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관계도 스펙인 시대, 기업 대다수 입사지원서에 가족사항 기재 요구

* 이 기사는 2012년 12월 5일자로 취재 및 보도된 기사로, 2014년 현재 입사지원서 사정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를 채용하겠다는 것인지, 가족을 보고 채용하겠다는 것인지 번번이 난감했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올 하반기에만 30여개 기업에 입사지원서를 보낸 이규철(27)씨는 매번 개운치 않았다. 대부분의 기업에서 입사지원서에 부모의 학력, 직장, 직위 등 가족정보를 기재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가족 관련 항목들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어요. 일종의 요식행위라고 느꼈죠.” 하지만 지원서를 쓸수록 이씨는 의구심이 들었다. “가족사항에 대해 너무 자세하게 물어보니까 소위 부모님의 ‘빽’이 입사 평가에 있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더라고요.”

 

금융사 입사를 준비하고 있는 취업준비생 김연수(24)씨도 마찬가지다. 입사지원서의 재산현황에 대한 질문 때문에 불쾌했다. “(살고 있는 집이)자가인지 전세인지 월세인지 체크하래요. 꼭 이런 것까지 밝혀야 하나 싶더라고요. 물어보는 ‘주거’가 제 자취방인지 부모님이 계시는 본가인지 애매하기도 했고요.” 그렇다고 빈칸으로 남겨둔 채 입사지원서를 제출할 수는 없었다. 심사과정에서 혹시라도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다. 입력하지 않으면 지원 자체가 불가능한 곳도 있었다. “물어보니까 대답해야죠. 어쨌든 저는 뽑혀야 하는 입장이니까요.”

 

취업을 위해선 자기소개뿐만 아니라 집 소개, 부모형제 소개까지 해야 하는 현실이다. 입사지원서의 항목들이 지원자의 개인정보를 과도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직무에 대한 지원자의 개인 역량을 검증하겠다는 서류 전형의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유에서다.

 

과도한 개인정보 요구, 지원자 차별가능성뿐만 아니라 유출 시 위험해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에서 지난 2011년 11월 기업 채용과정에서 발생하는 차별 관행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서울 시내 구직자 545명을 대상으로 한 이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70.4%가 채용과정에서 차별을 느꼈다고 답했다. 또한 구직자들은 차별 방지를 위해 요구하지 말아야 할 정보로 가족의 학력 및 직업(76.3%), 재산상황의 정도(86.8%), 가족형태(66.6%) 등을 꼽았다.

 

인권위 차별조사과 노정환씨는 “실제로 많은 구직자들이 지원서의 문항들 때문에 차별을 느꼈다고 진정을 접수하고 있다”며 “기업체들의 지원서 항목을 수정할 것을 수차례 권고하였지만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입사 평가에서의 차별 가능성뿐만이 아니다. 지원서가 외부로 유출되면 문제는 더 커진다. 지원자의 개인 신상정보가 고스란히 노출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2006년, LG전자의 온라인 지원 프로그램 해킹 사건이 발생해 입사지원서가 유출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2만여 명의 지원자 자료 중 3천 600여명의 입사지원서가 온라인상에서 열람된 것으로 조사됐다.

 

정보보안 전문 기업 마크애니 노정윤 과장은 지난 11일 보안뉴스에서 “많은 기업들이 보안을 강화했지만 여전히 해킹사고 등 보안 위협이 끊이지 않고 있다”며 “보안에는 100% 완벽이 없다”고 말했다. 보안 대책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애초에 개인정보를 과도하게 수집하지 않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예방책이라는 진단이다.

 

국내 기업 입사지원서 100개 분석 … 70곳에서 개인정보 과다 요구

 

본지는 국내 100개 기업의 입사지원서를 임의로 조사했다. 지원자 개인의 실력보다 가정 배경을 우선시하는 ‘닫힌 채용’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11월 19일부터 30일까지 채용공고를 낸 기업의 입사지원서를 대상으로, 가족사항(성명, 연령, 학력, 직업, 직장명, 직위, 동거여부, 기타사항)과 재산보유정도(동산, 부동산) 항목의 유무를 검토했다.

 

업종별 구체적 비교를 위해 △서비스업 △제조․화학 △의료․제약 △판매․유통 △교육 △건설업 △IT․통신 △언론 △금융업 △공기업 등 10개 업종으로 구분했다. 단, 조사 기간 동안 채용공고를 내지 않은 기업의 지원서는 분석대상에 포함시키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대다수의 기업에서 자체적으로 구축한 온라인 지원 프로그램을 사용해, 원서 접수 기간이 지나면 지원서를 열람할 수 없게 해놨기 때문이다.

