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holas D. Kristof, The New york Times Columnist

1997년, 그가 타고 있던 비행기가 콩고에서 추락했다. 그는 무사했지만 비행기 트라우마가 생겼다. 콩고를 떠날 때는 차를 탔다. 길목에 들어서는 순간 반란군이 그를 가로막았다. 후투(Hutu)족을 학살하던 반란군이었다. 졸지에 포로가 되었다. 궁리 끝에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그는 반란군 지도자의 허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다행히도 그 지도자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구사일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잠시 후 거짓말이 들통 났다. 반란군은 그를 쫓기 시작했다. 정글에서 일주일간의 추격전이 이어졌다. 우간다 국경까지 가서야 겨우 그들을 따돌렸다. 걱정을 한시름 놓기도 전에 감기에 걸린 듯 열이 나고 몸살 기운이 돌았다. 말라리아였다. 그것도 가장 치명적인 조율의 말라리아. 일주일간 병원신세를 져야했다. 니콜라스 크리스토프의 인생에서 가장 무섭고 끔찍했던 ‘취재’여행이었다.


<미국 비영리단체 Academy of Achievement와의 인터뷰 중에서>

 

▲ 다르푸르에서 취재중인 크리스토프. 사진=뉴욕타임스(2009)

 

 

하버드 대학 신문 크림슨(The Crimson)에서 크리스토프와 같이 일했던 친구이자 CNN의 법률 분석가인 제프리 투빈(Jeffrey Toobin). 그는 크림슨과의 인터뷰에서 크리스토프를 인디애나 존스에 비유했다. “그가 도덕적 양심을 가진 언론인이 되리라고는 예상했지만, 인디애나 존스가 될 줄은 몰랐어요.”

모험에 대한 크리스토프의 애착은 중독에 가깝다. 그는 취재를 위해 150개국 이상을 돌아다녔다. 민주화를 울부짖던 천안문 광장에 그가 있었고 다르푸르 대학살을 세상에 알렸다. 계엄령이 선포된 폴란드에 겁도 없이 들어가는가 하면 ‘악의 축(Axis of Evil)’이라 불리는 이란, 이라크, 심지어 북한도 여러 번 다녀왔다.

그의 여행 인생은 대학시절, 영국 옥스퍼드 대학으로 유학가면서 시작됐다. 월드흄(worldhum)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과거를 회상했다. “옥스퍼드를 다닐 때 방학만 되면 배낭여행을 떠났어요. 교실에 앉아 있는 것보다 여행을 통해 더 많이 배울 수 있음을 깨달았거든요. 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갔습니다. 여행경비를 대기 위해 기사도 많이 썼죠.” ‘역마살’의 시작이었다.

1984년 뉴욕타임스에 입사한 후 홍콩, 베이징, 도쿄의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그가 베이징 특파원으로 있던 1989년이었다. 6월 4일 아침. 천안문 광장이 들끓었다. 그 해 초반부터 베이징에 감돌던 심상치 않던 기운이 폭발한 것이다. 그는 현장을 돌아다니며 취재를 하고 기사를 썼다.

“수 천 명의 군인들이 무력을 사용하여 학생과 노동자들을 죽이고 시위대로부터 수도를 재탈환하였다. 군대는 천안문 광장을 행진하며 가끔 허공에 총을 발사하기도 하고 그들을 가로막는 사람들에게 직접 발사하기도 했다.…‘영원한 평화의 거리’라는 뜻을 가진 창안대로는 친구들의 시체를 옮기는 청년들의 울부짖음으로 가득찼다.” 뉴욕타임스에 실린 그의 기사 일부분이다. 그는 생생한 탐사보도로 당시 뉴욕타임스의 기자였던 부인 쉐릴 우던(Sheryl Wudunn)과 함께 최초로 부부 공동 퓰리처상을 받았다.

크리스토프는 소저너스(Sojourners)의 편집장 짐 월리스(Jim Wallis)와의 인터뷰에서 “천안문 사태는 기자로서의 분기점이 되었다”고 말했다. “천안문 광장에서 있었던 일은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최소 500명은 사망했을 겁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이 숫자는 중국에서 일어나는 일의 맥락에서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죠. 중국 시골에서는 매년 3천명의 사람들이 자연재해로 죽어가고 70만 명의 젊은 여성과 소녀들이 성매매에 연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거든요.”

우던 또한 굿리즈(goodreads)와의 인터뷰에서 그들이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전했다. “천안문 사건을 취재한 다음해에 저희는 중국 전역을 여행하며 천안문 사태만큼 충격적인 일을 목격했어요. 매년 39,000명의 여아들이 1살이 되기 전에 죽었죠. 하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글을 쓰지 않았어요. 저희가 그 일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여성 인권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절망너머 희망으로(Half the Sky)>를 공동 집필한 계기가 됐다. <절망너머 희망으로>는 21세기에도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참담한 실상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여성의 권리 강화가 빈곤과 극단주의를 근절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제시한다. 또, 여성들이 교육을 받고 사회에 진출해야 궁극적인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설명한다.

크리스토프와 우던은 환상의 커플이다. 운명공동체라고나 할까. 분명 ‘결혼’과 ‘글쓰기’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 둘을 20년 넘게 동시에 해오고 있다는 것. 보통 인연이 아니다. 그들은 함께 움직이며 더 큰 힘을 낸다.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경험한다. 하지만 다른 것을 느낀다. 그리고 ‘같음’과 ‘다름’을 한 작품에 녹여낸다.

