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최선열

 "물갈이"니 "젊은 피 수혈"이니 하는 원색적 말들이 오가면서 가뜩이나 뒤숭숭한 정가에  최근 한 일간지가 자체 제작하여 발표한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 성적표가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총선을 6개월 앞둔 시점에 국회의원들을 성적순으로 세워 놓았으니, "20걸"에 못들어 자존심을 상한 괜찮은 의원들이나 100위권에 턱걸이도 못한 부끄러운 의원들이나 모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게다가 경실련, 참여연대 등 40여 개의 시민단체로 구성된 [국정감사 모니터 시민연대]가  국정감사 기간 동안 의원들의 활동을 엄격하게 평가하여 성적표를 공개하겠다고 벼르고 있으니 국회위원들도 이제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을 갖게 된 것 같다.

 나는 이 성적표들이 더 잘 알려져 국민들이 자신을 대표하는 의원들이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 대표 민주주의가 발달된 선진국의 정치과정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유권자들이 자신의 지역구 의원들의 법안 투표성향과  원내외 의정활동을 꼼꼼히 점검하고 그 결과에 따라 선거에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의정활동 감시 운동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미국의 지난번 상·하원 선거에서 몇몇 스타급 다선 의원들이 업무과다를 이유로 스스로 사퇴한 것을 보면 이런 나라에서 의정활동을 제대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가를 짐작할 수 있다. 뒤늦게나마 우리나라 언론과 시민단체들이 본격적인 의정활동감시 활동을 전개하는 것은 정치발전을 위해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너무 힘들어서 국회의원 못하겠다"며 스스로 의원직을 버리는 국회의원들이 적지 않게 나올 수 있도록 시민운동이 뿌리를 내렸으면 좋겠다.  

 이번 조사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현재 성적이 좋은 의원은 지난 몇 년 간의 조사에서도 계속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과 반대로 의정활동이 부진했던 의원들은 여전히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임위 출석만 해도 받는 기본 점수도 못 받은 의원이 14명이나 된다는 사실에는 분노를 금할 수 없다. 대학에서도 학생들이 성적불량으로 학사경고를 세 번 받으면  제적이 되도록 엄격한 학사관리를 하고 있는데 우리 국민은 언제까지 그 많은 낙제생 의원들에게 관용을 베풀 것인가? 공천과정에서나 총선에서 이들 불성실하고 무능력한 바닥권 의원들을 솎아내지 못한다면 우리 국민들의 정치 불신은 더욱 더 심각하게 될 것이다.  

 상임위 활동, 입법활동, 주요직책 수행, 의정관련 원외 활동, 국민과의 접촉 및 민원관리, 도덕성 등 6개 분야의 종합평가 순위를 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양상이 나타난다. 첫째는 298명 전체 의원 중 11명에 불과한 여성의원들의 활동이 탁월하다는 것, 둘째는 야당이 된 이후 한나라당 의원들의 의정활동 성적이 크게 향상되어 재야출신 투사의원들이 많은 여당과의 성적차이가 눈에 띄게 좁혀졌다는 것, 셋째는 당선 횟수가 적을수록 성적이 좋다는 것, 그리고 전국구 의원들의 의정활동이 선입견과는 달리 매우 우수하다는 점이다.  여성, 야당, 초선, 전국구라는 특성이 의정활동의 우수성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여성, 야당, 초선, 전국구의 속성에서 우리는 공통점으로 그들의 기득권이 약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남성, 여당, 다선, 지역구의원들과 비교하면 이들은 상대적으로 가진 것이 없어 잃을 것도 없는, 그래서 소신껏 성실하게 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의정활동을 잘 하려면 힘으로부터 자유로워야"한다는 종합 순위 1위 김홍신 의원의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그렇다. 정치개혁을 위해 우리가 새로운 인물들을 찾아야 한다면 바로 힘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이다.  밀실정치, 보스정치 시대를 끝내기 위해서는 돈의 힘이건, 권력의 힘이건, 힘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성적표를 면밀하게 분석해 보면  여성 의원에게서 그 가능성이 보인다.  전체의원 중 4%인 11명에 불과한 여성 의원들 중 세 명이 상위 "20걸"에 포함되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7위를 한 이미경(한), 8위의 추미애(국), 12위의 김영선(한)은 당 지도부의 눈치도 보지 않는 맹렬 소신파 의원들이다. 그 외 100위권 안에 드는 의원이 3명 더 있어 11명중 6명이 비교적 좋은 성적표를 받았다. 물론 이들은 남성들에 비해 더 까다로운 자격심사를 거쳐 정치에 입문한 매우 실력있는 전문직 여성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남성 의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권력에 덜 사회화되었기 때문에 돈과 권력 등의 어떤 힘에도 연연해 하지 않고 의정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이념의 시대가 가고 교육, 환경, 인권, 문화 등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는 생활정치 시대가 열리게 되면서 최근 몇 년 간 선진국에서는 여성정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오래 전부터 여성의 정치참여가 높았던 북유럽국가에서는 물론이고 영국과 프랑스의 지난번 총선에서도 여성의원들이 대거 의회에 진출하였다. 많은 여성이 의회로 진출하게 되자 고풍스런 영국의 의사당 건물의 당구장이 탁아 시설로 개조되고 여성 전용 화장실과 휴게실이 개축된다는 해외뉴스를 보고 놀라움과 부러움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며칠 전 울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은 뉴욕에서 14개국의 여성 외무장관 초청 모임을 가졌다. 이들 여성 외무장관들은 여성과 아동의 인신매매 문제를 유엔 총회 의제에 포함시키는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등 여성들의 정치감각을 당당하게 보여주었다.  이 모임을 주도한 울브라이트 장관은 그저 수더분한 아줌마로 보이지만, 탁월한 추진력, 협상력, 섬세한 행정능력으로 초강대국의 대외관계 최고 책임자의 막중한 임무를 인상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협상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독수리, 거미, 칼 등 디자인이 다른 브로치를 가슴에 달고 나가는 센스까지 발휘하면서 울브라이트 장관은 여성이라는 사실이 공무수행에 장애요인이 아니라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세계사람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확인했고, 이번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 성적표를 통해 우리도 확인한 여성들의 능력을 계속 사장시킨다는 것은 역사적인 과오가 될 것이다. 세계 최하위권인 여성의원 비율을 획기적으로 높여 주는 것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나라의 정치수준을 한단계 높여 주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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