 

분석 결과, 조사한 100개 기업 중 70개의 기업에서 지원자의 가족정보나 재산정보를 요구한 것으로 나타났다. 항목별로 봤을 때, 가족의 이름, 나이, 학력, 근무처 등의 가족 사항만 묻는 곳은 삼성 SDI 등 56개 기업이었다. 동화약품에서는 자가/전세/월세 같은 부동산 정보만 요구했다. 가족정보와 재산보유정보 둘 다 묻는 곳은 한화건설 등 13개 기업이었다. 그밖에 메리츠 화재, 삼표그룹 등 6곳에서는 가족의 월수입까지 기재하도록 했다.

 

업종별로 비교했을 때, 가족사항이나 재산보유정도를 묻는 기업이 많은 계열은 △의료/제약 △판매/유통 △금융업이었다. 각 10개 기업들 중 9곳에서 가족사항이나 재산보유정도를 물었다. △서비스업 △제조/화학 △건설 △언론계가 그 뒤를 이어, 각 10곳 중 8곳에서 가족사항 및 재산보유정도를 입력하게 했다. 교육업계에서는 10곳 중 6개 기업에서 가족 관련 정보를 공개토록 했다. 공기업은 나은 편이었다. 금융결제원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가족정보, 또는 재산정보를 요구하지 않았다. IT/통신 업계도 비교적 덜 물었다. 10개 기업 중 4곳에서만 가족 관련 정보를 물었다.

 

 

 

같은 그룹에 속해있어도, 업종에 따라 정보 요구 정도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도 발견됐다. SK건설에서는 가족사항을 물어봤지만, IT/통신 계열인 SK텔레콤에서는 가족정보나 재산현황을 묻지 않았다. 삼성도 마찬가지다. 제조/화학 계열인 삼성 SDI에서는 지원자의 가족정보를 요구했지만, 서비스 업종인 삼성 에버랜드에서는 가족 관련 정보를 묻지 않았다.

 

기업 측, 가족정보․재산정도 묻는 ‘나름의’ 이유 있어

 

“동일 조건 하에서는 직원들의 자녀를 우선 채용한다는 회사 방침이 있어 가족사항을 요구합니다.” 국내 한 대기업의 인력개발부 인사담당자 이 모 씨는 본지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채용 시 직원자녀를 우대하기 위해 가족정보를 묻는다고 밝혔다. 이 씨는 또한 “가족 관련 정보는 서류전형에서만 요구한다”며 “그 이후 전형에서는 가족에 관해 더 이상 묻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회사의 신입사원 선발 규정에는 종업원 가족 채용이 우대사항으로 명시되어 있다. 특히 규정 2항에는 ‘산업 재해로 사망한 종업원의 자녀가 당사에 취업을 원할 경우 1인에 한해 특별 채용한다’고 나와 있다. 문제는 직원 자녀를 위한 특별 채용 전형이 따로 마련 돼있지 않다는 점이다. 특채 대상인 지원자들을 공채 과정에서 우대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결국 직원 자녀라는 사실 자체가 소위 ‘스펙’의 기능을 하는 셈이다.

 

종업원 가족의 우선 채용을 인정한다고 해도 과도한 정보 수집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긴 힘들어 보인다. 직원의 가족인지 여부만 판단해도 될 사안에 대해 부모형제의 나이, 학력, 직업 등 가족 정보를 전부 물어보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기업들이 ‘영업’을 위해 지원자들에게 과도한 정보를 묻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10월 8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민주통합당 김영환 의원은 “기업이 입사지원 당시 구직자에게 가족관계나 재산정도의 항목을 요구하는 것은 인맥을 통해 영업지원을 받기 위한 일종의 사전검열”이라고 꼬집었다. 부모의 배경을 통해 실적을 충족시킬 가능성을 가늠할 목적이라는 거다. 실제로 수협유통의 경우, 입사지원서에 가족뿐만 아니라 친인척과 지인의 성명, 연령, 직장, 직위, 연락처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재산보유정도를 가장 빈번히 묻는 금융권의 인사팀과 인터뷰를 시도했다. 입사지원서에서 재산현황을 묻는 이유를 듣기 위해서다. 유의미한 답변을 듣기는 어려웠다. 대부분의 금융사에서 “재산현황을 기재하는 것은 필수사항이 아닌 선택사항”이라며 대답을 회피했기 때문이다. 하나캐피탈 인사담당자는 지원자의 가족정보나 재산보유정도가 입사 평가에 있어 점수화 되어 반영되는 요소는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신뢰가 중요한 금융권의 특성상, 재산보유도를 묻는 항목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가족 관련 문항, 과거에도 있었다 … 언제부터 ‘문제’ 됐나