그들은 <China Wakes: The Struggle for the Soul of a Rising Power>, <Thunder from the East: Portrait of a Rising Asia>, <Half the Sky: Turning Oppression into Opprtunity for Women Worldwide> 등 3권의 책을 공동집필했다. 그들의 시선은 같은 곳을 향한다. 여성의 인권이 좀 더 신장되기 바라고 세계 빈곤이 해결되기를 바란다.

그의 글은 부화하기 직전의 새알 같다. 꿈틀거리며 알을 깨고 나오려한다. 누군가 그의 글을 읽을 때, 알이 깨지고 새끼가 머리를 치켜든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향한 변화를 맞이한다. 크리스토프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글을 이용한다. 자신의 알을 깰 사람을 ‘글’로 찾는 것이다.

크림슨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저널리스트의 임무에 대해 역설했다. “저널리스트는 이미 기사화 된 사건에 대해 사람들을 설득하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주목받지 않은 사건을 부각시키기 위해 제 칼럼을 이용합니다. 제 칼럼이 다르푸르의 공포, 성매매, 산모 사망률 등의 문제에 영향력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캄보디아의 성매매에 대한 글을 쓰고 난 후부터 사창가 소유주들이 체포되고, 해가 갈수록 납치되는 소녀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죠.”

2004년 수단, 그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공포의 공기가 다르푸르를 감싸고 있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무언의 동의였을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누군가 쓸 용기도 내지 않았다. 소리없는 학살에 대해. 그는 칼럼을 통해 다르푸르의 실상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 주제에 대한 글로 2006년 두 번째 퓰리처상을 거머쥐었다. “사실적이고 심층적인 취재를 바탕으로 위험을 감수하고 다르푸르 대학살의 실상을 알려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당시 퓰리처 상 심사위원은 크리스토프의 글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거운’ 주제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가끔 생뚱맞을 정도로 다양한 글을 쓴다. 그래서일까, 그의 글은 참 흥미롭다. 개발도상국 문제를 쓰다가 어린이 책에 대해서 쓴다. 뇌 과학에 대해 쓰기도 하고 농업문제에 대한 고찰도 한다. 아이를 키우기 좋은 도시로 오클라호마를 꼽는 칼럼을 쓰는가 하면 일주일 후에는 미국의 입양 시스템에 대해 비판한다.

뉴욕타임스에서 진행된 독자 인터뷰에서, ‘칼럼주제가 참 다양하다’는 에반 스털링(Evan Sterling)의 말에 대해 그는 재치 있는 답변을 했다. “전 지루함을 곧잘 느낍니다. 그게 바로 제가 여러 분야를 기웃거리는 이유죠. 저널리즘의 매력은 색다른 이슈들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돈을 벌면서 말예요!”

30년간 뉴욕타임스에서 자리를 지켜왔다. 퓰리처상도 두 번이나 받았다. 그 권위와 명예가 압도적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옆집 아저씨같은 면모가 있다. 그는 대중과의 소통을 좋아한다. 크리스토프는 뉴욕타임스의 첫 번째 블로거다.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채널까지 운영중이다. 일주일 두 번의 칼럼으로는 그가 겪는 일을 담아낼 수 없어서다. 트위터에서 140만 여 명이, 페이스북에선 8만 여 명이 그를 팔로우한다.

그는 패스트컴퍼니(Fastcompany)와의 인터뷰에서 소셜 네트워크의 미래를 전망했다. “아이티에 취재하러 갔을 때, 좋은 기삿거리가 떠오르지 않아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독자들에게 물었죠. 그랬더니 정말 좋은 아이디어들을 얻을 수 있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뉴스 산업의 미래에 대해 걱정했습니다. 그 때 저는 소셜 네트워크가 그 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또한 그는 뉴욕타임스의 후원을 받아 2006년부터 “Win a Trip”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에세이 대회다. 우승자로 뽑힌 학생이 크리스토프와 함께 취재 여행을 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미래의 크리스토프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는 바쁘다. 칼럼도 써야하고 일주일에 서너 번 블로그 포스팅도 한다. 여행을 하면서 간간히 SNS를 통해 근황도 알려야 하고, 수백 개의 댓글 중 몇 개는 읽어야 한다. 그 와중에 책을 쓰고 취재도 한다. 부인과 세 아이들도 신경 써야 한다. 하루가 멀게 변하는 미디어 산업 속에서, 젊은이의 홍수 속에서, 그는 발버둥 친다.

의문이 들었다. 왜 이렇게 눈코 뜰 새 없이 사는 것일까. 뉴욕타임스의 대표 칼럼니스트 정도라면 이젠 모험도 좀 줄이고 안주해도 될 법 한데. 2008년 6월, 안나 프랑크 상(the Anne Frank Award)를 받은 그에 대해 NBC의 앵커 앤 커리(Ann Curry)가 한 말이 떠올랐다. “에드워드 머로우(Edward Murrow)에 버금가는, 용기와 신념을 보여준 이시대의 저널리스트. 그는 우리 집단의식의 대변자다.”

그렇다. 아직도 세상에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하루하루 살기가 버겁다. 인권은 가진 자만의 특권이다. 그는 그들에게 목소리가 돼줘야 한다. 1989년, 천안문 광장을 바라보던 젊은 기자 크리스토프는 아직도 달린다. 그가 시작한 일을 끝맺기 위해 매일매일 치열한 삶을 산다. 암흑의 핵심에 등불을 갖다 대는 그가 이 시대의 진정한 리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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