그 중 가장 힘들었던 일은 팀원들과 함께 야구 경기를 하러 간 곳에서 한 남성 관중이 여자 선수들을 보며 ‘여성들이 무슨 야구냐, 춤추고 응원이나 해라’라고 말했던 것.

그녀는 이와 같은 일을 겪으며 ‘여자도 야구를 하며 경기 자체를 즐길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 수준이 얼마나 낮은지 체감했다며 “여자 야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를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 “여자가 마음껏 야구 할 수 있는 곳도, 야구 용품도 없어요.”

 이명진(24) 씨는 2008 베이징 올림픽, 2009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그리고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천하무적 야구단』(KBS, 2009-2010)이라는 프로그램을 접하며 직접 야구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일부 남녀 공학 대학교의 야구 동아리의 매니저 자리를 제외하고 여학생인 그녀가 마음껏 경기를 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에 그녀는 2012년 우리나라 최초로 여대생들로만 이루어진 ‘Ewha Playgirls 야구단’을 창단했다. 야구단 가입 조건은 단 하나, ‘야구를 사랑하고 함께 플레이하며 즐기고자 하는 여성’이었다.

하지만 창단 이후 ‘야구 하는 재미’를 알아갈 때쯤 이화 플레이걸스는 또 다른 문제에 맞닥뜨렸다. 인터넷을 다 뒤져보아도 여성들의 몸에 맞는 야구 용품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던 것.

하는 수 없이 50여 명의 단원들 중 대부분이 큰 야구 헬멧 안에 모자를 겹쳐 쓰고, 유소년용 배팅 장갑을 껴야했다. 이러한 상황을 겪으며 이명진 대표는 “한국은 여자들이 야구하기 힘든 곳이라는 것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 “사회적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해요”

‘서울 CMS Bluebats’ 김주현 감독(43)은 여자 야구 국가대표팀 주장으로 세계 대회에 참가하며 한국 여자 야구의 초라한 현실을 절감했다. 경기 초반에는 한국 팀이 리드하다가도 4회를 넘으면 급격히 무너지는 모습이 반복되었던 것.

외국 선수들은 9회를 채워 경기 하는 것이 익숙했던 반면 한국 선수들은 장시간 이어지는 경기 경험이 없었던 것이 패인이었다. 2시간만 대관 가능한 경기장 사정상 평소 4이닝 정도의 짧은 경기만 가능해 9회까지 버틸 체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얇은 선수층도 한국 대표팀을 힘들게 만들었다. 대한야구협회에 따르면, 현재 전국 157개의 리틀 야구단 중 여자 선수가 있는 곳은 단 4곳. 그나마 중학교 야구부부터는 여자 선수가 전무하다. 체계적인 학원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외국과 비교할 때, 기본기가 탄탄한 뛰어난 선수들이 나오기 힘든 상황.

김주현 감독은 “여자 야구 저변 확대를 위해서는 장기적 차원의 선수 육성 시스템과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 차원의 관심과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 경기 전 파이팅을 외치는 ‘서울 CMS Bluebats’ 야구단.

2012년 프로야구는 한국 프로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누적 관중 수 700만 명을 돌파했고, 올 시즌까지 3년 연속 600만 명 이상 관중 동원에 성공했다. 총 관중 수의 40%에 해당할 정도로 늘어난 여성 팬들이 관중 수 증가에 기여한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이와 같은 프로야구 열풍은 보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직접 야구를 하는 여성들의 증가로도 이어졌다. 9월 10일부터 전북 익산에서 열렸던 LG배 한국여자야구대회가 지난 15일 비밀리에와 나인빅스의 결승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특히 2012년 첫 개최 이후 3회 째를 맞는 이번 대회에는 높아지고 있는 여자 야구의 인기를 보여주듯, 역대 최다인 37개 팀, 750명의 선수가 참여해 그 자리를 빛냈다.

아직까지 한국은 글러브를 끼고 배트를 든 여자 선수들을 낯설게 본다. 여자가 무슨 야구를 하냐며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야구에 ‘미친’ 여자들은 세상의 편견과 싸우며 척박한 환경에 뿌리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소규모 동호회 수준으로 출발한 여자 야구에 전국 규모의 리그가 출범한 것도, 한국이 2016 세계여자야구월드컵 유치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노력이 이루어낸 결과물이다.

언젠가는 우리나라에도 여자 프로야구도 생길 것이라고 믿는다는 그녀들. ‘즐겁고 재미있게 수준 있는 야구를 하는 것’이 꿈이라는 그녀들이 하루빨리 보다 좋은 환경에서 야구를 해나갈 수 있도록 야구계의 관심과 정책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저작권자 © 스토리오브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