 

“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이력서에 가정환경을 쓰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이화여대 사회학과 이주희 교수는 입사지원서 내 가족 및 재산 관련 항목이 문제시 된 것은 최근의 일이라고 설명했다. “당시에는 기업의 힘이 지금보다 컸고, 가족 중심적 사회의 관행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가족보다는 개인 중심적이 됐어요.” 이 교수는 또한 “성별이나 인종, 연령 등으로 인한 차별에 대해 우리 사회의 민감성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호주제 폐지를 그 변화의 예로 들었다.

 

실제로 지난 2008년, 정부는 ‘1가(家) 1적(籍)’ 개념의 호적부를 없앴다. 대신 ‘1인(人) 1적(籍)’ 개념의 가족관계등록부를 만들었다. 호주를 중심으로 했던 ‘집안’ 개념이 약화된 동시에, 가부장적 요소로 인한 차별은 점차 해소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사회 전반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지만, 고용 부분에서는 그러한 변화가 더딥니다.” 이 교수는 기업들이 사회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법과 제도, 그리고 국민들의 의식은 바뀌고 있는데, 기업에서는 개인의 능력과 관계없는 가족 관련 정보를 여전히 개인 평가의 척도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국내 기업들의 고용 문화가 후진적이며, 기회의 균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분석이다.


외국회사는 다르다 … 개인정보보다 실무경험에 초점

 

외국 회사의 경우는 어떨까? 포드 자동차회사는 채용 시 실무경험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프랑스 화장품회사 로레알의 입사지원서는 아예 정해진 형식을 두지 않는다. 지원자가 프레젠테이션이나 포트폴리오 등 원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소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로레알 코리아’가 지원서 형식을 정해놓고 가족의 학력, 직업 등을 묻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아메리카지역연구사업팀 유성진 교수는 서구, 특히 미국의 이력서는 대부분 ‘자유 형식’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특유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문화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지원자들은 성명과 주소 아래에 자신이 가장 내세우고 싶은 점을 자유롭게 적을 수 있다. “학점이 좋으면 성적을, 경력이 많으면 경력을, 리더십이 출중하면 그것을 증명 가능한 이력을 쓰면 됩니다. 말 그대로 개인은 개인 그 자체로 보겠다는 거죠.”

 

독일, 프랑스, 스웨덴과 같은 EU 국가들은 ‘익명 이력서 제도’를 도입해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족관계는 물론 경우에 따라 지원자의 이름, 성별, 주소, 연령까지도 묻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인권위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익명 이력서 제도 실시 이후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여성 근로자 수가 두 배로 증가했다. 고령자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의 채용 사례도 많이 발견됐다. 지원자의 직무 수행 능력, 직무 적합성 정도만 평가한 결과다.

 

‘표준 이력서’ 유명무실 … 기업과 정부, 지원서 항목 개선 의지 필요

 

고용노동부(이하 노동부)는 지난 2007년, ‘표준 이력서’를 만들었다. 직무 능력을 중심으로 직원을 선발하자는 취지다. 표준 이력서는 성차별 및 외모중심 선발을 막기 위해 사진란을 없앴다. 나이를 파악할 수 없도록 주민등록번호 앞 2자리도 삭제하게끔 한다. 성별, 혼인여부, 가족관계 등의 개인정보도 요구하지 않는다. 노동부는 정부ㆍ공공기관 및 1,000인 이상 사업장에 이를 보급해 권고했다.

 

표준 이력서가 보급된 당시, 다수의 기업에서 표준 이력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표준 이력서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노동부조차 표준 이력서를 지키지 않았다. 실례로, 노동부의 산하기관인 한국고용정보원의 연구보조원 채용 이력서는 지원자의 가족관계와 가족의 직장정보 항목을 담고 있었다.

 

인권위 언론홍보담당 윤설아씨는 “인사채용과정은 기업의 고유한 영역이기 때문에 의무화하거나 강요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입사지원서 내 가족정보 및 재산현황 항목에 인권침해의 소지가 분명히 있는 만큼, 정부와 기업의 적극적인 개선 노력이 시급하다”며 표준 이력서의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적극적인 시행 의지가 없으면 무용지물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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