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동암역에서 남광장 쪽으로 내려 오 분쯤 걸으면 작은 골목에 위치한 허름한 건물이 보인다. 이 건물의 지하, 사람들이 '상황실'이라 부르는 그 곳을 찾은 것은 지난 9월 23일. 추석 연휴가 막 시작된 날이었다.

길병원 민주노조 설립을 위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 다섯 평 남짓한 공간엔 복사기, 컴퓨터, 먹다 만 듯한 피자 몇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벽엔 '따뜻한 공동체 건설'이란 글씨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고 그 아래엔 방금까지 자다 일어난 사람들이 졸린 눈을 부비며 하나씩 모여든다. 길병원의 민주노조를 설립하려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4∼8년차인 여자 간호사들이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노조를 설립하려는 목적으로 모인 것은 아니었다. 친목회 성격의 모임으로 자주 만나는 동안 자연스레 병원에 대한 요구사항들이 나오게 됐던 것.

"능률을 높이기 위해 30분 일찍 출근했고 30분 늦게 퇴근했습니다. 환자들이 밀리는 날엔 2시간씩 연장 근무를 한 적도 있었죠." 현재 민주노조 위원장을 맡고 있는 오명심(30·분만과 간호사)씨의 말이다. 직원들은 IMF 이후 무급 휴일근로, 연장근로, 식대보조비 삭감, 인원의 급격한 감소, 호봉 동결 등의 고통을 감수해 왔다. 그러나 병원은 이 기간동안 가천의대 설립, 경원대 인수, 안센터 개원, 응급의학센터 건축, 경인일보 인수 등 대외적인 확장을 거듭하고 있다. 여성직원의 분만휴가(법:60일)를 50일을 주다가 그것이 문제가 되자 60일을 주고, 다시 -임신기간 중에는 생리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상 임금에서 10일치 임금을 삭감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타병원 직원들의 경우 50%, 가족들은 30%까지 진료비가 할인되는 반면 길병원은 직원과 가족 할인율이  30%, 20%에 그친다.

그러나 이들이 직원들의 복지만을 문제삼는 건 아니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많이 느낍니다". 무급 휴일근로 이후에도 환자들에겐 여전히 공휴일이나 일요일 각각 평일 진료비의 1.5배가 부과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 밖에도 부당하게 환자들에게 부담을 전가시키는 경우가 병원에 의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들을 모아 노조를 설립하기로 뜻을 모은 게 지난 8월 23일. 병원 내부에선 '9월부터 연봉제가 실시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고 그렇다면 노조 설립의 기회는 영영 봉쇄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직원들도 모르는 노조

그런데 26일 노조 설립 신고서를 가지고 해당구청인 인천 남동구청을 찾았을 때 이들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이미 89년 설립된 노조가 있으며 현재 그 아래 20명의 조합원이 등록돼 있다는 것, 또 지금껏 10년 동안 노조의 규약, 단체 협약, 임금협약서 등을 갖춘 채 조합이 정상적으로 운영된 것처럼 등록돼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당시 노조위원장으로 등록돼 있던 두나연씨는 99년 7월 24일로 임기가 끝난 상태였고 회계감사는 이미 병원을 퇴직한 사람이었다. 또 노조에 등록돼 있는 조합원들은 자신들이 조합원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오씨 측은 이에 대한 녹취 자료를 확보하고 있다). 이들은 민주 노조 설립 움직임이 구체화된 직후인 지난 8월 말, 병원측으로부터 이런 사실들을 통보 받았다고 한다.

노조 운영에도 문제가 있었다. 근로 기준법에 의하면 사용자는 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없는 경우 취업규칙의 작성 또는 변경시 근로자 과반수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제 97조 '규칙의 작성, 변경의 절차'). 98년 2월 두나연 집행부는 병원측과 직원들의 임금 동결, 자녀 학자금 지급 보류, 식대 보조비 보류 등을 합의하고 이것을 서류화해 구청에 제출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오명심 노조 측이 8월 26일 남동구청을 방문했을 때에야 직원들에게 알려졌다. 이 밖에도 기존 노조는 지난 10년간 노조 총회나 대의원 대회를 열지 않았으며 노조 사무실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조측 사람들은 기존의 노조를 '유령노조(휴면노조)'로 단정, 남동 구청 측에 노조 설립 신고서를 제출했으나 반려됐다(8/27). 그 이유는 첫째/ 현행 법상 ▲노동조합의 임원이 존재하고 ▲1년 이상 노동자의 활동이 있었던 걸로 보고되면 '휴면 노조'로 인정되지 않고, 둘째/ 기존 노조가 존재할 경우 복수노조를 2001년 12월 31일까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종법 부칙 5조).
 
