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역 3번 출구를 빠져나와 1020번 버스를 타면 세검정초등학교까지 25분.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가파른 계단이 보인다. 숨이 턱 막힌다. 계단을 다 오르니 비탈진 언덕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31도의 찌는 더위 속에서도 임슬아(22)씨는 익숙하다는 듯 길을 안내한다. 언덕길 양옆으로 주택들이 모여 있다. 다 비슷하게 생겼다. 그녀가 그 중 한 집으로 향한다. “다 왔어요. 제가 사는 쉐어하우스에요.”

▲ 해비재로 가는 길

들어서고 보니 이 집은 조금 다르다. 벽에 그려진, 뜬금없는 키스해링의 작품이 가장 먼저 손님을 반긴다. 벽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작은 텃밭이 보인다. “집주인인 오빠가 오면 거기에 상추도 심고 토마토도 심고 그래요. 벽화도 오빠랑 여기 사는 사람들이랑 같이 그렸어요.” 그녀가 대문을 연다. 문에 붙은 여섯 글자가 눈에 띈다. HABIZAE(해비재), ‘함께 비상하는 집’이라는 의미다. 해비재 사람들은 어떤 꿈을 가지고 날아오르기 위해 모였을까.

아주 특별한 동거의 시작, 쉐어하우스(Share House)

해비재에는 18명의 남녀가 함께 산다. 20대가 대부분이지만 30대도 4명 있다. 주로 대학생과 사회초년생을 위한 공간이다. 젊음에 예술이 더해진 집이 바로 해비재다. 이들의 동거는 사실 정확히 말해, 한 집을 나눠서 쓰는 것을 뜻한다. 이들은 각자의 방이 있고 거실, 주방, 화장실을 같이 쓴다. 공과금도 정확히 N분의 1로 나눈다.

이와 같은 쉐어하우스는 1인가구가 급증하면서 주거공간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등장했다. 외국에서는 쉐어하우스가 보편적이지만 한국은 아직 그렇지 않다. 최근에야 쉐어하우스 컨셉의 TV 프로그램들이 등장하는 추세다. 해비재 주인 서혁준(29)씨는 이를 특히나 반가워하고 있다. “남녀가 같은 집에 산다고 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사실 그들이 걱정하는 일은 해비재에서 전혀 일어나지 않아요. 프로그램들이 편견도 없애주고 재미난 모습들을 많이 보여줘서 좋게 생각합니다.”

서혁준 씨는 해비재의 실세다. 홍익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 자대 대학원에 다니며 직장생활을 겸하고 해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그는 미대생으로서 그림으로 뭔가를 해내고 싶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갤러리 어시스트로 일할 때 중국 부자들이 그림을 사가는 것을 봤어요. 보통은 집에 맞는 그림을 사는데, 그들은 그림에 어울리는 집을 지으려 하더라고요. 그걸 보고 그림을 컨셉으로 집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013년 10월, 해비재는 그렇게 완성됐다. 그리고 그 해 11월부터 본격적인 쉐어하우스로 자리매김했다.

해비재는 쉐어하우스치고 위치가 특이하다. 집까지 가는 길이 꽤 힘에 부친다. 게다가 대학가와 거리가 먼,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다. “미술관 많고 공기 좋고 조용한 동네에 쉐어하우스를 지으려 했습니다. 주거환경에 초점을 맞췄죠. 세검정에는 아기자기한 펍이나 까페도 많고 야경이 정말 멋있어요. 이런 동네에 쉐어하우스는 해비재 밖에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쉐어하우스의 장점은 크게 두 가지다. 집세가 저렴하고, 외롭지 않다는 점이다. 해비재의 경우, 무보증금에 월세가 1인실은 45만원, 2인실은 35만원이다.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50만원을 웃도는 서울 자취방 시세에 비해 파격적이다. 이동우(22)씨는 학교 근처에 있는 값싼 자취방을 구하다가 해비재를 알게 됐다. “처음부터 쉐어하우스를 찾은 건 아니에요. 단지 무보증금과 무계약 조건이 마음에 들어서 들어오게 됐죠.” 부담없는 가격 덕분에 지금은 빈 방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반면 이대로(27)씨는 애초에 쉐어하우스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호주, 말레이시아, 영국에 장기체류 할 때 쉐어하우스에서 살았어요. 한국에 와서도 혼자 사는 것보다 친구들과 함께 살면 덜 외롭고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단순히 가난한 동거는 아니다. 쉐어하우스는 청춘들의 로망이다. 해비재 사람들의 동거는 그래서 더 특별하다.

우리의 인생이 Art다

18명의 해비재 구성원은 대학생, 회사원, 기자, 소믈리에, 사회복지사, 모델, 큐레이터, 파티플래너다. 직업만 보면 제각각이지만, 이들에게도 공통점은 있다. 모두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해비재는 3층으로 구성돼있다. 1층과 3층은 여자들이, 2층은 남자들이 사용한다. 집안에 들어가면 층마다 특징이 보인다. 벽에 걸려있는 그림이 다르다. 1층은 오드리햅번, 2층은 비틀즈, 3층은 마더테레사다. 서혁준 씨가 정해놓은 컨셉이었다. “딱히 이유는 없어요. 제가 판매하려고 프린팅한 그림들인데 안 팔리기에 인테리어 컨셉으로 활용했죠.

