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이 가진 옛 이야기의 힘은 변함없이 시청자들을 끌어 들인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사극은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가리킨다. 이중에서도 정통 사극은 가능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객관적인 연출을 추구한다. 그래서 역사적 흐름과 세세한 고증 때문에 정통 사극은 딱딱한 역사책 같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최근에는 정통 사극 대신에 ‘퓨전사극’이라는 장르가 자리를 잡으며 다양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정통 사극과는 달리 상상력의 비중이 커진 퓨전 사극이더라도 역사 고증 논란은 피해갈 수 없다.

사극·시대극의 진화, 퓨전 사극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KBS 2TV 수목드라마 <천명: 조선판 도망자 이야기>, MBC 월화드라마 <구가의 서>, SBS 월화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 등은 모두 안방극장을 점령한 다양한 사극 드라마다. 이들은 정통 사극이 아니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실존 시대와 배경 속에 실존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연출자의 문화적 상상력 비중이 커진 ‘퓨전화된’ 사극이다.

시대에 대한 연출자의 주관적인 시각이 강조되고 문학적 상상력의 비중이 커진 퓨전사극은 현재 역사물의 대세라고 볼 수 있다. 타임슬립(Time-Slip,시간여행), 허구적 인물과 같은 다양한 판타지 요소가 도입된 퓨전사극은 소재의 다양성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작년 방영되었던 MBC의 <해를 품은 달>, <아랑사또전>, <닥터진>, KBS의 <전우치>, SBS의 <신의>, <옥탑방 왕세자>, <대풍수> 등이 모두 퓨전사극인 것을 보면 그 인기를 알 수 있다.

빠지지 않는 고증 논란

이처럼 퓨전사극의 다양한 소재는 시청자들에게 흥미로운 볼거리와 신선한 재미를 준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구체적인 시대와 실존 인물을 차용한 퓨전사극의 부실한 고증으로 인한 역사 왜곡 논란이다. 허구성이 첨가된 퓨전사극이라고 못 박고 시작하더라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 때문이다.

최근 논란이 된 장면 중 하나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 3회분에서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장옥정의 모습이다. 이에 대해 시청자들의 야유가 쏟아지자 제작진은 “퓨전사극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봐주길 바란다.”며 드라마의 특성으로 이해해 달라고 해명했다. 단순한 실수가 아닌 각색으로 보아달라는 말은 사소한 고증 오류조차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다.

이 뿐만 아니라 <장옥정, 사랑에 살다>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스탠딩파티, 마네킹, 패션쇼 등을 등장시켜 논란을 일으켰다. 등장인물들이 가채를 쓰지 않고 머리에 쪽을 지는 것도 당시 시대적 상황과 어긋난다. 사람이 죽은 뒤에 붙여지는 호인 시호 ‘인경’과 ‘인현’을 극중 산 사람의 이름으로 사용한다는 점도 가장 기본적인 고증인 호칭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퓨전’은 방패가 아니다

대학생 A양(22세)은 이에 대해 “역사인식이 확립되지 않은 청소년들도 많이 접하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특성상 기본적인 사실을 왜곡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더구나 퓨전 사극에 가상의 인물이 아닌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이 등장하는 경우에는 시청자들이 드라마 속 상황이 가상임을 항상 인식하고 보는 것이라 전제하는 것이 옳지 만은 않다. 웬만한 역사 지식이 있는 시청자들조차도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지 혼동하기 쉽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고증에만 매달리면 작품의 흐름이 깨진다는 주장도 있다. 퓨전 사극이 등장한 이유에는 역사왜곡 논란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연출하고 싶은 제작진의 고충이 있다. 철저한 고증과 연구가 필요한 정통 사극의 제작이 쉬운 일이 아닌 까닭이다. 그러나 <장옥정, 사랑에 살다>가 유독 고증 논란이 많은 이유는 장희빈과 숙종이라는 실존 인물을 차용해 퓨전과 정통의 경계에 있어 작품의 방향이 애매하기 때문이다. 창조된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몇 차례나 드라마로 만들어져 친숙한 배경과 인물을 소재로 삼아 시청자들은 더욱 고증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퓨전 사극의 정체성

그렇다면 허용할 수 있는 창작과 상상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해야 하는지가 문제다. 잘 만든 퓨전사극 중 퓨전으로서의 확실한 정체성을 갖추거나, 꼼꼼한 고증을 세심하게 깔아 더욱 빛나는 작품이 있다. 퓨전사극 중 호평을 받았던 대표적인 작품인 <해를 품은 달>과 <뿌리깊은 나무>가 그 예다.

지난해 돌풍을 일으켰던 MBC의 미니시리즈 <해를 품은 달>은 동명의 원작을 바탕으로 드라마의 배경을 ‘조선의 가상 왕 시대’로 정의했다. 드라마는 시작 부분에 자막으로 “이 드라마는 조선의 가상 왕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픽션으로 역사적 인물, 사건과는 무관합니다.”를 미리 알린 후 작가가 창조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애초에 퓨전사극의 방향을 명확하게 잡아 역사왜곡 논란을 막았고 조선시대에 관한 고증 또한 탄탄하다는 평을 받았다. 재작년 SBS에서 방영한 <뿌리깊은 나무>는 원작을 기반으로 한 탄탄한 스토리라인으로 훌륭한 팩션(faction,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새로운 장르)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드라마는 세종대왕을 포함한 여러 실존인물을 통해 한글 창제 이면의 극적 사건을 추리한다는 설정으로 역사적 고증을 소홀히 하지 않은 수작으로 꼽힌다.

텔레비전 드라마가 시청자들의 상식과 정서에 끼치는 영향은 간과할 수 없다. 다양한 사극드라마에 출연했던 영화배우 이순재는 “퓨전사극에서는 우리 전통이 훼손되는 경우가 많다. 제작시 역사적인 고증을 거쳐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제작진은 책임감을 가지고 재미와 고증사이의 균형을 지켜야한다. 시청자 또한 드라마는 드라마대로 즐기고 실제 역사는 어떠한지 찾아보는 습관을 기른다면 모두가 만족스러울만한 수준의 퓨전사극이 탄생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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