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30220

지난 설에 녹화해두었던 영화 'E·T'를 오늘로 드디어 열 번째 보았다. 다리가 짧고 배가  나온 데다 못생겼지만 착하고 귀여운 이티! 이티가 남자애와 가만히 손가락을 맞댈 때에는 나도 TV 화면에 손가락을 갖다대며 감동한다. 두 사람이 탄 자전거가 하늘로 날아오를 때에는 마구 발을 구르며 좋아한다. 이런 식으로 'E·T'를 보고 나면 언제나 지치게 되는데, 그 때마다 사먹는 이티콘은 정말 최고의 간식이다.

"앗! 엄마, 이건 이티콘이 아닌데."
"이런, 이건 이트콘이네. 엄마가 헷갈렸구나. 정말 비슷하게 생겼다. 이티 그림도 똑같고, 글씨도…."

엄마가 냉장고에서 꺼내준 아이스크림은 이티콘이 아니라 이트콘이었다. 엄마는 헷갈렸지만, 나는 포장지의 이티 그림이 좀더 위쪽에 있는 가짜 아이스크림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한두 번 먹어봤나 롯데삼강 이티콘∼

"EaT콘이 뭐야? 치사하네, 에이는 잘 보이지도 않고."

포장지를 뜯어 조금 먹어보니 맛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이왕 먹기 시작한 것… 버리기도 아까우니 다 먹기로 했다. 'E·T'가 유행한다고 해서 이티콘이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정체 불명의 이트콘은 도대체 뭘까. 이트라고 쓰고 이티라고 읽게 하다니 나쁜 사람들이다.

# 19830419

"여보, 조세형씨가 붙잡혔대. 반항하다가 총도 맞구. 엿새 만인가?"
"도둑한테 씨 자는 왜 붙여. 감옥에서 탈주하니까 당연히 잡히지, 엿새면 오래 버틴 거야."
"그래도 나쁜 도둑놈하고는 다르지, 못된 부자들만 털었잖아. 도망다니면서 사람은 해치지도 않고. 대도 소리는 괜히 들었겠어요."

「대도 조세형」. 요 며칠 동안 TV에서 매일매일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이름이다. 그 아저씨가 훔쳤다는 부잣집의 예쁜 보석들도 자주 나왔다. 사파이어 왕자, 루비 공주만 알고 있던 나는 물방울 다이아 같은 보석 이름을 이번에 처음 들어보았다. 물방울 다이아말고도 신기한 이름이 많았는데 벌써 다 잊어버렸다. 나는 엄마랑 목욕탕에서 튀기면서 노는 물방울들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방울에 다이아를 합하면 더 예뻐지는 걸까?

나쁜 도둑놈이랑 다르면, 착한 도둑 아저씨라고 해야 하는 모양이다. 태어나서 4년 평생을 살아온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다. 도둑을 맞았는데도 비웃음을 당하는 사람들. 감옥에서 도망친 도둑인데도 동정을 받는 아저씨. 누가 나쁜 사람이고 누가 착한 사람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세상에는 그 둘로만은 나눌 수 없는 다른 어떤 무언가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내가 아직 표현할 수 없는.

# 19830429

우유도 야쿠르트도 먹지 못하게 된지 한참이 지났다. 몇 달 전 어떤 카바레에서 청산가리를 탄 야구르트가 발견된 다음부터 '음료 공포'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게다가 며칠 전에는 병원에서 한 아저씨가 독이 든 초코 우유를 마시고 덜컥 죽어버렸다고 했다. 덕분에 맛있는 초코 우유나 딸기 우유 같은 건 아예 사먹을 생각도 못하고, 야구르트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독을 탄 게 누구야!

"그 을지병원 독살사건 있잖아. 그 남자 부인이 범인이래요, 김연주씨. 오늘 검거됐대."
"…나도 조심해야겠네."
"……. 보험금 탄다고, 아들까지 끌어들인 거 있지. 열 살 짜린데. 아빠한테 우유 갖다주라고 하고, 경찰한테는 거짓말하라고 시켰대."

남편이 죽었다고 그렇게 통곡을 하는 모습을 뉴스에서 봤는데. 그 아줌마가 범인이라니 거짓말 같다.

"희대의 남편 독살사건이라고 뉴스도 신문도 얼마나 떠들어대는지. 애만 불쌍하게 됐어."

가족을 죽여대는 이야기는 푸른 수염 같은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줄 알았는데, 정말 한가족을 죽이는 사람이 있었다. 어쩌면 세상은 갈수록 살벌해지는 걸까.

# 19831019

분홍색 사자머리의 요술공주 밍키! 오늘은 무엇으로 변신할까? 두근두근 하면서 화면에 눈을 푹 담그고 있었다.

"도카코즈, 너희들을 이겨주겠어!"

월드 시리즈 우승 야구팀인 도카코즈를 이기기 위해 밍키는 야구선수로 변신했다. 밍키는 여자 야구팀을 만들어서 몇 번 연습을 하더니 단번에 도카코즈를 이겨버렸다. 멋지다 밍키! 그런데 그 다음은, 역시 뿌듯하고 자랑스럽긴 했지만 조금 이상했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의 관심사는 '도카코즈를 이겼다'는 게 아니라 '여자들이 도카코즈를 이겼다'는 거였다. 이상한  사람들이야.

"엄마. 나는 커서 야구선수가 될래."

나는 저녁 내내 밍키의 공 던지는 폼을 따라하다가 쓰러져 잠이 들었다. 반쯤 잠이 든 귓가에 엄마 아빠의 낮은 대화가 들려왔다. 아빠는 걱정스러운 목소리였고, 엄마는 웃고 있었다.

"갑자기 야구 선수는 무슨 말이야?"
"밍키 때문에 그렇지 뭐. 밍키가 경찰관이 되면 경찰관한다고 그러고, 테니스 챔피언이 되면 테니스한다고 그러는 거니까. 걱정할 거 없어요. 다음 주 목요일이면 또 다른 거 하겠다고 그럴걸?"

# 19831114

"어, 이산가족 찾기가 오늘로 끝이네."

6월 30일에 6·25 특집으로 나왔다가 인기를 끌어 여름 가을 동안 매주 방영되었던 '이산가족 찾기 운동'.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와서 끌어안고 울기만 하는 프로그램이라 나는 별로 재미있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그 시간만 되면 TV 앞에 앉아서 훌쩍거렸다. 엄마는 두고 온 사람도 없으면서 왜 맨날 우는 건지 모르겠다. 일전에는 '처음부터 헤어지지 않았으면 좋았잖아'라고 했다가 이해도 안 되고 재미도 없는 길고 긴 전쟁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그 동안 방송에 출연한 사람은 5만 3천 명이 넘고, 그 중 가족을 찾은 사람은 만 명 정도라고 한다. 그러면 가족들을 다시 만나지 못한 사람은 4만 명인데…. 나머지로 남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안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같이 행복한 세상이라면 참 좋을 텐데.

조혜원 기자<dewed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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