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필요없는 영화

제목이 나올 차례인데, 하늘색 스크린의 y축을 대칭으로 왼쪽과 오른쪽에 차례로 그림만 뜬다. 문자의 설명이 없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림. 검은 고양이와 흰 고양이의 아이콘이다. 배우들도 대사보다는 온몸으로 관객을 웃긴다. 재미있으려면 설명은 필요 없다. 엉덩이로 기둥에 박힌 못을 뽑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면 그냥 보면 된다. 그럼 슬랩스틱 코메디인가? 어쨌든 재미있다.

유고라는 나라

인종 갈등, 내전, 독재, 공습, 사막… 유고 영화라는 말에 언뜻 떠오른 막연하고 부정적인 단어들이다. 그러나 정작 영화 속의 유고인들은-집시에 한정되더라도- 얼굴을 찌푸리는 일 없이 세상 누구보다도 낙천적으로 살아간다. 파란 하늘, 눈부신 태양 아래 해바라기 밭에서 '날 잡아 봐라~'하고 달리는 연인들의 천진한 미소에서는 어떤 그늘도 찾을 수 없다. 감미로우면서도 흥겨운 집시음악, 팝송, 테크노, 아리아 등 쉼 없이 흐르는 음악소리에 맞춰 집시들이 벌이는 과장된 몸짓들도 모두 우스꽝스런 춤만 같다. 사기를 밥먹듯이 치고 당하면서도 끊임없이 사랑하는 다뉴브 강변의 집시들. 이들에게는 항상 지니고 다니는 총 마저 단지 위협용이거나 심지어는 장난감처럼 보인다. 젊은 집시여인은 장총을 아슬아슬하게 겨냥해서 뚱보 아저씨를 놀래키는 일을 놀이를 삼고, 갱 두목의 권총은 잔치나 결혼식 등에서 흥을 돋구는 축포로 가장 애용된다. 크레인에 총 구멍이 뻥뻥 뚫린 시체가 매달린 장면조차 가장 배꼽을 잡는 장면 중 하나다. 이렇듯 의도적으로 영화를 가볍게 이끌어간 감독, 에밀 쿠스트리차는 전작 <언더그라운드>까지의 영화들이 자신과 관객에게 지워주던 무거운 짐이 부담스러웠다고 고백한다. 과연 아무런 역사적 정치적 배경이 없는 코메디 영화로 시도된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는 감독과 관객에게 모두 휴식 같은 영화다. 다시 힘을 얻기 위해서 더욱 필요한.

돼지는 자동차를 먹고 사람은 돼지를 타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2대에 걸쳐 같은 갱 두목에게 사기를 당한다. 빚을 빌미로 손자도 팔려가듯 강제결혼 당할 뻔했다. 이럴 땐 의례 주인공 격인 손자가 악당에게 총을 한방 먹이는 걸로 복수하며 끝나는게 보통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손자 자레가 복수의 방법으로 택한 것은 휘파람 소리를 듣고 달리는 염소를 이용해서 악당을 뒷간 똥통에 빠뜨리는 것! 제목이 주는 비중만큼 이 영화에서는 동물 배우들의 연기도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다. 부채를 부치는데 쓰이는 쳇바퀴 속의 다람쥐는 자기가 달리고 싶을 때만 기꺼이 달려주고, 어디든 떼를 지어 다니며 분위기를 조성하던 거위들도 결정적인 순간에 몸을 던져 열연한다. 감시 카메라에 잡힌 교미하는 강아지들과 사람을 태우고 달리는 돼지는 그 중에서 엑스트라. 게다가 죽었던 두 집시 노인들이 살아나는 순간의 유일한 목격자도 바로 검은 고양이와 흰 고양이다. 두 노인이 부활하면서 급격히 해피엔딩으로 매듭 지어지는 이 마법같은 사건의 비밀을 고양이만 알고 있다? 어쩌면 죽었던 노인들이 새로운 목숨을 얻은 순간 검은 고양이와 흰 고양이는 9개의 목숨 중 하나씩을 포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코디언 속에 행복이 있다.

자레의 할아버지 자리야는 손주가 원치 않는 결혼식을 훼방 놓기로 결심한다. 결혼식 날 전 재산을 넣어둔 아코디언을 연주하면서 우아하게 숨을 거두는 것. 그러나 정작 자신의 죽음이 은폐되고 결혼식이 강행되자 이번엔 멈추었던 숨을 다시 내쉬는데…. 결국 진정으로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떠나는 손자에게 다시 살아난 할아버지는 은밀히 당부한다. 아코디언을 잊지 말라고. 과연 비현실을 넘어서 초현실적인 사건 전개와 작위적인 해피엔딩. 그러나 이렇듯 거짓말 같은 집시들의 한바탕 해프닝 속에서 오늘날 유고를 지탱하는 숨은 힘의 원천을 느낄 수 있는 까닭이 뭘까? 마음이 따뜻해지는 한편 저려온다. 과장되고 희화화된 집시들에게서 오히려 소박하고 긍정적인 삶의 진실을 본다.     

김재은 기자<dewed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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