노동 조합원 -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설립 신고서가 반려된 후 이들은 노조의 활성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 현 노조에라도 가입하기로 결정했다. 일단은 오명심 집행부를 포함, 조합원들이 현 노조에 가입한 다음 총회 때 새로운 집행부를 꾸린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지난 8월 27일 임시총회를 거쳐 새롭게 구성된 현 노조 집행부(차지원(32세, 원무과 직원) 노조 위원장 포함, 12명)는 252명의 직원이 제출한 노조가입원서를 받지 않고 있다.   집행부는 '노동조합 사무실에 비치돼 있는 가입원서에 개인 의지에 따라 가입하라'고 말하고 있으나 사무실은 8월 27일 신설된 이후 한번도 열린 적이 없는 상태다. 민주노조측은 차씨를 만나기 위해 하루에도 수 차례 원무과를 방문했으나 동료 직원들로부터 "출장 갔다"는 말만 되풀이 해 듣고 있다. 핸드폰도 한 달 째 연결되지 않고 있다. (기자 역시 취재를 위해 수 차례 연결을 시도했으나 매번 꺼져 있었다.)

9월 4일에도 가입원서를 전달하기 위해 결의대회를 끝내고 돌아가는 차씨를 기다렸으나 만날 수가 없었다. 대회장에 들어갈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차를 타고 가는 차씨를 막는 과정에서 구사대와 몸싸움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이 날 현장엔 노동청 근로감독관도 함께 있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강정목 감독관(경인 지방 노동청)은 "노조가 조합원의 가입을 거부하는 것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 감독관 입장에서 이를 시정하라고 지도는 할 수 있지만 강제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들 때문에 9월 20일, 민주노조 집행부는 총회 소집권자 지명요청을 남동구청에 제출했다. 이에 따라 남동구청에서는 차지원 집행부가 총회소집을 거부하고 있는지에 대한 실사에 나설 방침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서명자들의 명단을 병원측에 확인 차 공개할 수도 있다는 것에 오명심 위원장은 우려를 표시한다. 이미 9월 13일 발표된 89명에 대한 부서이동으로 오명심 노조에 대한 병원 측의 탄압이 가시화됐다는 것이다.

새 노조 사람들에 대한 인사이동

"부서 이동이 내정돼 있던 40명을 제외한 49명이 모두 9월 1일 규탄 대회에 참석했던 직원들이었습니다. 수술실의 경우 30명 중 11명이, 신생아 중환자실의 경우 4∼5년 차인 간호사 4명, 조무사 1명이 한꺼번에 부서이동이 됐죠. 한 부서에서 4명이상을 집단적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이례적일 뿐 아니라 해당부서의 전문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입니다. 신생아 중환자실의 경우 방하나를 폐쇄하고 외부 병원에서 오는 아기를 안 받는다는 무리를 감수하면서까지 진행된 일이죠." 7A병동 이수미씨의 경우 심도자실로 이동됐다. 심도자실은 방사선 피폭의 위험성 때문에 아기를 낳은 기혼자 중 더 이상 아기를 낳을 의사가 없거나 본인이 원하는 사람들에 한해 근무토록 하고 있다. 미혼 여성인 이씨가 일할 경우 불임이 될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9월1일 1차 규탄 집회 땐 병원측의 이례적인 회식이 마련되기도 했다. 민주노조 측은 이 날 회식 장소가 대부도, 명동, 송도 등 병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뤄졌다는 점, 집회가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7시 30분 경 해산됐다는 점을 지적한다. 직원들의 집회참석을 막기 위한 회식이었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9월 6일에는 병원장 명의의 경고장이 발부됐으며 CCTV가 병원 곳곳에 설치되고 일부 민주노조측 간부들이 미행당하는 일들도 벌어졌다.

