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삼의 의약품치료 보조 효과, 피부건강 또는 미용 효과, 퇴행성 뇌질환 개선효과…’

2012년 3월, 동국대 산학협력단 홈페이지에 올라온 고려홍삼 출연연구과제 공모안내서에 적힌 연구과제 중 일부다. 이 연구과제에 참여하려면 홍삼의 ‘효과’를 증명하는 연구를 해야 한다. 연구 방법에 따라 임상 또는 비임상 효능 연구로 구분하며, 방법과 참여 연구인원에 따라 최소 3,000만원부터 지원한다. 2010년에 서울대 산학협력단 홈페이지에 올라온 고려홍삼 연구과제 공고 내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과제 당 3,500만원 내외라고 적힌 일반과제 목록에는 총 24개의 항목이 있었다. 모두 홍삼의 긍정적인 효능에 대한 주제였다.


식물 추출물에는 다양한 성분이 섞여 있다. 실험 방법과 처치에 따라 다양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긍정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측면도 관찰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연구과제 공고에서는 ‘증진’, ‘개선’, ‘효능’, ‘예방’ 등의 단어만을 명시하고 있다. 다른 결과의 가능성은 고려대상이 아니다.

 

효과만 인정해주는 연구, 중간평가에서 좋은 점수 받지 못하면 바로 연구비 끊겨

 

2010년과 2012년 과제 공고에서 모두 연구자는 중간에 한 번, 그리고 최종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중간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면 바로 탈락돼 연구비가 끊길 수 있다. 최종 보고서까지 제출한 뒤에는 연구 결과를 정리해서 특정 학회지나 ‘고려인삼학회’ 소속 학술지에 게재를 해야 한다. 출연기관에서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도중에 탈락하기 때문에 산학협력에 참여한 연구자들은 최대한 고려홍삼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실험을 할 수 밖에 없다.


다양한 식물에서 얻은 추출물을 세포에 직접 처리해보고 변화를 확인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서울대 의과학과 배정수(33) 씨는 “효능을 목적으로 진행되는 의뢰실험은 의뢰자의 목표가 정해져있는, 생각의 폭이 적은 실험”이라고 말했다.

 


의뢰자의 목표가 분명한 실험은 과학적 사고를 방해할 가능성 있어

 

연구비를 받으면서 의뢰자의 목표를 알고 있는 실험을 하는 경우, 연구자의 자유로운 과학적 사고를 방해할 가능성이 있다. 단국대 기생충학교실 서민 교수는 2011년 CBS의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프로그램에 출연해 글루코사민의 통증 완화 효과 연구와 연구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언급했다. 글루코사민의 효능을 다룬 15개의 논문을 모아 분석을 한 블라드(Steven C. Vlad)의 보고서 내용이었다. 서 교수는 “제약회사에서 연구비를 받았던 연구는 모두 글루코사민이 효과가 있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면서 “반면에 아무런 재정적인 지원을 받지 못한 연구는 효과가 없다는 결론으로 논문을 썼다”고 했다. 이 원인에 대해 서 교수는 연구자의 의도에 따라 충분히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통증이 그대로인가요, 줄었나요?’와 ‘통증이 좀 줄었죠?’라는 질문, 다른 뉘앙스로 묻는 것만으로도 실험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상아탑형’ 교수도 연구비를 위해 기업과 손잡아

 

하지만 연구비를 위한 민간기업과의 협력은 책임연구원이나 교수에게 기회다. 회사 측에서 원하는 실험을 대신 진행하면서 연구비를 받아 실험실의 재정을 유지하고, 시약과 기자재를 구매하는 데 주로 쓴다. 회사와 공동으로 연구했다는 사실은 하나의 경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2013년 10월 15일부터 11월 18일까지 과학기술정책연구원에서 156명의 국내 교수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산학협력에 대한 인식을 기준으로 그들을 ‘상아탑형’, ‘하이브리드형’, ‘산학협력형’으로 구분했다. ‘대학과 기업은 협력하기 보단 각자의 영역에 충실한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교수, 즉 산학협력에 대해 가장 부정적인 교수는 ‘상아탑형’으로 분류됐다. ‘하이브리드형’, ‘산학협력형’으로 갈수록 기업과의 공동 연구에 긍정적인 성향을 보였다. ‘상아탑형’ 교수들이 결국 산학협력을 하게되는 동기는 뭘까. ‘연구비 및 연구 관련 지원을 받기 위해서 했다’는 답변이 80%로 가장 많았다. 금전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얘기다.

 


한국연구재단 R&D 예산 70%이상 학계에 투자… 정부의 연구비 지원금은 적지 않아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은 매년 증가하는 추세에 있고 그 중 절반 이상은 학계로 투자된다. 그럼에도 항상 연구비 부담에 시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내 연구관리 전문기관 중 가장 많은 예산을 집행하는 곳인 한국연구재단의 2013년 연이상을 학계에 투자했다. BK플러스 사업이나 글로벌 박사 펠로우십 사업 등 연구 인력 양성에 투자된 지원금까지 합하면 그 규모는 더 클 것으로 분석된다. 2008년부터 2012년 사이에 학계로 지원된 연구비를 가장 많이 가져간 곳은 서울대, 연세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고려대 순서였다. 분야별로 구분하면 생명공학기술(BT)의 연구개발비 점유율이 약 30.8%로 가장 높았다. 이는 한국연구재단에서 전체 인문사회 계열에 지원한 금액의 3배에 해당하는 액수다.

