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질서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춤추는 것을 거부하는 스물 한 살의 젊은 재즈 댄서(Jazz dancer)를 만났다. 그의 이름은 김상준(서울 재즈 아카데미 강사).

추석을 앞둔 백화점 앞은 사람들로 붐볐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도 없는데…. 길에서 어정쩡하게 만나기에는 빗줄기가 굵다. 그도 비를 맞으며 나타났다. 전화로는  "불량한  옷차림이거든요"라고 했는데 역시 예사롭지 않다. 카키색 밀리터리 모자에 진 남방, 커다란 워커. 그는 인순이 뮤지컬 콘서트 [송&댄스]와 뮤지컬 [하드록카페]의 공연 안내 책자를 들고 왔다. 출연진 중 맨 마지막 줄에 설명된 그의 프로필은 유난히 짧다.

 
대중과 호흡하지 않아도 좋다

"아직 경력이 짧아요. '하드록 카페'는 학원의 정규 과정을 다 마치기도 전에 시작한 거니까 파격적 발탁이라고 할 수 있죠."  97년 5월 '서울 재즈 아카데미'에 들어가 1년 코스를 밟던 중이었다. 작은 역할이었지만 두 달 동안 하루 10시간 이상 연습에 매달렸다. 연습을 하다보면 머리로 이해하고, 눈에 보이는데도 몸이 표현을 못하는 동작이 있었다. 그럴 때면 악에 바쳐서 될 때까지 연습했다.

"첫 공연 막이 올라갔을 때 무대에서 들었던 관중들의 환호 소리는 정말 짜릿했어요. 그때는 연습할 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구요. 온 힘을 기울여서 춤을 추게 되는 거죠." 아직 풋내기 춤꾼인 김상준은 그렇게 '무대 맛'을 보았다. 그리고 이제는 춤 없이는 살 수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참 이상해요. 몸이 아무리 힘들어도 음악이 들리면 춤을 추게 되요. 이젠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웃음) 중독됐나봐요."

한 달 반 여의 서울 공연과 무려 네 달 동안 이어진 지방 순회 공연, 다시 서울에서의 앵콜 공연을 모두 합하면 100회 이상 무대에 올랐다. 그래도 그는 매 공연을 새로운 마음으로 임했다. "나중에는 너무 많이 해서 지겨워 졌던 게 사실이예요. 그래도 매번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면서 무대를 내려왔어요.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 때문이었죠." 
 
요즘 TV에 등장하는 백댄서들이 그렇듯, 김상준도 춤을 추는 일에 전념하기 시작했을 4년 전에는 친구들과 뭔가를 공유한다는 느낌과, 어려운 춤 동작을 배워 나간다는 정복감에  마음이 이끌렸다. 무대에서의 희열을 맛보고 춤에 대해 그리고 나머지 인생에 대해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면서 점점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닌 자기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춤을 원하게 되었다. '대중과 호흡하지 않는 예술은 의미가 없다'는 흔한 말은 그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 대중과 호흡해 볼수록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만족이다.

평생 춤을 추며 살겠다고 결심한 이후로 그의 삶은 평범한 고등학생과 같을 수 없었다.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수능 시험을 치르고 대학에 합격까지 했지만, 그는 끝내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택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다가 내일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부모님도 더 이상 대학을 강요하지 않으셨고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춤을 출 수 있게 됐죠."

춤이 그렇게 좋다면 대학에 들어가 제도적으로 인정된 교육을 받는 일은 왜 생각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무용으로 그것도 힙합이나 재즈 댄스로 국내에서 대학을 간다는 것이 몽상에 가깝다는 것을 모른다면 말이다. "우리 나라 대학의 재즈 댄스 전공은 이제 한두 군데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꼭 대학에 가지 않더라도 제대로 된 춤을 배울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요."

