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여행 수기

로스앤젤레스, 혹은 나성. 역사적인 사건이나 유물을 떠올리려 해도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들은 그 유명한 헐리우드 간판이나 베벌리 힐스를 떠올릴 것이며 어떤 이들에겐 유명한 스타들의 파파라치 사진의 배경이 되는 곳으로 인식되어있을지 모른다. 누군가는 화려한 도시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사람으로 치자면 잔뜩 멋을 낸 배우의 느낌이랄까.

한 달,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동안 지내며 보고 느낀 나성은 멋을 낸 배우 같기도 했고 잰 체 하지 않는 평범한 생활인 같기도 했다.  

 

▲ 나성의 거리

 

1월의 나성은 겨울이라는 계절이 무색할 정도로 따뜻했다. 서울에선 필수품이었던 목도리와 두툼한 코트는 도착한 순간 필요 없는 물건이 되어버렸다. 햇살은 따사로운 수준을 넘어 뜨거울 지경이었지만 워낙 건조한 기후 탓에 해가 지면 금세 서늘해져 서울의 초가을 날씨 정도였다. 질릴 만치 덥거나 춥지도 않다니, 날씨만으로도 천사들의 도시라는 수식이 수긍이 갔다.

나성은 도보 여행자에겐 친절하지 않은 도시다. 뉴욕은 지하철 등 대중교통망이 도시 전역에 뻗어있고 걸어 다녀도 지루할 틈 없이 블록마다 새로운 것들이 가득하지만 나성은 다르다. 기본적으로 차가 없이는 이동하기 힘들고 지하철이 있지만 다운타운 일부만이 연결되어 있는데다가 서울의 그것만큼 쾌적하지도 않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런 단점들은 쉽게 넘겨버릴 만큼 나성은 흥미롭다. 셀 수 없이 다양한 사람들과 문화가 존재하지만 신기하게도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며 또 어우러지는 곳이기에 여행자로서 느끼는 이질감이 덜하다. 영어 한마디 사용하지 않고도 돌아다닐 수 있는 한인 타운에선 이방인이라는 긴장감을 잠시 풀 수 있었으니 말이다.

 

▲ 다양한 인종을 담은 벽화

 

건물 곳곳에 한국에서는 찾기 힘든 벽화 형태의 옥외 광고들이 눈에 띈다. 며칠 사이에 고층건물의 중간까지 차있던 그림이 어느새 건물 한 면을 채운 섬세한 광고로 변해있다. LED 소재의 광고판이 즐비한 시대에 벽화로 된 광고라니, 어딘가 생경했지만 수작업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광고 혹은 벽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정성과 진짜 ‘그림’ 이 주는 특유의 감성에 기분이 좋아진다.

 

▲ 다운타운 건물의 오래된 벽화

 

미국의 미술관 하면 뉴욕의 모마(The Museum Of Modern Art)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성에도 이에 필적하는 근사한 미술관들이 있다. 게티 뮤지엄, 모카(Museum of Contemporary Art: MOCA) 등 화려한 소장품 목록을 지닌 이 미술관들은 나성엔 영화산업 외에 독특한 문화를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편견을 깨준다.

모카 뮤지엄과 그 분관이라 할 수 있는 모카 게펜 컨템포러리(이하 게펜)는 나성에서 몇 안 되는 도보로 이동 가능한 거리 내에 위치한 명소들이다. 모카 본관에서 게펜까지 열 블록 내외를 걸어가다 보면 로스앤젤레스 타임즈 본사도 보이고 디즈니 콘서트홀도 볼 수 있다. 유려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디즈니 콘서트홀은 부드러운 동시에 힘찬 느낌을 주는데, 건물 외관이 하늘빛을 그대로 반사해 건물 그 자체가 하나의 근사한 조형물이 된다. 낮이면 하늘을 반사해 푸른빛을, 석양이 질 때면 노을빛을 반사해 자주 빛을 띤다. 길을 따라 로스앤젤레스 경찰 청사를 지나칠 때면 유치장 보석금을 내주겠다며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과 마주치기도 하는데 불쾌하다면 불쾌하고 독특하다면 독특한 경험일 것이다.

 

 

리틀 도쿄에 위치한 게펜은 보통의 미술관이나 갤러리처럼 조용하거나 작품이 관람객을 압도하는 느낌이 아닌 편안한 분위기였다. 누구나 미술관 중앙에 위치한 작은 방에서 무료로 다양한 예술관련 서적을 읽을 수 있고, 토론도 가능하다. 게펜은 전시에 대해 아무런 정보 없이 온 관람객에게도 친절했다. 단순히 전시되는 작품과 작가에 대한 간략한 설명만을 늘어 논 재미없는 책자는 없다. 전시되고 있는 작가의 모든 작품과 설명 그리고 작가의 이력이 자세하게 설명된 책자와 영상을 보다보면 작품에 더 가까워진 기분이다. 방문 당시 80년대 남미 팝 아트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는데, 동력장치를 달고 끝없이 회전하는 사무실 의자부터 관람객이 들어간 모습이 스크린에 반사되는 실내 수영장까지 독특한 형태와 형식의 작품들의 연속이었다. 이는 나성과 모습과 닮았다. 겉보기엔 자로 잰 듯 반듯할지 몰라도 어느 순간 여행객에게도 편하고 일상적인 공간이 된다. 

 

▲ 산타모니카 해변

 

나성에 인접한 산타모니카는 어떤 취향의 여행자이건 만족할만한 곳이란 느낌이었다. 표현 그대로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집주인의 취향을 명확히 드러내는 집들, 맞은편의 수직에 가까운 절벽이 어우러져 독특한 조화를 이룬다. 경치도 경치지만 ‘사람 구경’하는 재미도 있는 곳이다.

 

 

겨울인데도 서핑보드를 안은 사람들이 파도에 휩쓸린다. 긴 백사장을 따라 걷기 좋게 포장된 도로에는 다양한 인종과 나이대의 사람들이 걷거나 뛰고 롤러스케이트를 탄 채로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온갖 종류의 독특한 자전거도 보인다. 도로 근처에 홈리스들이 삼삼오오 모여 텐트에 새까만 해적 깃발까지 걸어놓고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는데 험악하거나 우울해 보이기보단 행복해 보인다. 심지어 순하게 생긴 큰 개까지 데리고 있다.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 홈리스라니’싶어 신기하다가도 이런 날씨에 이런 바닷가와 이런 햇살이라면 우울하려해도 우울할 수 가 없겠구나 싶다.

 

 

 

 

나성은 복합적이다. 나성이라는 울타리 안에 공재하는 수많은 인종, 문화, 취향이 매 순간 다른 나성을 만든다. 한 단면만으로 나성을 판단할 수 없는 이유다. 별들의 축제라는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지만 여느 도시처럼 소박한 벼룩시장도 열린다. 한편에는 눈이 시릴 정도의 형광 분홍색의 허술한 간판을 단 핫도그 가게가 있고 또 한편에는 심심한 무채색의,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이 되는 콘서트홀이 있다. 화려하다가도 소박하고, 무미건조하다가도 재미있다. 판단을 내리려는 순간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도시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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