 


그러나 성과중심의 연구지원금 분배, 연구실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으로 이어져

 

이처럼 학교는 기업이나 정부출연 연구소와 비교하면 정부로부터 가장 많은 연구비 혜택을 받고 있다. 하지만 정작 연구자들은 연구비에 대한 스트레스가 여전하다고 말한다. 정부가 지원하는 전체 연구비 예산은 매년 증가했지만 연구자들이 체감하는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성과 중심의 평가제도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분석한다. 과학∙산업 분야 소식지 대덕넷 임은희 기자는 “R&D 지원 예산을 매년 늘려왔다고 해도 대부분의 기초과학 연구자들은 체감하지 못한다”면서 “기초과학 연구비 제도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성공이 불확실한 연구에도 투자할 수 있는 체계여야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런 종류의 연구를 뒷받침할 만한 행정적 수준에 오르지 못했다”고 말했다.

 


연구비가 많은 ‘부자랩’과 돈이 없는 ‘가난한 랩’

 

‘연구비를 잘 따오는 교수가 능력 있는 교수’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연구비 부족은 실험실의 생사를 결정짓는다. 화학, 생명과학 및 의∙약학 등 실험을 통해 연구를 진행하는 기초 과학 기술자에게 연구비는 생존 문제와 직결된다. 신임 교수는 물론이고 이미 어느 정도 기반을 갖춰 경력을 쌓은 교수들도 실험실 시설을 유지하고 교육에 투자하기 위해서, 논문을 쓰기 위해서 연구비가 필요하다.


학생들의 진로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학부생들이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지도교수를 결정해야 할 때 선배나 친구를 통해 실험실과 교수의 재정적인 상황을 파악하려 한다.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이 ‘부자랩’인지 ‘가난한 랩’인지 따져본다. 연구비가 많은 실험실에 입학해야 좋은 환경을 보장받으며 인건비 걱정 없이 원하는 연구를 할 수 있어서다. 올해 서울대 대학원에 입학한 김예지(25) 씨는 “원하는 연구 분야를 선택한 후에는 가고 싶은 실험실의 연구 환경과 규모를 미리 알아봤다”고 말했다. 교수의 능력이 ‘학교 밖에서 얼마나 많은 연구비를 땄는지’로 평가받는 상황. 제자들마저 교수의 그 능력을 보고 입학을 결정하는 상황이 됐다.

 

축적된 결과가 없는 신임 교수들에게는 더 불리한 연구비 문제

 

신임교수들은 더 불리하다. 정부가 지원하는 연구 과제의 경우 심사 과정에서 지원자들의 선행 연구 결과와 그간의 논문 실적을 가장 높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연구 경력이 짧은 교수는 연구물이 많은 선배 교수의 벽을 넘기 힘들다. 각 대학의 정착지원금 역시 절반 이상의 신임 교수가 미흡하다고 느끼는 것으로 드러났다. 2007년 ‘SciON(사이언스온)’의 설문결과보고서에 따르면 한 부임 5년차 이내의 국내 교수 172명 중 72%가 ‘소속 대학의 지원이 미흡하다’고 생각했다. 교수들이 생각하는 적절한 지원금은 5000만원~1억원 미만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절반이 넘는 신임교수가 소속 대학에서 지급한 정착지원금의 범위가 1000만원도 채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경제 논리가 아닌 사회적 선(善)을 추구하기 위한 콜롬비아 대학의 움직임


한국학술진흥재단 소식지 2009년 6월호에서 산학협력기획팀 곽환 팀장은 미국 콜롬비아 대의 기술 사업화 과정의 주요 미션(mission)인 ‘네 가지 요소들의 최적의 균형(Optimal Balance)을 찾는 것’에 대해 소개한다.  “그 네 가지 요소는 첫째가 대학의 위험을 최소화할 것, 둘째가 수익을 최대화할 것, 셋째가 연구자들에 대한 봉사에 충실할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사회적 선(Societal Good)’을 추구하는 것이다.”
곽 팀장은 ‘사회적 선’의 의미에 대해 “산학협력은 경제적인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하며 “실제로 미국의 많은 대학들은 이러한 정신으로 – 산학협력에 투입되는 비용보다 그것의 결과가 미약하더라도 – 꾸준히 산학협력활동을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성과위주의 산학협력과 정부 연구비 지원 제도, 개선 필요

 

2011년 9월 대덕연구단지의 한 행사에서 당시 한국연구재단 이사장이었던 서울대 오세정 교수는 “미국의 경우 연구비를 주면 그대로 끝”이라며 연구비를 위해 1년 마다 평가를 받는 우리나라의 제도를 꼬집었다. 매해 진행상황을 보고 받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바로 중도에 탈락시키거나 제약을 주는 우리의 관행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연구의 특성에 따라 3년을 연구해도 성과가 안 나올 가능성이 많다. 그렇게 되면 연구비가 끊긴다”며 논문을 쓸 수 있는 그럴 듯한 연구만 하게 되는 한국 과학계의 현실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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