스물 한 살 밖에 안된 어린 나이에 그는 너무 일찍 자신의 나머지 삶을 결정해 버렸다. 뭔가 더 배우고 터득하는 일에 시간을 쏟더라도 전혀 아깝지 않는 나이. 그는 이제 막 자기 내부의 밑바닥만을 채웠을 뿐인데, 벌써 남에게 얼마 되지 않는 밑천을 쏟아 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말대로 그는 '춤선생' 하기엔 너무 어리다. "가끔 생각하면 웃음이 나기도 해요. 아직 배우고 싶은 게 너무 많은 내가 누굴 가르치다니…. 강사도, 안무도 안하고 배우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고등학교 때는 대학에 가서 춤을 배우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죠. 제도권 춤을 이해하지 못했거든요. 지금은 나 자신이 만족할 수 있을 만큼 배우고 연습하는 일이 정말 급해요. 재즈 댄스는 추는 사람에 따라 스타일이 많이 다르거든요. 그걸 다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나중엔 '브로드웨이 댄스 센터(Broadway Dance Center)'에 가서 정통 재즈 댄스를 배워보고 싶어요."

춤은 '노가다'다

요즘 잘나가는 젊은 무용가들은 소위 '새로운 시도'라는 이름으로 힙합 댄스나 재즈 댄스를 차용한다. 그런 것도 유행인지 철저히 제도권 안에서 자라고 배운 안무가들도 질서와 무질서, 정통과 파격의 만남 운운하며 힙합과 재즈 댄스 같은 비제도권의 '최신춤'을 가미하기를 좋아한다. 김상준도 '평론가가 뽑은 젊은 안무가 시리즈' 공연에 참여한 적이 있다. "이제는 '주류'가 우리에게 배울 때이고 우리를 필요로 한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평론가가 극찬한 안무가도 이제는 그의 힙합과 재즈 댄스를 인용한 춤을 무대에 올리고, 그것으로 자신이 앞서가고 있다는 증거를 삼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자부심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

"대학을 나와서 무용단에 들어가고 안무가가 되고, 무용단의 단장이 되는 그런 코스는 내가 원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그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 것일까? "나중에 연습실 하나 마련해서, 잠을 자고 눈을 떴을 때 항상 연습실 이였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하려면 돈도 있어야 하고, 열정도 잃어버리지 말아야겠죠." 그는 앞으로도 그저 춤을 추는 사람으로 남길 원한다.

댄서가 되고 싶어하는 10대들을 만나 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중학교 특별 활동 시간에 춤 동아리를 가르쳐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몇 번 연습하고 나면 애들이 '이게 아닌데…'라는 똑같은 표정을 지어요. 생각보다 너무 힘들어서죠. 겉으로 보기에 멋있고 화려할수록 연습은 힘들고 많은 노력이 필요한 법인데, 그런 걸 알 리 없잖아요."

"춤은 예술성 빼면 '노가다'예요. 춤 하나만 믿고 춤판에 뛰어드는 사람은 얼마 못 가죠." 그는 육체적 고통, 정신적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일에 시간을 무한정 투자하고 돈 벌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하라는 것만 미련할 정도로 다 할 자신 있을 때 시작해도 어려운 것이 춤이라고 했다. "춤으로 인정받는 일에 소질이란 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재능은 15% 정도, 나머지 85%는 연습이고 노력이고 인내죠."

요즘 속속 생겨나기 시작한 사설 학원에는 재즈 댄스를 연극 영화과 입시를 위해 '배워두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특기란에 적어 넣거나, 면접 때 가산점이라도 얻어보려는 계산으로 한두 달 배우다 그만 두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재즈 댄스는 쉽게 출 수 있는 것인가보다. 그런데 왜 그는 이런 표현을 썼을까?  "춤 같지도 않아요."

"확실한 비전이란 건 없어요. 계단식으로 뭔가를 밟아 나가 성공하겠다는 생각 같은 것도 안해요. 하지만 스스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인터뷰 내내 그가 너무 일찍 비주류의 길을 선택해 버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는 그렇게 스물 한 살의 푸르름에 더 짙은 녹색을 입히고 있었다. 그것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한 것, "그는 '젊은이'다."

김상미 기자<dewedit@hanmail.net>

저작권자 © 스토리오브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