수간호사들이 조합 가입 원서에 서명을 한 직원들을 불러 개별면담을 하는가 하면 탈퇴를 종용하기도 한다. "어떤 간부는 '네가 탈퇴하지 않으면 내가 사표를 쓰겠다'고까지 합니다." 이렇게 민주노조의 탈퇴를 종용하는 한편, 이들은 대거 차지원 노조에 가입, 상급단체에서 주관하는 '교육'을 받으러 다니고 있다. 병원 역시 '교육' 일정이 있는 날엔 이들에게 근무 조퇴 및 휴가까지 내 주는 '관용'을 베푼다는 것이다. 현 노조 집행부 대부분이 주임이나 과장같은 중간급관리자들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노조 다툼이 직원들 다툼으로
 
이런 가운데 병원 내부에서의 직원들간 갈등도 고조되고 있다. 8월 24일 회식 자리에서 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한 정석우씨의 경우, 맥주병으로 얼굴을 때린 김범우씨와 평소 '형, 아우'하는 사이였다. 사건이 소송까지 가진 않았지만 그 이후 이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지 못 하는 사이가 됐다.

4차에 걸친 집회과정에서 구사대로 동원된 동료 직원들과 몸싸움이 벌어지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이 오가기도 했다. "(차씨 노조측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온 직원들이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우리보고 '병원을 말아먹으려는 것 아니냐'고 해요. 어떤 수간호원은 '빨갱이'라는 말까지 하구요." 이런 갈등들은 서로간에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오 위원장은 말한다. "그러나 언젠간 이런 오해들이 풀릴 거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

그는 이런 일들이 환자의 안전과 생명을 우선시해야 하는 병원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더 큰 유감을 나타낸다. "8년간 현장에서 근무하면서 환자들에게 여러 가지 부조리한 상황들이 벌어지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전국 4위 규모인 병원에서 일하면서도 간호사로서 양심의 부담을 지울 수가 없었죠…만일 노조를 만드는 일이 우리(노동자) 편익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날, 길병원을 "거대한 공룡"이라고 별명지었다는 그는 기자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꿈적 않는 병원을 상대로 싸우는 일이 3개월, 아니 3년이 걸린다 해도 끝까지 투쟁의 의지를 굽히지 않을 겁니다".

그로부터 한 달

10월 25일 현재 오명심 집행부를 포함, 가입원서를 낸 432명의 조합원들은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오 위원장이 삭발을 하고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간지 7일째 되는 날(10/17), 병원은 '21일까지 가입 의사 확인을 받은 조합원에 한해 가입을 인정하겠다'고 알려 왔다. 그러나 이 기간 차지원 노조는  확인을 위해 노조 사무실을 방문하라며 점심시간엔 문을 잠그고 5시 이후엔 퇴근을 했다. 이 때문에 점심시간과 퇴근 후밖에 시간이 없는 직원들 상당수가 조합 가입 의사를 확인받지 못했다.

민주노조가 9월 중 병원을 상대로 노동청에 제출했던 진정서는 양측의 주장이 엇갈림에 따라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국정감사 등으로 연장된 법정계류기간(11/3)까지 해결되지 않을 경우 법정으로 송치될 예정이다.  

병원은 21일 징계 위원회를 열어 민주노조 집행부 18명과 조합원 19명 등 38명에 대해 ▲민주 노조의 활동이 길병원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점 ▲위법한 의료행위를 한다며 병원을 비방했다는 점 ▲유령 노조가 존재했다고 허위 사실을 유포한 점등을 들어 징계조치를 내리겠다고 통보해왔다.

 남동구청의 우문철 팀장(노사 지원팀)은 "구청은 공식적으로 길병원의 현 상황을 사업주와 노조 사이의 갈등이 아닌 양 노총간의 세력 다툼으로 파악해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으며 이는 병원 역시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민주노조 앞으로 전달된 후원금은 지금껏 1900여만원에 이른다.

김윤희 기자<dewed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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