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걸 중의 여걸이라고도 불린다. "백발에 빨간 옷을 입은 할머니"까지만 말하면 누구나 한 번에 알아듣는 유명한 주인공. 한국 소비자 연맹 회장 정광모(70)씨다. 젊은이들에게 익숙한 이름은 아니지만 "빨간 옷의 할머니"는 웬만한 정치인보다 인지도가 높다.

50년 전 그는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학교를 다니던 중 6.25가 일어나 서울의 학교는 문을 닫았다. 덕분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재등록을 하러 가야 했다. 그러나 그 때의 기차가 지금처럼 정확할 리 없었고, 결국 기차의 연착으로 등록 날짜가 지나버렸다.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쫀쫀한 회계 선생님"이 등록을 시켜주지 않아 재등록을 할 수가 없었고, 졸업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기자가 될 수 있었던 거니까…. 결과적으로는 잘 됐지."

전쟁이 일어난 다음 해 그는 평화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다. 신문사 내의 YMCA에서 소비자 운동을 시작한 그는 80년 서울 YWCA 위원장이 되면서 30년 경력의 기자 생활을 마감했다. 69년부터 시작한 소비자 운동 경력도 올해로 꼭 30년이 됐다.

70년에 창립되고 나서 이렇다 할 성과물이 없던 한국 소비자 연맹은, 78년 그가 제 2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비약적인 성장 곡선을 그린다. 대구지부(82년), 춘천지부(83년) 등 7개 지역에 연이어 지부를 개설해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돋움했고, 국제 학술회 등에 참가해 소비자 운동의 세계화를 이루기도 했다. 또 소비자 고발 센터 개설, 소비자 대학 강좌, 상품 테스트 등 소비자 운동의 모습도 구체적인 모습을 띠게 됐다.

빨간 신호등, 소비자 운동

그는 스스로를 소비자 운동의 '대모'격이라고 이야기한다. 자칫 자화자찬으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의 태도는 스스럼없이 자연스럽다. 그만큼 당당하다는 뜻일까. "그 때 고발장 만드는 법, 기업과의 관계 모두 내가 만들었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소비자 운동을 시작한 거야. 소비자 고발 센터를 정식으로 시작한 것도 그때였지." 그는 젊었을 때 소비자 운동을 시작한 것은 시대적 의무였다고 생각한다.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소비자 문제라고 말하는 그에게 소비자 운동의 보람은 무엇보다 '소비자의 기쁨'이다. 소비자에게 문제 해결 방식을 적절하게 제시해주는 것이 그에겐 "재미있고 흐뭇하고 자신감을 느끼는 일"이다. 작은 예로 음식에 든 돌을 씹어 이빨이 부러졌다고 하자. 이 때 피해를 입은 소비자가 한 번의 치료비 뿐 아니라 몇 년 동안의 지속적인 치료비까지 보상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제대로 된 문제 해결이다. "NGO 활동으로써 과학적이기도 하고, 재미있는 일이에요."

요즘의 젊은 소비자들에 대해서는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다. "예전에는 귀찮고 시간 없다는 이유로 참고만 있던 소비자들이 요즘 들어 자기 권리를 찾는 모습을 보면, 고생스럽긴 해도 일이 즐거워요." 점점 제 몫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소비자들을 보며 그는 자기 일처럼 기뻐한다. "인간이라는 게 성취감도 있고 대리만족도 있으니까…. 제대로 된 배상을 받는 사람을 보면 흐뭇하지."

그는 명함 사진에서도 빨간 옷을 입고 있었다. 언제나 디자인이 다양한 빨간 옷을 입는 그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처음에는 '좀 눈에 띄어야 할텐데'하는 생각을 했지. 여자가 나 혼자였으니까." 지금 그는 빨간 옷의 의미로 가장 먼저 '경고'를 꼽는다. "소비자 운동은 스톱이라고 말하는 신호등 같은 걸지도 몰라요. 우리 자신이 빨간 신호등이 되는 거야. 소비자단체 협의지도 빨간 책이지." 그는 백화점에 들를 때면 점원들이 자신을 보고 "떴다!"라면서 계량기와 저울을 숨기곤 했다며 즐거워했다.

인생의 절반은 70부터

사이버 시대의 세대차에 대해서 그는 흔하지 않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핵가족 시대지만, 2000년대에는 3세대 정도가 함께 사는 대가족 제도가 다시 돌아올지도 몰라요. 이제 세대차가 좁혀졌어. 연장자와 연소자와의 관계가 단축됐지." 그에게 사이버 시대는 젊은이들이 활개치는 시대가 아니다. 누구나 공평하게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시대, 아니 오히려 "인생 경륜이 있고 사물을 보는 시각이 무르익은 사람들"이 힘을 가지는 그런 시대다. 함부로 2, 30대가 사회의 기둥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앞으로 절반이 남았다"며 웃음을 지었다.

"나는 또 태어나더라도 신문 기자가 될거야. 신문 기자를 할 때는 정치인, 경제인들이 꼼짝 못하더니 소비자 운동을 하니까 돈 있는 사람들이 절절매지. 재미있어." 사회의 감시자, 즉 watch tower, watch dog로서의 역할을 그는 좋아한다. 70의 나이에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하는 그. 살아온 만큼의 인생 경륜이 더욱 두터워지고 다듬어져 사회의 기둥으로 또다시 거듭나기를 바란다.

조혜원 기자<dewed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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