▲ 해비재의 벽에 걸린 그림들

그의 대학시절, 그림과 제품의 콜라보레이션이 미술계의 주된 흐름이었다. 그는 제품 대신 집을 택했다. 그림이 가장 필요한 곳은 집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해비재는 ‘예술이 함께하는 주거 커뮤니티’가 됐다. 해비재 사람들도 이곳에 들어오기 전 예술 컨셉에 대한 고려를 많이 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동우씨는 건축학도, 이대로 씨는 파티플래너로 예술분야와 연관된 전공을 가졌다. 물론 예술분야 종사자만이 해비재에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서혁준 씨의 표현에 따르면, ‘인생을 즐기며 예술처럼 사는 사람’이 해비재에 머무르기 적합하다.

결국 인생 자체가 예술이다. 해비재 사람들은 그런 삶을 지향한다. 그들에게 예술은 거창하지 않다. 함께 살면서 누리는 일상이 예술이다. 예를 들면 텃밭을 가꾸고 벽화를 그리거나, 저녁에 다같이 2층 거실에 모여 기타와 우쿨렐레를 연주하는 것과 같은 소소함이다. 임슬아 씨에게 가장 좋았던 기억이기도 하다. “해비재에서 평범하게 누리는 일상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게 특별한 경험이었음을 깨닫게 돼요. 새벽에 즉흥적으로 북악스카이에 별 보러 가고, 입대하는 친구를 위해 홈파티를 여는 것은 보통 집에서 잘 안하잖아요. 쉐어하우스니까 이런 추억을 자주 쌓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작은 공동체, 해비재 사회

‘밤늦게 술 마시는 일은 자제해 주세요. 다른 사람들이 자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해 주세요.’, ‘본인이 먹은 음식물 및 설거지들을 꼭 해주세요. 다음 사람들이 불편해 합니다.’, ‘본인 물건이 아닌 것들은 사전 동의 없이 절대로 만지지 마세요.’

집안 곳곳에 붙은 ‘좋은 집 만들기 규칙’이다. 10가지 세부 사항이 제시돼 있다. 해비재에서도 남들과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이대로 씨는 유일한 쉐어하우스 경험자다. 그러다보니 초반에 감수해야 할 부분들이 많았다. “처음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 주방용품 등 필요한 것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 중 일부는 처음에 제가 샀어요. 그런데 어느새 공동물품이 돼있더라고요.” 냉장고 한 칸까지 철저하게 나눠썼던 외국과 너무 달랐다. 그는 설거지 등 기본사항도 가끔 잘 지켜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규칙은 불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같이 살다 보니 거슬리는 점도 있고 잘 지켜지지 않는 부분도 당연히 있어요.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만 지키고 살면 문제없어요. 규칙이 너무 많으면 삭막하잖아요?”

해비재가 문을 연지 7개월이 지났다. 그 동안 나간 사람도 있고 새로 들어온 사람도 있다. 이 작은 공동체에도 갈등은 존재한다. 임슬아 씨는 층간 분위기 차이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층이 다르면 서로 접할 기회가 많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층마다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요. 이런 점 때문에 한 집에 같이 살면서 종종 사소한 일로도 어색한 사이를 만들어버리곤 하죠.” 열 길 물 속 알아도 한 길 사람 속 알기 어렵다. 살아온 환경의 차이가 때로는 같이 살 때 큰 어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갈등이 일어나면 원만히 해결하는 것은 그들 몫이다. 해비재에 살면 갖춰야할 필수 항목이기도 하다. 그래도 이 곳 사람들은 즐거움을 잃지 않고 무던히 살아가고 있다. 해비재는 여느 사람 사는 곳과 다르지 않은 그들만의 작은 사회다.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다. 곧 해비재에 새로운 거주자가 들어온다고 한다. “그 분은 직업이 바리스타라는데?” 임슬아 씨의 목소리에 기대감이 묻어나온다.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설레는 일이다. 해비재를 통해 새로운 인연을 쌓고, 관계를 형성해가는 것 말이다. 같이 살면서 얻은 친구들이기에 더 소중하다. 서혁준 씨의 의도대로 해비재는 잘 돌아가고 있다. 그는 올 10월 신촌에 두 번째 해비재를 만들 예정이다. 내년에는 작가들을 위한 집을 만들려고도 구상중이다. 갤러리와 작업실이 합쳐진, 꿈의 공간이다.

“저는 그림 그리는 것만이 예술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낡은 집을 꾸며서 미술관 컨셉으로 만들어서 사람들과 같이 사는 것도 제 작품이고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미술을 이용한 다른 것들을 해비재라는 이름으로 해볼 계획입니다.”

서혁준 씨의 예술이 주거공간의 개념을 바꾸고 있다. 단순한 쉐어하우스를 넘어섰다. 예술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함께 비상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해비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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